토라포션 1 질서의 창조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10월 2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 질서의 창조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1:3-5)

오늘부터 토라포션을 시작한다. 혼돈스런 이 시대에 진리의 빛이 비쳐지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1: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이 말씀을 보면천지 창조 당시 우주는 혼돈과 무질서 상태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토후 바보후(תוהו ובוהו)’이다.토후’는 ‘혼돈, 빈 장소, 불모의 광야’라는 뜻이고 ‘보후’는 ‘공허, 폐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토후 바보후’인 세상에 말씀으로 창조 사역을 시작하셨다.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빛과 어둠을 나누사’에서 ‘나누다’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바달(בדל)’이다. ‘분리하다, 구별하다’라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본질은 구별하는 것이었다. 경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첫째 날 빛이 창조되면서 낮과 밤의 경계가 생겼다. 둘째 날 궁창이 만들어지면서 하늘과 땅의 경계가 생겼다. 하나님은 여섯 째 날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여 사람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하루 하루 창조를 마치시면서 ‘토브 메오드(טוב מאד),’ ‘매우 좋았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혼돈과 공허로 가득했던 땅에 창조의 질서가 들어왔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또 있다. 그것은 한계였다 하나님은 에덴동산 안에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두셨다. 하나님은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하셨지만, 선악과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금지하셨다. 그 한계를 통해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신 것이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한계를 두셔야 했다. 한계를 갖고 살아가는 것, 그것은 항상 절대자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인간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그 한계를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는 것으로 여기도록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그 한계 밖으로 넘어가도록 인간을 유혹했다. 아담과 하와의 눈에 그 한계 밖의 세상은 자신을 더 지혜롭게 해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한계를 넘어갔고, 그 결과 에덴을 상실하고 말았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며, 아담은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와 한계가 무너지는 곳에서 혼돈과 공허가 다시 시작되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유가 뭘까?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질서와 한계를 잘 관리하기 위해서이다. 고대 근동의 창조신화에서는 신들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는 오직 왕 뿐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그저 신들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고대근동의 신화는 신의 대행자인 왕을 위해 일하는 하층민이라는 수직적 질서 체계를 합법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런 신화와 달리 성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모든 인간이 신을 대행하는 왕같은 존재이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을 잘 관리해야 할 권한과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근동의 문화와 가치관를 뒤집는 혁명이자 복음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를 이 세상에 세워 나가도록 모든 사람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인간을 만드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선을 행할 자유를 주셨을 때 악을 행할 자유도 주셨음을 의미한다. 왜 하나님은 아예 악을 선택할 가능성을 없애지 않으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으면 사랑의 관계가 불가능하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마음을 졸이며 사랑하는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은 서로를 거절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거절하고 악을 선택할 자유가 있어야 그 반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랑의 관계가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하나님은 결코 죄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사탄이 아담을 죄로 유혹했고, 아담이 그 죄에 순종함으로 죄가 합법적으로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그리하여 항상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우리가 죄 짓기를 원하는 상태가 바로 인간의 실존이 된 것이다. 가인은 결국 죄를 다스리지 못했다. 그래서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만다. 이 후 세상은 홍수 심판 이전까지 더욱 혼돈과 공허로 가득 차게 된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할 가능성을 모르셨을까? 가인이 동생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을까?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고, 다른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셨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면서도 왜 인간을 창조하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믿음에 부응하여 순종하며 일어설 사람들이 있음을 믿으셨다. 창세기는 바로 그러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아담의 실패로 인간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축복은 저주로 바뀌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되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에서는 아담의 실패를 바꿀 인물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철저히 순종의 사람으로 등장한다. 창세기 37장에서는 가인의 실패를 바꿀 인물이 등장한다. 요셉이다. 사람과의 상처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요셉은 역경속에서도 형제를 용서하고 항상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불순종의 고리를 끊고 순종하며 일어설 사람들을 기다리신다. 미움과 분열의 영을 끊고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 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후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그러한 사명을 맡기셨다. 특별히 제사장들을 세워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지키도록 하셨다. 10:10-11,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여기서 ‘분별하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바달(בדל)’이다. 제사장의 사명은 한마디로 구별하는 것이다.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 창조 행위의 본질이었다. 따라서 제사장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이어가는 자였다. 그들의 사명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무엇인지,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와 한계가 무엇인지 구별하여,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를 이 세상에 세워 나가도록 부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명에 실패하고 만다. 그리하여 기원전 586년 국가의 멸망을 경험하고 만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멸망을 미리 내다보며 슬픔으로 이렇게 탄식한다. 4:19, 22-23, “슬프고 아프다 마음속이 아프고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여기서 ‘토후 바보후’란 단어가 나온다. ‘히네 토후 바보후 (הנה תהו ובהו)’ 예레미야는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도다’ 라고 탄식했다. 그는 땅이 혼돈과 공허로 가득하고 하늘은 빛을 잃었다고 표현했다. 유대 사회가 타락하여 창조 이전의 무질서와 혼돈 상태처럼 되었다고 그는 탄식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대신 세상과 우상에 무릎 꿇을 때 반복되는 것이 바로 ‘토후 바보후,’ 혼돈과 공허의 역사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에 연민을 느끼셨다. 그리고 책임감을 가지셨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통해  혼돈과 흑암의 세상에 빛을 던질 메시아가 올 것을 예고하셨다. 42:6-7, “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그리하여 태초에 말씀으로 존재하셨던 예수님은 때가 차매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사도 요한은 그 예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선포한다. 1:5, 9-11,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세상에 와서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자,세상은 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왜 사람들은 자기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까? 요한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3:19-20, “ 정죄는 이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그렇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여전히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둠 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인생에서 어둠이라는 혼돈을 끝내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도전한다. 1:12, 영접하는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그 분께 나아오라는 것이다. 태초에 혼돈으로 가득했던 세상에 말씀이 선포되면서 혼돈의 역사가 끝난 것처럼 우리 삶에 예수님이 들어와야 우리 인생의 혼돈이 끝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에 주인이 되셔야 ‘토후 바보후’였던 삶에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지 이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존재하신 모든 생명의 창조주요 구원자이시다. 바울도 동일한 사실을 이렇게 증거한다. 1:14-17, “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안에 함께 섰느니라 우리 인류는 이 아들을 통해 창조되었다. 우리는 이 아들을 통해 죄로 인한 혼돈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큰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이전의 일상을 잃어버렸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둘이 하나 될 것을 정하신 그 경계가 무너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기술 엘리트들은 유전자 조작과 기술 개발을 통해 인간 한계를 뛰어 넘어 신의 경지를 넘보는 시도들을 하고 있다. 하나님 대신 인간의 욕망이 우상이 될 때 인류는 혼돈과 공허라는 ‘토후 바보후’의 역사를 반복해왔다. 이 ‘토후 바보후’의 역사를 끝내는 길은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질서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세상의 혼돈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세워가는 제사장으로 이 땅에 부름 받은 것이다. 우리가 그 질서를 세울 수 있는 기준은 세상의 철학이나 인본주의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구별하고, 그것을 이 시대 사람들에게 가르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사탄은 계속해서 인류를 혼돈과 흑암 가운데 가두려 할 것이다. 사탄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이는 선악과를 인류의 입에 넣어주려 할 것이다. ‘이것을 선택하면 하나님처럼 될 거야’ 사탄은 이렇게 속삭이며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허물고, 그 경계 밖의 것을 욕망하도록 유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경계를 넘어설 때, 우리 역시 에덴을 상실하고 ‘토후 바보후’라는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한 동산 안에서 거니는 것보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 그 자체가 더 중요해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가 빠른 속도로 무너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혼돈과 흑암이 침투한 우리 일상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춰지길 소망한다. 말씀의 빛이 비춰짐으로 사물의 경계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가 세워지길 바란다. 말씀의 빛이 비춰질 때 우리 영혼의 혼돈이 끝난다. ‘토후 바보후’가 끝나고, ‘토브 메오드’, ‘매우 좋았더라’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한계를 지켜내는 창조의 청지기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질서를 유지하고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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