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10월 16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 완전함의 길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이 99세 때 나타나셔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을까? ‘완전하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아브라함에게는 별칭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히브리 사람(העברי)’이라고 불렀다. ‘히브리’는 ‘건너다’라는 히브리어 ‘아바르(עָבַר)’에서 온 말이다. 그는 강은 건너온 자였다. 우상을 섬기던 강 저편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강 이편으로 건너온 자였다. 갈대아 우르라는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강을 건넌 자였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이 있다는 것은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지대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안전지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순종한 아브라함을 보며 우린 기가 죽는다.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우린 ‘그가 과연 믿음의 사람이구나’라는 감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아브라함은 발빠르게 애굽에 살기 위해 그곳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다. 생존과 안전의 문제 앞에서 너무도 인간적인 반응을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좀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그도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이후로 그는 헤브론에 정착하여 거기서도 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다.
그 사이 함께 가나안 땅에 왔던 조카 롯과 헤어지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롯이 포로로 잡혀가자 아브라함은 그를 위해 자신의 군사 318명을 이끌고 나가 그를 되찾아 오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십 년이란 시간 동안 아브라함이 가장 원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즉, 땅과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라는 초조한 마음에 그녀의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주어 아이를 낳게 한다. 창 16: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십 년 이란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고 싶어하는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의 모습에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하나님은 13년 동안 침묵하신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가 아브라함의 나이 86세 였을 때인데, 그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어서야 다시 나타나신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제서야 나타나신 걸까?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삶이 이전에는 완전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않았다. ‘행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할라크(הלך)’는 ‘~을 따라서 걷다, 함께 가다’라는 의미가 있다. 16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따라서 걷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아내 사라의 의견을 따라 하나님보다 앞서서 걸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15장에서 하나님은 불안해 하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언약을 통해 확증해 주셨다. 당시 언약은 언약의 두 당사자가 짐승의 고기를 쪼개 놓고, 그 쪼갠 고기 사이를 걸어가는 행위로 맺었다. 이는 약속을 어긴 사람은 이 짐승처럼 쪼개져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피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쪼갠 고기 사이를 하나님을 상징하는 횃불만 홀로 지나가셨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약속을 못 지켜도 하나님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 부부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는 아브라함 부부를 보면서 하나님은 그들의 힘이 빠지기까지 13년이란 시간을 더 기다리셔야 했다.
로마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롬 4:18-20,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것은 결과적인 이야기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견고해진 것은 백 세에 이르러서였다. 그가 백 세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몸은 죽은 것 같았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 같았음을 그들은 알게 된다. 육신의 힘을 의지하여 자녀를 낳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더이상 할 수 없는 그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 오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완전해 질 수 있었을까? 완전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우리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완전함을 이를 수 있도록 두 가지를 행하신다. 하나는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할례를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창 17:4-5,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람’은 ‘높은 아비, 존귀한 아비’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란 뜻이다. ‘아브람(אברם)’이란 이름에 ‘여호와(יהוה)’를 상징하는 단어인 ‘헤이(ה)’가 더해져서 ‘아브라함(אברהם)’이 된 것이다. 인간적인 아브람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삶에 더해져야 했다. 이름이 바뀌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아브람’은 더 높아지고 존귀한 자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그가 그저 높고 존귀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민족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믿음의 아비가 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이름도 바꾸어 주신다. 창 17:15-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사래’는 ‘나의 왕비’란 뜻이다. ‘사라’는 그냥 ‘왕비’라는 뜻이다. ‘사래(שרי)’이름에도 ‘여호와(יהוה)’를 상징하는 단어인 ‘헤이(ה)’가 더해져서 ‘사라(שרה)’가 된 것이다. 인간적인 사래가 완전해지기 위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녀의 삶에 더해져야 했다. 그리하여 사라는 더이상 ‘아브라함의 왕비’가 아니라 ‘여러 민족의 왕비’가 되어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남편 잘 만나서 시집 잘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낳는 어머니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완전함인 것이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더해지시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그저 내가 높아지는 삶을 위해서 살게 될 것이다. 내 관심, 내 유익, 내 장래, 내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다. 더 높은 자리와 더 큰 명예를 얻는 삶을 통해 더 완전한 자가 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완전한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사람이다. 직장인들은 늘 시간에 쫓긴다. 학생들도 이제 개강을 해서 시간에 쫓길 것이다. 하나님이 더해지지 않은 ‘나의’ 시간을 살 때, 우리는 늘 시간에 쫓길 것이다. 그러나 나의 하루에 하나님이 더해지시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넓어지게 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는 열국의 아비와 어미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 역시 ‘나의’ 것에만 관심을 갖는 ‘아브람’과 ‘사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과 나의 정체성에 하나님이 더해져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믿음의 자녀들을 낳는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완전함을 이를 수 있도록 또 다른 것을 명령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할례다. 창 17:10-12,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할례가 왜 필요했을까? 할례는 남성의 생식기의 포피를 잘라내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는 생명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항복하는 의식이다.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힘으로 이스마엘을 낳는다. 그러나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항복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더이상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원하셨다. 하나님은 할례가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는 것이었다. 또한 가나안 온 땅을 그들의 기업으로 주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할례의 언약을 믿음으로 지킨 자들을 통해 그분의 언약을 이루어가기 원하셨다. 창 17:21,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여기서 ‘시기’는 히브리어로 ‘모에드(מועד)’다. ‘모에드’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에 따라 자신과 자신의 수하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데려다가 할례를 행한다. 이로써 ‘하나님의 때’가 찼고, 큰 민족의 씨가 될 아들, 이삭이 마침내 그 다음 해에 태어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는 고정적으로 정해진 때라기보다는 믿음이 준비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이 준비되면 하나님의 때가 시작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한다. 롬 4:11-12,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것은 세상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단순히 할례를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를 얻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완전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한다. 빌 3:8-9,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완전해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우리의 자아와 옛 사람을 못 박을 때, 우리는 죽지만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시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완전하신 예수님이 그렇게 내 안에 사셔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죽고 믿음으로 준비될 때 약속된 ‘이삭’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된 이삭이 태어나야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목적 안에 세우시길 원하신다. 우리에게 새 이름을 주시며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체성으로 살아가기 원하신다. 내 힘을 의지하며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이루는 열국의 아비와 어미로 살아가길 원하신다. 내가 높아지고 존귀한 자가 되어도 그것은 완전함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내가 연약해도 하나님이 더해지시는 삶, 내가 죽어도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 삶, 그것이 완전함에 이르는 길이다. 바라기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행함으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때가 열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