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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0일 5:27 오전 #314telavivchurch33키 마스터
בראשית “In the beginning “
창세기 1:1-6:8/ 이사야 42:5-43:10/ 요한복음 1:1-18
Genesis 1:1—6:8/ Isaiah 42:5—43:10/ John 1:1-18
토라포션1 생명나무의 길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 3:22-24)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이 금지하신 열매를 먹고 에덴에서 쫒겨난다. 그것을 우리는 실낙원, ‘낙원을 잃어버렸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낙원을 누려봤던 사람이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그런데 우리는 낙원을 잃어버린 문제를 아담의 이야기로만 여긴다. 그러나 사실 실낙원은 아담 이후 태어난 우리 모두의 실존이다. 우리는 에덴을 잃어 버린 자들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갈망하며 우리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려하는 것은 우리가 에덴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상실감은 뭔가에 중독되고, 뭔가를 성취해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에덴을 회복하는 길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에덴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동산에 두 나무를 두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와 생명나무였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한자 금지할 금(禁)자는 나무 목자 두 개(林)와 보일 시(示)자로 되어 있다. ‘보일 시’ 자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부수이다. 하나님을 말하는 ‘신신(神)’ 자 부수로도 씌었다. 하나님은 원래 보이지 않는 분이나 사람에게 보이시기 원하셨다. 보일 시(示) 자는 하늘 위에서는 한 분인 하나님이 하늘 아래에서는 세 분으로 보이신 것을 상징하는 단어다. 그래서 금지할 금(禁)자는 하나님이 두 나무에 대해서 명하신 것을 말한다.
왜 두 나무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살고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말해주시기 위함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상징이었다. 생명나무는 아담의 공급자로서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담이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 그것을 먹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반면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뭘까? 그것은 불순종이자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떠날 수도, 하나님을 선택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탐할 람(婪)자는 두 나무(林)를 바라보는 여자(女)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보이는 것에 여자가 먼저 흔들린 것이다. 여자는 그 열매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그것을 주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먼저 먹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선악과를 먼저 선택했다. 그 선택의 결과는 심각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 알게 된다. 벗을 라(裸) 자는 금단의 열매(果)를 따 먹고 벗은 줄 알게되어 옷(衣)을 입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수치와 두려움이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과 악을 알게 되어 서로를 판단하고 비방하기 시작했다. 창 3: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것은 아담의 대사다. 아마도 아담이 죽을 때까지 하와는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이 대사를 들먹였을 것이다. 비난과 책임전가로 인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였던 관계가 파괴된다. 옳고 그름을 알게 된 결과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와 사망이 이 세상에 합법적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 아닌 사탄에게 순종한 결과다. 그리하여 낙원을 상실한 것은 아담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실존이 되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4)”고 말했다. 이것은 기록된 최초의 거짓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담과 하와에게만 들려진 거짓말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들려지는 거짓말이다. 사탄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라고 부추긴다. 네가 너의 인생의 주인이 되라고 속삭인다. 그래도 죽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되신 하나님을 거절하고도 여전히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가 처한 현실을 이렇게 말하신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사탄에게 속아 선악과를 선택한 아담과 하와는 죄의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다. 생명되신 그분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영적인 사망이 임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두려워 떠는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이것은 동물의 희생을 통한 구속을 상징하는 것이다. 옳을 의(義)자는 손(手)으로 창(戈)을 잡고 양(羊)을 쳐서드리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는 나(我)의 죄를 위해 양(羊)을 드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아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시고 에덴에서 추방하신다. 그리고 생명나무의 길을 차단하신다.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이 생명나무의 길을 차단하신 것은 보복성 심판이 아니다.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리신 조치다. 죄를 지은 채 영원한 존재로 살게 되는 것은 저주이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영원히 차단된 것일까?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다시 이 세상에 시작됨을 보게 된다. 요 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해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다시 여신 것이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결코 생명나무에 이를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원죄가 처리되고 다시 생명나무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롬 5:17, 21,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고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안에 있는 아담의 죄를 처리해야 한다. 죄가 있는 채 영생에 이를 수 없다. 예수님을 통해 반드시 속죄를 해야 영생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갈라졌다. 그 휘장에는 그룹천사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창세기의 그룹천사들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를 지키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 휘장이 갈라졌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다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으로 가는 길이 다시 열린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우리는 요한의 환상을 통해 어린 양의 보좌 곁에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함을 보게 된다. 계 22:1-2,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그리고 이 생명나무는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약속을 보게 된다.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예수님이 생명나무의 길을 여신 이후로 우리 인류는 다시금 생명나무와 선악을 아는 지식나무의 선택 앞에 놓이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거짓의 아비 사탄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없이도 낙원을 누릴 수 있다고 거짓말 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거역하고 인간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라는 마음을 사람들에게 불어 넣는다. 신을 부인하고 인본주의적 사고를 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긴다. 무신론, 범신론, 진화론, 동성애 등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과 가치들을 퍼뜨린다. 그리하여 결국은 이 땅의 영혼들이 하나님의 생명에 이르지 못하고 멸망하도록 미혹하는 것이다.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을 들을 것인가? 거짓의 아비 사탄의 말을 들을 것인가? 그것은 아담 이후 우리 모두에게 예외없이 던져진 선택인 것이다. 지식 나무의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결국 영혼이 죽고 육체도 죽는 것이다. 지식나무를 선택할 때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관계도 나의 옳다는 기준 때문에 파괴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표가 되어 사탄을 대적하고 하나님나라를 세워갈 사람을 찾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분의 생명을 취해야 한다. 생명이신 그분이 우리 안에 사셔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도 종교적인 열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대표가 되지 못했다.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식을 얻고자 성경을 상고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주님께 가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하신다. 요 5:39-4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들은 결국 지식나무를 구한 것이다. 율법에 대한 지식이 커갈수록 그들 자신이 신이 되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사람들을 정죄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영혼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적 열심이나 더 많은 성경지식이 아니다. 생명되신 주님을 더 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요 6:56-5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예수님의 생명을 먹고 누릴 때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며 남을 죽이지 않게 된다. 오히려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으로 남을 살리는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생명나무의 길인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생명의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는 남들이 안 가는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한다. 내가 못박히며 피흘리는 아픔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마저 내가 의지적으로 결단한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은 내가 생명이신 주님을 누릴 때 자연스럽게 가는 길이다. 주님은 영이시므로 우리는 영의 채널이 열려야 주님을 누리게 된다.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영의 양식을 취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 내 마음과 생각 안에 있는 사탄의 거짓말과 지식 나무의 인본주의적인 뿌리들을 들어 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항상 예수님의 생명과 연결되야 한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누려야 우리는 하나님의 대표가 되는 것이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도 선악을 아는 지식나무와 생명나무 그 사이에 서 있다. 아담과 하와에게 들려졌던 사탄의 거짓말은 오늘 우리에게도 들려지고 있다. 그것이 거짓임을 드러내야 한다. 어린 양의 피와 말씀으로 그 거짓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야 한다. 바라기는 생명되신 예수님을 누림으로 이 땅에 생명나무의 길을 더욱 활짝 여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며 나의 옳음을 입증하는 자가 아니라 많은 영혼들을 살리고 세우는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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