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출 1:1-6:1/ 사27:6-28:13, 29:22-23/ 눅 5:12-39
토라포션 12 능력 없는 남자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출 4:10-13)
착하고 성실한 남자를 싫어할 여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착하고 성실한데 남자가 능력이 없다면 여자들은 뒷걸음질 칠 것이다. 요즘 결혼도 능력이 없으면 꿈도 꾸지 못하는 것 같다.
한 때 잘 나갔던 이집트 왕자 모세는 하루 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인의 양을 치며 모세는 스스로 능력 없는 남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오늘 토라포션에서는 참 능력 없어보이는 모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려 한다.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세우시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출 3:5-10,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시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네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고통받고 있는 현실을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출 3: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의 반응은 ‘내가 누구이기에’이다. 자신이 적격자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는 애굽에서 실패한 인생이었다. 히브리 동족을 위해 행동하다가 애굽사람을 죽이고 도망쳐 나온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다시 애굽에 가서 200만이 넘는 히브리백성들을 데리고 나오라는 것은 그로선 견적이 나오지 않는 생각이었다. 당연히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모세가 겸손해서도 아니고, 믿음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모세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제시하신 것이다.
모세의 첫번째 거절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출 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출애굽의 목적을 말씀해주신다. 그것은 이 산,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출애굽은 단지 정치적, 경제적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을 만드는 것이었다. 바로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되는 백성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내산에서 새로운 언약공동체로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부담을 안 느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기드온도 그랬다. 삿 6:16절,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예레미야도 그랬다. 렘 1: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나님의 엄청난 소명 앞에 자신이 너무도 작아보인 것이다.
여러분에게 교회에서 직분을 맡겨줄 때도 나는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주저하거나 거절했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모세도 그랬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평가, 현실에 대한 평가에 묶여 있을 때 나는 ‘못해 신앙’이 되는 것이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일을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내가 못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과거와 현재에 대해 스스로 평가를 내린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내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명을 주실 때 붙들어야 할 정체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인 것이다.
출 3:13절,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거절까지는 아니지만 모세 역시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소개해야할지 막막했다. 바로에게 가기는 커녕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을 누구이신지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이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출 3:14-15,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스스로 있는 자로 번역된 하나님의 이름은 ‘에흐예 아쉘 에흐예’다. 에흐예는 ‘존재한다’, ‘~이다’란 뜻이다. 아쉘은 영어의 who와 같은 관계대명사다. ‘나는 존재하는 존재’란 뜻이다.
루이스 스메데스라는 학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해석한다. “너와 함께 그곳에 있을 하나님이 바로 나다! 이 사실을 믿어라!” “네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그곳에 너와 함께 있을 하나님이 바로 나다!” 임마누엘 우리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된 노동과 학대 속에서 탄식하다가 저절로 찾았던 하나님, 너희의 고통가운데 함께 존재했던 자가 바로 나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현존 속에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여러분의 고통의 현실속에서도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다. 이 사실을 믿는가?
하나님은 모세에게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야웨의 이름을 소개하신다. 야웨는 과거 조상들에게 나타나 언약을 맺으셨던 언약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과거의 언약이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언약을 오늘날 이루실 분이 바로 하나님 여호와라는 것이다. 고통받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새롭게 여실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 하나님은 나와 여러분의 미래도 새롭게 여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모세는 확신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대꾸한다. 출 4: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말로 확신을 얻지 못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세가지 표적을 보이신다. 첫번째는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고 그 뱀을 다시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는 이적이었다. 이집트에서 뱀은 절대왕권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그래서 바로의 왕관에는 머리를 치켜든 코브라가 정면에 장식되어 있다. 양을 치던 모세의 지팡이가 애굽 왕권을 잡을 수 있는 지팡이가 될 수 있음을 확신시켜주는 상징적인 이적이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셨다. 뱀은 머리를 잡아야지 꼬리를 잡으면 물린다. 그런데 믿음으로 말씀을 따랐을 때 기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두번째는 손을 품에 넣었다 꺼내니 나병이 생기고 다시 품에 넣었다 꺼내니 원래 손으로 되돌아오는 표적이었다. 세번째는 나일강 물을 떠다가 땅에 부을 때 피가 되는 기적이었다. 애굽의 생명줄인 나일강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표적이었다.
자 이쯤 되면 ‘정말 하나님 맞군요’ 하면서 ‘분부대로 하겠습니다’라는 모세의 대답이 나올 만하다. 그런데 모세는 또 한 발을 뺀다. 출 4: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모세는 여전히 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바로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말을 잘해야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설득하신다. 출 4:11-1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설득에 ‘그럼 알겠습니다’란 대사가 나올 때가 됐다. 그런데 모세가 말한다. 출 4: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이런 모세를 보고 하나님이 화가 나셨다. 출 4: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 잘하는 아론을 동역자로 세워주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끈질긴 설득 끝에 모세가 움직인다. 장인에게 돌아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출 4:18)’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능력밖의 일을 맡기실 때가 있다.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시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계획하거나 꿈꾸지 않았어도 그 일을 던지실 때가 있다. 하나님은 일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감당할 능력도 주신다. 필요한 사람들도 붙여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 과거와 현재의 내 모습에 멈춰서 있으면 안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는 정체성을 붙들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정체성도 분명히 세워야 한다. 사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한 정체성이 분명히 세워져야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인생의 출애굽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적인 자격을 다 갖추었다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세는 40이었을 때 애굽의 학문과 언어에 능했던 유능한 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 그를 부르시지 않았다.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광야를 아는 자로 훈련될 때까지 그를 기다리셨다.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광야를 걸어보신 분은 알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이 나올만하다는 것이다. 자녀들을 데리고 광야를 걸어도 힘들고 더워 죽겠다고 하는데, 모세는 200만의 불평분자들을 데리고 광야를 통과해야 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인내의 사람으로 훈련된 것이다. 참을 인(忍)자를 보면 칼도(刀) 밑에 마음 심(心)자가 놓여있다. 불평하고 원망할 때 마음이 움직이면 칼에 찔리는 것이다. ‘참아야 하느니라’고 이를 악물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인내이다. 민수기서는 모세를 이렇게 묘사한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는 광야에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리더로 훈련된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일은 세상의 시스템에서 길러진 것과 또 다른 리더십이 요구된다. 어쩌면 모세는 하나님이 하실 출애굽의 역사에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는 40년 동안 애굽을 아는 자로 길러졌고, 또 40년을 광야를 아는 자로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의 기준으로 모자란 것 같아도 하나님이 설득하실 때 설득 당하는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지금 여러분의 미래를 여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제 2016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올해 여러분이 있는 직장과 가정, 학교에서 작은 출애굽의 역사를 경험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여전히 나는 능력이 안된다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못한다는 변명과 이유 대신에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5년 12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