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13 나를 위한 언약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출 6:2-9)
지난 주 샤밧 오후에 교회 하늘 위로 걸린 쌍무지개를 보았다. 이스라엘에 와서 두번째로 본 쌍무지개였다. 무지개가 왜 생기는가? ‘물방울에 의한 굴절현상 때문이다’라고 대답하면 아주 재미없는 대답이다. 무지개는 왜 생기는가? 나 때문에 생긴다. 내가 보고 기쁘라고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홍수심판 이후에 노아에게 약속하셨다.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창 9:13절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무지개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있었다. 노아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화려한 빛깔도 빛깔이지만,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기뻤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확인될 때 우리 삶에는 기쁨이 회복된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약속하시는 하나님만큼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토라포션은 애굽의 노예로 불확실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의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장면이다.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산다. 회사도, 나라도, 세계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러한 세상에서 오늘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출 6:2-3,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라고 자신을 알리신다. 조상들에게는 엘샤다이,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지만,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모세를 만나는 이 장면 이전에도 ‘여호와’라는 호칭은 이미 160번 등장한다. 그들도 분명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야다’는 경험적으로 안다라는 뜻이다. 여자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여자를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모세 이전의 조상들은 언약을 주신 하나님은 알았지만 그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출 6:4-5,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와 네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언약하셨다. 그러나 언약만 있었지 그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아브라함은 경험하지 못한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설명하신 부분이다. 창 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리고 400년이 지난 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을 이제 경험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스스로 계신 자의 존재를 걸고 그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는 여호와’라고 알리시는 이유이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그 언약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그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었다. 아브라함은 창 15:8절에서 하나님께 질문한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이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령한다. 창 15: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그리고 아브라함은 가져온 고기를 쪼개어 놓는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며 언약을 맺는다. 누구든지 언약을 깨면 쪼개진 고기처럼 피흘리며 죽게 된다는 저주를 선언하는 의식이다. 언약이라는 히브리어는 ‘베리트’이다. ‘자르다. 쪼개다’라는 뜻이다. 이처럼 언약은 짐승을 잡아 자르고 쪼개면서 맺는 약속이다. 언약이 깨지면 죽게 됨을 맹세하는 생명을 건 약속이다. 죽을 때까지 보호와 충성을 다짐하는 약속인 것이다.
이처럼 언약은 새끼 손가락 걸고 하는 약속이 아니라 피를 흘리며 맺는 피 언약이다. 모세도 후에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은 후에 피를 뿌리는 언약을 한다. 출 24: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신명기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언약에 따라 계명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약속되어 있었고, 불순종하면 멸망하게 된다는 저주가 있는 언약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쪼갠 고기 사이를 혼자 지나가신다. 창 15: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타는 횃불의 형상으로 하나님께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시는 장면이다. 원래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과 함께 지나가야 하는데, 하나님 혼자 지나가신 것이다. 하나님이 성격이 급하셔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그 언약에 대해 책임지시겠다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이 언약을 다시 한번 확증해주신다. 창 17:7-8,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언약을 맺는 목적이다. 출애굽의 목적과 일치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 출애굽의 역사를 행하시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것을 이제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7개의 동사로 나타난다. 출 6:6-8,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I will bring you out)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I will deliver you)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I will redeem you)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I will take you to be my people)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I will be your God)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I will bring you into the land)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I will give it to you for a possession)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이 하나님의 행동들로 인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출 6: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듣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가혹한 노역으로 마음이 상해있었기 때문이다. 현실문제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삶의 문제들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시는 구원을 기대하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심으로 그 언약을 지키신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서 바알을 섬김으로 그 언약을 배반한다. 언약이 깨어진 것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져야 했다. 물론 그들은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간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깨어진 언약을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 책임을 지신다.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야만 했던 이유다. 언약이 깨어졌기에 쪼개진 짐승처럼 피를 흘려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성만찬을 하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류와 피로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에 언약의 피를 흘리셔야 했다.
히 9:11-12, 15,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피의 언약을 맺으셨다. 그것은 모든 인류를 위한 새 언약이었다. 이 새 언약을 통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나와 여러분을 위한 언약인 것이다.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언약에는 어떤 능력이 있을까? 먼저 과거의 죄로 부터 자유케 되는 능력이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과거로 인한 절망과 좌절을 안고 산다.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알기에 실수했던 우리의 과거를 공략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은 과거 우리의 죽은 행실들까지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 히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과거의 죽은 행실을 깨끗게 하는 것이 보혈의 능력이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된다. 전에 지은 죄가 예수님의 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우리의 마음에 뿌려야 한다. 나의 죄를 사하기 위해 피흘리셨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것으로 우리의 과거를 지울 수 없다. 엡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피로 인해 죄의 노예상태에서 구출된 것이다. 새로운 출애굽의 역사가 예수님의 피를 우리 마음에 뿌릴 때 일어나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언약의 피는 사단을 무력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골 2:14-15,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계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언약의 피의 가치를 내가 인정하고, 내가 그것을 믿음으로 선포할 때 사단은 더이상 나를 참소할 수 없게 된다.
셋째 예수님의 언약의 피는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능력이 있다. 출애굽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문설주 좌우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다. 출 12:13,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어린 양의 피를 발랐을 때 재앙으로부터 보호받았다.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믿음으로 피를 발랐을 때 pass over, 사망권세가 유월하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이다. 또한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은 뒤 언약의 피를 뿌렸다. 이처럼 언약백성이 되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도 보호받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새언약백성이 된 자들을 하나님은 보호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유대 백성들을 향해 당시 총독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말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그러자 백성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쳤다. 유대인들이 지난 역사를 통해 보호받지 못하고 유리, 방황한 것은 이 말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이 말을 철회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언약의 피를 믿고 의지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은혜를 입는 백성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언약의 피 하나님의 지성소로 들어가게 하는 능력이 있다. 히 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성소의 원어적 의미는 지성소를 말한다. 예수님의 언약의 피를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지성소에 이르러 우리는 피 언약의 처음 목적대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됨’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하신 피의 언약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일까? 갈 3:13-16, 29절 말씀이 결론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피의 언약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와 여러분을 위한 것이다.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행동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나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시다. ‘나는 여호와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 하나님의 선언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무지개가 뜰 때마다 ‘너는 나의 것이다. 내가 너를 건지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떠올릴 수 있길 바란다. 생명을 드려 이미 이루신 예수님의 언약의 피는 곧 나와 여러분을 위한 것이다. 우리를 당신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흘리신 것이다. 이 언약의 피를 통해 언약백성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