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 강해 11 신화와 신앙 사이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1월 21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복음서 강해 11 신화와 신앙 사이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마 16:13-20)

 

바라는 것을 이루는 것, 우리는 그것을 ‘성공’이라 한다. 무엇을 바라지 않는 인생이 없기에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성공을 매일 꿈꾼다. 우리 주변엔 사회 각처에서 극적인 성공을 거둔 사례들이 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될 때 그것은 하나의 사례에서 신화로 바뀐다. 성공신화가 이야기 된다는 것은 그 성공이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판타지를 주기 때문이다. 즉, ‘나도 성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환상 때문에 우리는 크고 작은 성공신화에 귀를 기울인다.

예수님 당시 가이사랴 빌립보는 신화로 가득찬 도시였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도시를 그의 제자들만 데리고 방문한다. 예수님은 왜 이 곳을 방문하셨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가이사랴 빌립보에 있는 바니아스 폭포. 상부 요단강의 근원이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헤롯 대왕이 기원 전 20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선물로 받은 도시였다. 헤롯 대왕이 죽은 뒤 그 아들 헤롯 빌립이 이곳을 자신의 수도로 정한다. 그는 로마의 황제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더해서 ‘가이사랴 빌립보’라 칭한다. 당시 아무 도시나 로마황제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이름에 걸맞는 도시의 위용을 갖추어야 했다. 이 지역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기념하는 신전이 헤롯대왕 때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로마제국을 통일하고 팍스로마나의 시대를 연 그의 이야기는 신화가 되었고 그는 신으로 추앙받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 신전을 드나들며 그의 힘으로 만든 평화와 번영에 머리를 숙이게 되었을 것이다.

황제 신전 바로 뒤로는 판신의 동굴과 조금 떨어진 곳에 판신전이 있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기원전 3세기 이후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자신들의 지역신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으로 정했다. 판은 위로 사람이고 아래는 염소모양이었다. 그는 술과 성(Sex)를 밝힌 신화 속의 인물이다. 그는 숲과 풀밭에서 가축을 기르며 살았는데, 주체할 수 없이 넘쳐 나는 성적 욕구로 인해 항상 님프요정이나 미소년들을 쫓아 다녔다고 한다. 판의 갑작스런 출현 때문에 놀라 도망가는 상황에서 생긴 말이 패닉(panic)이라고 한다. 판에 대한 신화는 풍요와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던 당시 사람들의 욕망을 대변해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판을 동경하여 판신전을 짓고, 이 지역을 ‘판을 위한 도시’라는 뜻으로 ‘파니아스’라고 불렀다.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또한 네메시스의 정원이 있었다. 네메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복수의 여신이다. 아무 복수가 아니라 정의로운 복수를 관장하는 신이었다. 로마인들에 의해서 수입된 그리스 신들 가운데 네메시스는 가장 쓸모가 많았다고 한다. 전쟁에 나가기 전 로마인들은 네메시스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녀가 자신들의 보호자임을 선언했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침략행위가 정당하고 정의로운 것임을 자신들 스스로와 세상 사람들에게 확신시킨 것이다. 이처럼 가이사랴 빌립보는 정복자 로마사람들이 심고자했던 지배자의 가치가 신화로 포장되어 전해지고 있던 곳이다.

예수님은 이곳에 이르러 그의 제자들에게 질문한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한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님은 이어 질문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 중 항상 반응속도가 빨랐던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 히브리어로 ‘메시아’다. 메시아는 유대인들의 오랜 기다림이었다. 유대 민족의 모든 바램을 이루어주실 분이었다. 그분은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내시리라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시편은 이렇게 노래했다. 시2: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신화로 가득 찬 도시, 가이사랴빌립보에서 울려퍼진 이 베드로의 고백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바램을 이루어줄 자는 세계를 정복한 로마황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풍요와 쾌락의 신 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헬라 세계의 최고신 제우스도, 정의로운 복수를 담당하는 네메시스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이 나의 주요, 우리가 바라는 메시아라는 고백인 것이다.

예수님은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를 칭찬하신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결국 베드로의 눈을 뜨게 한 것은 하나님이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았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유대 민족이 기다려온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이 고백이 있기까지 3년이라는 공생애의 시간이 걸렸다. 이것은 예수님 공생애의 마지막 단계로 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예수님은 베드로게 말씀하신다. 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점으로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선언하신다.

여기서 ‘교회’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다. 교회를 세운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교회를 건물로 이해하기 쉽다. 그렇다면 교회가 뭘까?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다. 전치사 ‘에크’와 동사 ‘칼레오’가 결합된 말이다. ‘~로 부터 부르다’란 뜻이다. 즉,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이다. 그런데 에클레시아는 히브리어 ‘카할’을 번역한 단어다. 구약성경에서 ‘카할’은 ‘회중’으로 번역된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뜻한다. 즉 카할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고 부르셔서 그들과 언약을 맺은 언약 공동체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에클레시아는 이제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부르셔서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신 새로운 언약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교회라는 공동체가 시작되고 세워지게 된 것이다.

지난 연말부터 교회 건물 때문에 고민이 많다. 두달 째 비가 샌다. 지붕을 뜯고 레미콘으로 콘크리트를 쏟아부었는데도 소용이 없다. 높은 렌트비 때문에 교회건물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이제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임박했다는 느낌도 든다. 교회 건물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말씀을 준비하며 드는 확신은 교회는 건물보다도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어떠한 성공신화와 상관없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했던 고백은 인간적인 권면이나 지식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를 불러주셨고 은혜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고백이었다. 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한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신다. 19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여기서 ‘맨다’라는 것은 ‘아수르,’ 금지한다는 것이고, ‘푼다’는 것은 ‘무타르,’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토라를 해석하면서 유대 랍비들이 갖고 있었던 권세였다. 당시 샴마이 학파는 토라의 금지사항을 엄격하게 적용하며 매는 역할을 했다. 반면 힐렐 학파는 토라를 좀더 유동적으로 적용하며 푸는 역할을 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법을 이 땅에 적용하고 실행하는 영적인 주체가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목사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매고 푸는 영적인 주체가 되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열쇠를 교회에게 주셨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공동체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신 것이다. 여기서 열쇠에 대한 배경은 이사야서 22장 22절에서 볼 수 있다. 사 22: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이것은 남유다 왕국의 관원 엘리야김에 대한 에언의 말씀이다. 원래 다윗의 집인 남유다의 국고 열쇠를 맡은 자는 셉나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직위를 남용하고 타락하자 하나님은 그를 관직에서 쫒겨나게 하신다. 그리고 엘리야김을 최고서기관이 되게 하신다. 그리하여 엘리야김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남유다 국고를 관리하게 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 13: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는 천국의 서기관으로서의 부르심이 있다는 것이다.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적절히 내오는 주인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약과 신약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능숙히 알고 그것을 적재적소에 맞게 꺼내올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영혼들은 우리가 꺼내어 놓는 것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이 천국에 가는 열쇠를 교회인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이다. 나는 교회인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적절히 꺼내올 줄 아는 천국 서기관 되기를 축원한다.

자신의 고백을 통해 교회시대를 열게된 베드로 사도는 신약의 성도들에게 말한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로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교회는 다시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한 것이다.

교회인 우리는 세상과 담 쌓은 수도원이 되어선 안 된다. 세상은 지금 성공과 번영과 행복을 약속하는 온갖 신화로 가득하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줄 것 같은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고자 목을 매달며 산다. 이러한 세속사회에서 교회마저 건물 크기로 사역의 성공여부를 평가하는 성공신화에 빠져있다. 많은 신화 속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나의 신앙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는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신화는 시대의 옷을 갈아입으며 계속 창조될 것이다. 그러나 신화는 결국 영혼을 망하게 하는 우상이다. 여러분이 신화에 마음 빼앗기지 않는 신앙인이 되길 바란다. 권력과 우상을 찾고 섬기는 시대에서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추는 자가 복이 있는 자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시간 속에서 완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바라기는 신화에 마음 빼앗기는 시대에 오직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담대히 고백하는 우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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