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14 완악함에 맞서기

이번 주 토라포션: 출 10:1-13:16/ 렘 46:13-28/ 막 3:7-19

토라포션 14 완악함에 맞서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3]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출 10:1-3)

 

영화 내부자들이 850만을 넘어섰다. 청소년 관람불가임을 고려할 때 엄청난 수가 본 것이다. 일개 검사와 깡패가 힘을 합쳐 재벌, 언론, 정치 권력의 실체를 발가벗겨 놓는, 그야말로 영화다. 작년 한 해 한국은 이런 류의 판타지 영화에 열광했다. 영화 베테랑에서도 일개 형사가 재벌 3세의 오만함을 응징하는 장면이 있었다. 영화 암살에서는 어여쁜 전지현이 친일파 염석진을 처단하는 장면이 있었다.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오만한 자에 대한 응징을 영화에서는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영화가 주는 판타지를 통해 잠시 동안이나마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힘을 가진 자가 갑질하고, 청년들은 포기를 선택하는 소위 헬조선 시대에서 잠시나마 누릴 수 있는 쾌감이었다.

문제는 현실이 영화처럼 끝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은 어떻게 현실에 맞설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함이었다. 재벌, 언론, 종교, 정치 권력이 움켜쥐고 있는 절대반지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20대 30대 청년들에게서 어떻게 7포 세대, 잉여인간이라는 자화상을 거둬낼 수 있을까? 잘 놀아야 하는 초등학생들에게서 어떻게 선행학습이라는 열풍을 잠재울 수 있을까? 현실이 각박하다 보니 사람들은 ‘응답하라’류의 풋풋했던 옛시절이 주는 정서에 빠져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 우리는 출애굽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애굽이라는 현실에서 200만이 넘는 한 민족이 빠져나오는데는 엄청난 힘의 전환이 필요했다. 당대의 최고의 제국과 제국의 권력자 바로가 버티고 서있었다. 그러나 출애굽은 이 막강한 권력을 무너뜨리고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나님께서는 완강한 바로에게 열가지 재앙을 쏟아 부으신다. 목적은 한가지다. 그것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행했던 하나님의 표징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재앙으로 두들겨 맞으면서도 히브리민족을 노예로 거느리고 있던 바로는 쉽사리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 놓지 않는다. 정치가답게 그는 타협안을 내어 놓는다. 타협안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내어 놓는 미끼다. 영화나 현실에서도 우리는 현실 권력에 타협한 사람들이 한 자리 차지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네 번째 파리 재앙 이후 바로는 모세를 부른다. 그리고 타협안을 제시한다. 출 8: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너희의 원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되 이 땅 애굽에서 드리라고 회유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허락하는 관대한 제안같지만 결국 너희는 이 땅에서 나의 종으로 살면서 여전히 나를 섬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는 것이다. 모세는 그 제안을 거절한다.

출 8:26-27,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모세는 바로의 달콤한 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대로 행할 것을 선택한다. 그러자 바로는 바로 타협안을 제시한다. 출 8: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적당히 믿으라는 것이다. 세상과 너무 멀리 떨어진 신앙인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사단이 신자를 회유하는 내용과 같다.

그러나 바로는 마음을 완강히 하여 백성을 내보내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에 세 차례의 재앙을 내리신다. 애굽의 가축들이 죽고, 악성 종기가 나고, 애굽 전역에 우박이 내리게 한다. 이후 모세와 아론이 다시 바로를 찾아간다. 출 10:3,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그리고 백성을 보내지 않으면 메두기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어서 모세는 ‘우리가 남녀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바로는 또 타협안을 제시한다. 출 10:11,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돌아오도록 자녀들을 붙잡아 놓으려는 제안이었다. 우리는 사사시대 신앙이 자녀들에게 전수되지 않아 영적으로 암흑기를 보낸 것을 알고 있다.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은 자녀들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자녀들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좀 힘들더라도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현장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의 완강함에 하나님은 메뚜기 재앙과 흑암 재앙으로 바로를 치신다. 그러자 바로가 다시 모세를 부른다. 출 10:24,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바로가 참 화끈하지 않다. 양과 소는 머물러 두라고 한다. 이에 모세가 응답한다. 출 10:25-26, 모세가 이르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제사와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26]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 하나님을 섬기는데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타협안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바로는 화를 낸다. 모세에게 내 얼굴을 다시 보는 날에는 죽을 것이라고 위협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제 마지막 재앙, 장자를 치는 재앙만 남았음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전하게 하신다. 출 11: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하나님은 이제 분명히 이스라엘이 애굽과 구별되길 원하셨다.

바로의 키워드가 애굽과 구별되지 않는 ‘타협’이었다면, 하나님의 키워드는 ‘구별됨’이었다. 바로의 완악함에 맞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에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구별되는 방향으로 가야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두가지 상징적인 행동을 요구하셨다.

첫번째는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것이다. 출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어린 양의 피가 있는 집과 있지 않는 집이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다른 것이 기준이 아니었다. 얼마나 착하게 살았느냐가 기준이 아니다. 얼마나 지위가 높은가가 기준이 아니다. 어린 양의 희생의 피가 있는가 없는가가 기준이었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르기까지는 어린 양의 죽음을 통해 내게 임할 사망 권세가 넘어가게 됨을 믿는 믿음이 요구되었다. 이것은 장차 모든 인류의 대속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한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처음 보고 이렇게 말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죽음이라는 권세 앞에 눌리지 않을 인생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싸울 때 제일 많이 하는 대사가 ‘너 죽을래?’이다. 세상 권력자들도 너 죽지 않으려면 내 말들으라고 위협한다. 바로의 권세를 꺾고 출애굽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죽고 사는 권세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그런데 천하의 바로도 애굽 장자들의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사망권세가 비껴감을 사람들은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죽고 사는 권세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분명히 보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이상 바로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역시 더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으로 위협하며 붙잡아 둘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항복한다. 출 12:31-32,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32]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로 죽음이 건너간 이 날을 유월절로 지키게 하셨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셔서 유월절 양 잡는 시각에 죽으셨다. 그리고 이 어린 양의 피를 믿는 자를 살게 하셨다. 죽고 사는 권세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고후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죽음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IS나 세상 권력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유월절을 한 해의 첫달이 되게 하라고 하셨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애굽에서 나온 이 날을 새로운 출발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두번 째로 하나님이 요구하신 행동은 무교병을 먹고 누룩을 제하라는 것이었다. 무교병을 먹거나 누룩이 발견되면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강하게 말씀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것은 철저히 애굽과의 단절을 원하셨기 때문이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애굽에서 나왔어도 그들에게는 애굽에 대한 향수가 있었다. 출애굽하여 조금만 어려워져도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다. 출 16:2-3,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누룩을 넣은 빵을 배불리 먹던 때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노예로 살지언정 먹을 것이 풍부했던 그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애굽을 그리워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철저히 버려야 할 누룩이었다. 믿음의 여정을 떠난 뒤 광야를 지날 때 과거 안락했던 삶을 동경하게 된다. 이런 누룩이 백성들의 생각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무교절마다 누룩을 내어 버리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누룩은 세상에서의 죄와 악을 상징한다. 누룩이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면 반죽을 변질시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제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태어나야 했다. 그들의 삶을 변질시켰던 애굽에서의 죄와 악을 제거해야 했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음행이라는 세상의 누룩을 제거하라고 말했다. 고전 5:6-8,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었다면 이제 그 정체성을 변질시키는 세상에 대한 향수나 과거의 관행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출애굽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바로의 완악함에 어떻게 맞설 수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의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애굽과의 협상이 아니라 구별됨의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권력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녀들에게 타협안을 제시한다. ‘왜 너만 유난을 떠냐, 적당히 믿어라.’ 오직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주장하는 기독교는 종교간 대화와 관용을 주장하는 지금 세상에서 더욱 불편한 진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섞인 종교는 능력이 없다. 오직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만이 사람들을 자유케 한다. 출애굽을 능하게 한다. 예수의 복음이 들어간 곳 마다 남녀차별이 없어지고, 노예 해방이 일어났다. 죄와 악이 사라지고 정의가 살아났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더이상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려 하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어린 양 예수의 피를 발랐지만 누룩을 제거하지 않았던 교회를 통해 복음이 변질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헬조선이라는 한국의 현실에서 출애굽할 수 있을까? 선거에서 지금 정권을 심판하면 될까? 부정에 연루된 사람들을 갈아 치우면 될까? 믿는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로 먼저 구별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세상 권력과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출애굽이 가능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러나 그들이 무너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가 존재해야 한다.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공동체 없다면 세상은 그 완악함을 거둘 이유가 없다. 바라기는 판타지를 주사를 맞으며 현실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는 구별된 하나님나라를 묵묵히 만들어 가는 이 땅의 백성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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