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출 13:17-17:16 / 삿 4:4-5:31/ 마 5:1-48
토라포션 15 ‘더’를 내려 놓는 연습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 16:1-4)
‘행복 찾아 삼만리’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취업이 어려운 청년들이 해외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서 한 대학생은 대학을 그만 두고 용접기술을 배운다. 캐나다에 용접사로 나가기 위해서다. 한 치과기공사는 한국에 있을 때는 밤 11시에 퇴근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캐나다로 와서는 더 많은 보수에 5시면 칼퇴근, 그래서 저녁이 있는 삶을 산다고 했다. 어제 뉴스에 정부가 회사에서 성과가 떨어지는 사람들을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취업규칙을 바꾸었다고 한다. 아마 더 많은 청년들이 해외로 나갈 것 같다.
소수의 가진 사람들이 안전하고 다수의 대중들이 불안을 느낀다면 그 사회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다. 일 하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단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이라며 그러한 사회 역시 디스토피아다. 여러분은 유토피아를 살고 있는가, 디스토피아를 살고 있는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토라포션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들의 환호 뒤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광야라는 척박한 현실이었다. 유토피아를 기대했건만 또 다른 형태의 디스토피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왜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에게 유토피아를 선물하지 않으시고 광야를 허락하신 걸까? 함께 살펴보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출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출애굽을 첫째달 십오일에 했으니까 딱 한 달이 되는 때였다. 출애굽의 환희를 노래했던 그들의 입에서 이제 원망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한 달만에 먹을 것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목마른 광야에서 민족이 다 굶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출 16:2-3,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애굽에서 자기 집의 문기둥에 양의 피를 바를 때만 해도 그들에겐 믿음이 있었다. 홍해를 건널 때만해도 그들에겐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광야 생활 한달만에 바닥이 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끄실 미래를 믿음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과거 애굽 시절을 동경하기 시작한다.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를 그리워한 것이다. 그들은 과거를 미화하고 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면서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던 때를 잊은 것이다. 그 노예생활에서 꺼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당장 현실에서 부딪히는 배고픔에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어떻게 좀 해보라고 난리치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출 16: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제 막 구원의 걸음마를 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아셨다. 그래서 야단치시기 보다는 친절하게 광야에서 밥상을 차려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래서 주신 양식이 무언가? ‘만나’다. 출 16: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하나님이 이 만나를 주신 목적이 있다.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원어의 뜻은 ‘너희가 나의 토라 안에서 걸어가는지 아니하는지 시험해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회중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단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배고픈 회중들, 쉽게 원망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원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 그리고 장차 그들이 사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열방에 전하는 민족으로 세우기 원하셨던 것이다.
자 이제 광야학교 1학년 1학기가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치기 원하셨을까? 첫번째, 광야에서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출 16: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광야는 양식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먹이셨다. 그러면서 그들의 원망이 기대로 바꾸어지길 원하셨다. 디스토피아 사회를 살수록 원망이 커진다. 그것은 다름 아닌 리더들을 향한 원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생겨난 불신앙적인 태도였다. 당시 모세는 욕을 많이 먹었다. 광야 생활 내내 욕을 먹었다. 그런데 그가 한마디 한다. 출 16:8, “…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그러나 광야에서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원망은 하나님에 대한 기대로 바뀌게 된다.
두번째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무엇을 가르치기 원하셨을까? 그것은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삶의 패턴이다. 출 16:16-18,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하나님께서는 매일 각 사람의 수효대로 만나를 거두게 하셨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매일 매일 의지하고 기대하게 하셨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 완전한 양식의 배분, 부의 배분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마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라는 공동체가 공평히 먹고 사는 사회를 만들라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는 모두가 먹고 마실 자원이 있다. 그런데 세상은 점점 부자들이 독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는 삶은 더 많은 것을 쌓아 놓고 독식하려는 삶으로 가게 되어 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일용할 양식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더 쌓고 쌓아도 부족한 삶, 그래서 쉼없는 삶을 산다. 세상이 그렇게 살기 때문에 점점 더 저녁이 없는 삶을 모두가 살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유산 싸움을 하는 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눅 12:15-21, “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점점 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하고 재물에 대해 집착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 소유가 많은 재벌들이 유산싸움을 하거나, 조강지처를 버리고 내연녀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세번째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안식일이 지켜지는 공동체를 만들기 원하셨다. 출 16:22-23, 27,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7]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 안식일 훈련을 받았다. 일곱째날 쉬지 않고 일해도 허탕치는 것이었다. 대신 하나님은 여섯째 날에 두배의 만나를 거두게 하셨다. 흔히 유대인 공동체가 건강하고 창의력이 뛰어난 이유가 이들이 샤밧을 지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9세기에 아하드 하암이란 사람도 “이스라엘이 샤밧을 지켯다기 보다도 샤밧이 이스라엘을 지켰다”고 말했다. 샤밧은 원어적으로 ‘쉬다. 중지하다’라는 뜻이 있다. 모든 사람이 일을 멈추고 가정에 모여 쉬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즐기는 날인 것이다.
샤밧은 하나님이 쉬신 날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을 때 비로소 만족하셨고, 그 후에야 안식하셨다. 인간이 불순종하여 낙원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은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 안식일을 지키게 함으로 노동을 하지 않고 낙원과 같은 쉼을 회복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에 쉬지 않고 일해야 경쟁에서 살아 남는게 아니다. 잘 쉬면서 창조주가 누리라고 하신 생명력을 회복하는 게 남는 장사인 것이다.
네번째 하나님이 만나를 통해 가르치기 원하신 것은 빵의 문제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소비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더 많이 벌어서 더 좋은 물건을 소비하는게 목표가 되는 사회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점점 소비적 자아가 된다. 그런데 소비적 자아는 탐욕의 자아다. 끊임없이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달려가는 자아다. 한병철 씨는 지금의 우리 사회가 피로사회이며 자기가 자기를 착취하는 사회라고 진단한다. 예나 지금이나 풍요를 약속하는 바알신앙, 맘몬신앙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돈에 떠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로 살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마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먹는 것, 입는 것이 단순화된 삶이 되야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은 세상에서 뒤처지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이 더하시도록 공급해 주시는 삶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만나를 통해 가르치기 원하신 것은 생명의 떡인 예수를 선택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요 6:48-5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생명의 떡이다. 많이 받은 자나, 적게 받은 자나 모두가 모자라지 않게 그리스도의 실재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해 보여주시기 원하셨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날마다 의지할 때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자 그런데 만나가 맛있었을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게 되면 질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에 만족하지 못했다. 만나 말고 ‘다른 거’를 원했다. 민 11:4-6,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광야에서 애굽의 음식을 그리워할 수 있어도 먹을 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떠나온 백성들이 이제 하늘 양식에 길들여지길 원하셨다.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만나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여정을 떠난 뒤 옛생활이 그리워질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화려하지도 않고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 예수님 한분으로 만족하는 삶이 되야 한다. 남들보다 덜 먹고 덜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더’를 내려 놓는 삶을 선택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붙들 수 있는 것이다.
취업 문제, 실업 문제, 퇴직 문제…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한 세상에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소식들이 많아지고 있다. 지난 주에는 답답한 마음에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어보았다. 부자들의 독점이 없고 빈부의 차이가 없는 세상, 그것이 공산주의가 꿈꾸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좋지만 공산주의는 실패했다. 그 이상을 실현할 만큼 인간이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없이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것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반이 되지 않는 자본주의 역시 진정한 유토피아를 만들 수 없다. 과학과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유토피아는 오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낙원을 상실한 것이다. 그래서 낙원을 회복하기 위해선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낙원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약속하신다. 계 2: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예수로 만족하고 예수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은 에덴에서 잃어버렸던 생명나무의 열매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이 땅에서도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나라,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을 누리는 작은 천국을 만들어 낼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붙잡아야 한다. 이기심과 탐욕으로 부를 얻은 사람이 롤모델이되는 사회, 부가 독식되고 힘 있는 자가 대우받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초등학생들도 자기가 사는 아파트 평수에 따라 등급을 매긴다고 한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지금 세계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정규직이 계약직으로 바뀌고, 명예퇴직이 앞당겨지고, 빈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는, 그래서 일할 맛나지 않는 사회가 되고 있다. 세상은 점점 더 부유해지지만 그 부유함을 누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이 되고 있다.
교회도 세상을 닮아가고 있다. 대형마트가 들어와서 동네 가게가 문을 닫는 것처럼 돈이 있고 규모가 있는 교회에 사람들이 몰린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걸아간 좁은 길을 가기보단 나의 풍요와 성공을 지지해주는 메세지에 환호한다. 만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더’를 바라보는 세상에서 ‘더’를 내려 놓고 예수를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만족하며 안식을 누리라는 것이다. 그 연습을 날마다 하라는 것이다. 6일은 열심히 노동을 하지만 주일은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라는 것이다. 광야에서 만나를 통해 시험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예수 안에서 그 길을 걸어가는지 아닌지 지켜보실 것이다. 디스토피아같은 현실을 살면서 그 현실을 원망하는 게 우리의 부르심이 아니다. 광야에서도 만나로 자족하며 기쁨으로 그 길을 걷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작더라도, 좀 덜 누리더라도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1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