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출 30:11-34:35/ 겔 36:16-38/ 마 9:35-11:1
토라포션 20 진 밖으로 나아갈 때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 33:7-11)
오늘 말씀은 누구에게 설교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주신 말씀인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나 자신에게 설교 하겠다.
이스라엘에 처음 왔을 때 엔게디에 올라간 적이 있다. 그 때가 7월 말이었다. 한 여름 땡볕에서 유대광야가 주는 뜨거운 맛을 보았다. 그 해 가을 초막절을 즈음해서는 남선교회 집사님들과 함께 네게브 광야를 갔다. 텐트에서 하루밤을 잤는데, 광야의 밤공기가 생각보다 차가웠다. 아마 겨울이었으면 광야에서 야영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않았다면 그 길었던 광야 40년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었었다.
출애굽을 하여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 밑에서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을 저지른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것에 의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나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래서 나온 레위 자손을 통해 삼천 명 가량을 죽이는 심판을 하셨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 사건이 끝나지 않았다. 출 33:2-3,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에 이르게는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더이상 동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빼신 백성인데, 하나님께서 빠지시겠다고 하니 이것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최대 위기였다. 이 위기 상황에서 당시 지도자였던 모세는 어떻게 했을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의 동행 거부 선언에 백성들이 충격에 빠졌다. 출 33:4,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우상을 만들어 낸 건 그들에게 애굽에서 가져온 장식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 3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이 말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의 몸에서 장식품을 떼어 낸다.
출 33: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진 안에서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진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민족 공동체의 위기 앞에서 모세의 선택은 진 안에 있는 백성들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었다. 진 밖에 계신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었다. 진 안에서 벌어진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한 것이다.
죄와 거룩은 공존할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백성의 진 중에 거하실 수 없었다. 그래서 모세는 진과 멀리 떠난 곳에 회막을 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갈 수 있게 했다. 그는 함께 기도할 사람을 모으기 위해 광고하거나 사람들을 그렇게 하라고 독려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먼저 회막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나아간다. 그런 모세를 바라보며 백성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출 33:8-10,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한 사람의 예배자가 중요한 것이다.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증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2백만이 넘는 백성들 중에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간 백성이 몇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수는 중요하지 않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모든 백성들이 회막 문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도 자신들의 장막에서 일어나 예배하는 일이 시작될 수 있었다.
모세는 회막에서 하나님께 세가지 요청을 한다. 먼저 주의 길을 보이시고 이 족속을 다시 주의 백성으로 여겨달라는 요청이다. 출 33: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모세는 금송아지 사건이 벌어진 직후에 하나님께 나아가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간청했던 적이 있다. 출 32:31-32,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자신의 운명을 걸고 백성들을 위해 중보한 것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 대답하신다. 그런데 이 말을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나의 임재가 너와 함께 갈 것이다’이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백성 전체가 아니라 모세라는 한 사람에게 약속하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두번 째 요청을 한다. 출 33:15-16,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모세는 하나님의 동행이 자신 만이 아니라 백성들까지 포함되야 할 것을 끈질기게 청원하고 있다. 모세가 구한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가나안은 그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과 같은 축복을 보장받기 원한다. 그리고 그들의 바램대로 가나안과 같은 축복을 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축복 속에서 언제부터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셨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가나안을 향한 여정 속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동행이다. 모세는 가나안에 못 갈지언정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동행해주시기를 다시금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세번 째 모세는 회막에서 주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구한다. 이 요청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신다. 출 33: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영광을 보여주시며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주신다.
이처럼 회막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다시 만나주시는 장소였다. 하나님이 죄인들이 요청하는 기도에 기꺼이 설득당해주시는 장소였다. 모세는 자신의 리더십과 기적을 행하는 은사로 사역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사역한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회막에 있다. 회막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다. 그래서 회막은 이 후 성막과 함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구심점이 된다.
그 예가 민수기서에서도 나온다. 민 11:16-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17]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이들이 회막으로 나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구름가운데 강림하시고 이들에게 영이 임해서 예언하는 일이 벌어진다.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던 회막을 통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리더십들이 세워진 것이다.
또 다른 예가 있다. 민수기서에서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했을 때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장면이 있다. 그 때 하나님은 회막으로 이 세 사람을 부른다.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를 세워주신다. 민 12:7-8,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이 일로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일주일 동안 진영 밖에 머물다 돌아오는 장면이 있다. 결국 회막을 가까이 했던 모세의 리더십은 이 회막에서부터 시작되고, 회막에서 보호받는다.
이 회막의 영성은 여호수아에게도 이어진다. 출 33: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 중에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이 필요했음을 알았다. 그는 젊었기 때문에 장로의 직분이 있던 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로 회막에 남았다. 하나님은 청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린 여호수아를 눈여겨 보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다음 세대 리더로 준비시키셨다. 그가 몇 년 동안 회막을 중심으로 준비되었을까? 모세가 80세에 출애굽을 해서 120세에 죽었으니까 40년 동안이다.
신 31:14-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죽을 기한이 가까웠으니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회막에 서니 [1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 위에 머물러 있더라” 신 34: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하나님은 스펙이 좋은 청년을 후계자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훈련이 된 자를 다음 세대 리더로 세우신 것이다.
회막은 영어로 the tent of meeting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가 있는가? 진 안의 현실을 볼 때 답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 때 진 밖 회막으로 가서 하나님께 질문하고 요청해야 한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의 능력으로 풀 수 없는 위기가 닥쳐올 때가 있다. 여러분의 인격과 말발과 짠밥과 경력으로 풀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고 하나님을 놓쳤기 때문에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회막으로 들어가야 한다. 진중에서 문제를 풀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진밖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시 하나님 만을 구해야 한다. 가나안과 같은 축복과 성공이 보장되어 있다할지라도, 그것을 거부하고서라도 다시 하나님의 함께 하심, 하나님의 동행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한 사람의 예배자,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인 사람을 통해 시작된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에 설 수 있는 것도 그 교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부담을 안고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삶에 기도의 장막,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인 회막이 회복되길 바란다. 회막에서 다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이 정조준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며 이 광야와 같은 삶에 우리와 함께 움직이시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란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나와 여러분을 통해 위기의 돌파가 일어나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2월 27일 이익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