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3월 11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복음서 강해 16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 12:27-32)
지금 이스라엘에는 붉은색 아네모네 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백합화가 이 꽃일 가능성이 높다. 붉은 자주색 옷은 고대 왕들이 입는 옷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솔로몬이 모든 영광으로 입었던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백합화가 실로 만들거나 옷을 짜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히신 것이라고 하셨다. 꽃들도,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를 입히시지 않겠는가라고 제자들에게 반문하신 것이다.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열 두 명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내일에 대한 희망을 오직 예수님께 걸었다. 그리고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계속 배워가는 중이었다.
누가복음 12장 1절을보면 무리 수만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무리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청원한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13절) 그는 유산 상속 문제로 싸움이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눅 12:14-15,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재산 문제에 대한 판결보다는 그 사람 안에 있는 탐심에 대한 부분을 다루기 원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돈이 많다고 해서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력 있는 삶을 살려면 탐심을 물리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하셨다. 그 부자는 밭에 소출이 풍성했다. ‘야, 수확이 많아 곡식 쌓아둘 곳이 없네.. 더 큰 곳간을 짓고 곡식을 쌓아 두어야겠구나.’ 그는 그의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한다. ‘자 이제 여러 해 쓸 것을 많이 쌓았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 이 부자의 생각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을 들어보자. 눅 12:20-21,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재물을 모으는 것에 대해 잘못되었다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자신을 위해서만 재물을 쌓고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허무한 삶인지 무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만을 상대로 말씀하신다. 눅 12:22-23,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새와 꽃을 예로 드셨다. ‘까마귀를 봐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르신다.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백합화를 봐라 그 입은 것이 실도 만들거나 짠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름답게 입히신 것이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예수님은 왜 자신을 3년이나 따라다닌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불렀을까? 그들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들 마음 속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세상 염려가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눅 12:29-30,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제자들의 삶은 이 땅에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로 낭비되어선 안 되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데 집중된 삶이 되길 원하셨다.
눅 12:31-32,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열 두 명의 제자들은 세상 백성들이 사는 방식에서 돌아 선 ‘적은 무리’였다. 다수가 가지 않는 길을 갈 때는 두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들이 소유를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존재로 살아가길 원하셨다.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먹고 입는 것들은 더해주신다고 말씀하셨다.
눅 12:33-34,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땅에 쌓아두는 삶이 아니라, 있는 소유를 나누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삶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염려와 근심이 없을 수 없다. 그들 역시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염려가 있었다. 예수님은 내일을 염려하는 제자들의 시선을 돌려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꽃을 보게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너무도 확실한 실물교육이었다. 이후 그들은 자신들이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염려 대신에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나누며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결국 이 적은 무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확장되었다. 이 제자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주님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며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지금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가? 염려의 뿌리를 잘 살펴보면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어디에 사는가에 대한 문제다. 이것은 결국 돈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소비사회는 우리를 계속해서 염려하도록 몰아부친다. 좀 더 행복한 삶을 살려면 돈이 더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좋은 것을 가졌는데 어느새 더 좋은 것이 쏟아져 나온다. 아무리 가져도 불만족을 만들어 내는 사회인 것이다. 그동안도 열심히 살았는데 주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보면 내 자신이 만족스럽지 않다. 그 수준을 누리기 위해서는 다시 돈 버는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힘든 삶이 반복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너무도 정확히 이 세상을 진단하셨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오늘날 TV 프로그램과 광고를 봐도 먹는 것, 입는 것에 대한 것으로 가득하다. 그 소비를 따라가려면 돈이 필요하다. 아무리 벌어도 돈이 모자르게 된다. 이 세상은 구조적으로 염려를 안 할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재물은 원어로 ‘맘몬’이다. 우리 마음을 하나님이 주관하지 않으시면 맘몬이 콘트롤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돈을 버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돈을 버는 것은 우리의 삶을 위한 정당한 수단이다. 그러나 돈을 버는 행위가 삶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으로 바뀌어버린 것에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돈과 맘몬이 신처럼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경쟁이 절대화된다. 경쟁에서 살아 남은 자가 안정적으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경쟁의 현장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대다수의 사람은 가지지 못한 자가 된다. 가지지 못한 자들은 기를 필 수 없는 세상이 된다. 점점 인간의 존엄성은 사라지고 ‘우리’라는 공동체는 약화되고 만다. 이런 사회에서 돈이 없는 사람은 내일 일을 염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먼저 삶의 목적이 되버린 돈의 가치를 다시 삶의 수단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돈은 쓰라고 있는 것이지 섬기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눅 12:23절)고 말씀하셨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느냐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달라져서는 안된다. 음식과 옷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목적과 수단이 바뀌기 때문에 염려의 종이 되는 것이다. 돈을 좀 내려다 볼 수 있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돈에 근거해서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스스로도 위축되지 않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염려에서 벗어나려면 또한 삶의 우선순위가 바로 세워져야 한다. 자신의 소유를 위해 재물을 쌓아 놓는 삶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삶의 우선순위로 분명히 세워져야 한다. 큰 집 마련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야 한다. 돈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다. 하나님이다. 그래서 물질을 사용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우리는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된다. 사탄은 하나님나라를 위해 돈이 사용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사탄은 세상의 권력자들을 통해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돈이 소비되는 세상을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 흐름을 따라가선 안 된다. 반대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데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세워지면 우리 삶이 단순해진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삶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히려 하나님이 알아서 채워주시는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 기쁨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한다
소비사회에서 염려의 고리를 끊으려면 우리는 나누는 자가 되야 한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나의 만족만을 위해 소비하려할 때 우리는 평생을 다해도 그 불만족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으로 남의 필요를 돕기 위해 나눌 때 우리 삶은 부요해진다. 그것은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잠 19:17절은 말한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이 땅에서 소유를 쌓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놓는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끝으로 우리가 이 세상의 염려에서 벗어나려면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꽃을 봐야 한다. 그것들을 기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주목해야 한다. 현대인들이 맘몬의 굴레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맘몬보더 더 크고 아름다운 존재를 실제 삶에서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이 이런 시를 썼다.
이 땅에는 천국이 가득하고
모든 떨기나무는 하나님으로 불붙어 있다
그러나 보는 자만이 신을 벗는다
다른 이들은 둘러앉아 야생 열매만 딴다
우리의 삶이 야생열매만을 따기 위해 분주한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은 두 손에 야생열매가 가득한 사람을 부러워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땅에서 진정한 부자는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이다. 세상의 흐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함에 이끌림 받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분이시다. 공중의 새를 기르시는 하나님, 붉은 들꽃을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확신하며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돈이 위세를 떨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염려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 그것은 가장 시급한 영적전쟁이다. 이 세상에 흐름에 압도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