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출 35:1-40:38/ 겔 45:16-46:18/ 마 6:14-29; 요 6:1-71
토라포션 21 마음의 문제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 앞에서 물러갔더니 [21]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 [22]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 [23] 무릇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이 있는 자도 가져왔으며 [24] 은과 놋으로 예물을 삼는 모든 자가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며 섬기는 일에 소용되는 조각목이 있는 모든 자는 가져왔으며 [25]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빼고 그 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을 가져왔으며 [26]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 털로 실을 뽑았으며 [27] 모든 족장은 호마노와 및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을 가져왔으며 [28] 등불과 관유와 분향할 향에 소용되는 기름과 향품을 가져왔으니 [29]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 (출 35:20-29)
파스칼은 수학자로 확률이론을 만들었다. 그는 인간의 구원문제도 확률의 개념을 적용해서 설명했다. 그것이 ‘파스칼의 내기’다. 그 내용은 크리스천이 되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손해 볼 확률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죽어서 하나님도 없고, 그의 믿음이 헛된 것이었다라고 판명되더라도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신앙 때문에 믿지 않는 친구들보다 더 행복하게 산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정말 하나님도 계시고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을 얻을 것이고, 그의 무신론 친구들은 지옥에서 모든 것을 잃을 것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행복을 위해 크고 작은 배팅을 한다. 대학의 수많은 전공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이 세상에 수많은 남자와 여자 중에 단 한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한다. 많고 많은 직장 가운데 한 곳을 선택한다. 그리고 열심히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해 산다. 그러나 그래도 만족스럽지 않다.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을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고 다른 것으로 채워넣으려 해서 참된 만족이 없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나라를 소유하게 될까? 그 마음이 소유욕에 지배되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더이상 소유의 노예가 아니다. 그 마음이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그래서 가난해진 사람은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를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아브라함에게 노년에 얻은 아들 이삭은 그의 전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전부를 요구하셨다. 이삭이라는 소유를 아브라함의 마음의 성전으로부터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 원하셨다. 그 마음에 하나님 한 분 만을 전부로 소유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원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언약과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해내는 믿음의 통로로 사용하기 원하셨다. 아브라함은 언약의 실행자가 되기 이전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 필요가 있었다. 그가 믿음으로 이삭을 드리려 했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창 22:12,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만을 선택한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은 천하만민을 복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시작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소유 때문에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지 않는 개인과 공동체를 만들기 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소유 때문에 넘어진 백성이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가져온 그들의 소유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에 절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금송아지는 이집트의 황소 신인 아피스였다. 힘과 정력의 상징이다.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 가면 증권거래소 앞에 황소상이 있다. 우리나라 증권거래소의 상징도 황비다. 황소가 날아오른다는 뜻이다. 이렇듯 황소는 지금도 힘과 풍요의 상징으로 현대인들의 세속적 욕망을 대변한다.
그러나 하나님 아닌 것이 인간 마음안에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을 결코 채울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이 빼신 백성들의 마음에서 우상이 무너지고 하나님 자신으로 채워지는 삶이 되길 원하셨다. 그래서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다.
성막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먼저 하나님은 성막 건설을 통해 백성들 안에 자원하는 마음이 일어나길 원하셨다. 출 35:5,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백성들은 그들의 소유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냈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실패한 자리에서 이번에는 그들의 소유를 하나님께 자원해서 드리길 원했다. 하나님 한 분을 선택하는 백성이 되길 원하셨던 것이다. 출 35:21,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 백성들은 자원함으로 반응했다.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한 가지 목적에 온 백성이 반응한 것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본능적으로 불안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소유를 우상을 만들어 내는데 썼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다시 나타난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반응한다.
출 36:3,7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백성들이 너무 많이 가져오자 모세는 이제 그만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그들의 심령은 더이상 불안 때문에, 생존에 대한 염려 때문에 휩쓸리지 않았다. 심령이 가난해진 그들에게 이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공간이 그들의 소유로 만들어 진다. 광야에서 온 백성이 성막에 헌신하며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임재를 준비하는 공동체로 세워져 나간다.
하나님은 성막을 인간의 상식이나 경험을 통해 짓지 않으셨다. 출 36:1,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건축이야말로 애굽의 노예시절 부터 익숙했던 것이다. 그들은 애굽의 국고성을 짓는데 탁월한 경험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운 자, 그리하여 하나님의 명령대로 할 사람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셔서 성막을 건설하게 하셨다.
광야에서 성막은 이동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온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를 따라 움직이는 공동체가 되게 하셨다. 출 36:16-18,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결하고 [17] 휘장을 연결할 끝폭 가에 고리 쉰 개를 달며 다른 연결할 끝폭 가에도 고리 쉰 개를 달고 [18] 놋 갈고리 쉰 개를 만들어 그 휘장을 연결하여 한 막이 되게 하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공간인 성막은 서로 연결된 고리를 통해 하나의 형태를 가진 공간으로 완성된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의 공간인 성전을 설명할 때 한 개인 개인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엡 2: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나님의 임재는 개인과 개인이 연결된 공동체를 통해 경험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지금 한국교회의 가장 큰 위기 중의 하나는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개인차원의 신앙은 있지만 공동체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다. 서로에 대한 책임의식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도 잘 갖지 못한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성막을 통해 서로 연결된 공동체로 지어져 갔다. 그들은 이 성막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따라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공동체가 되어갔다. 탈무드에 ‘고리론’이란 것이 있다. 아무리 굵은 사슬이라도 한 개만 부러져도 무용지물이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공동체 중에 누군가가 고통당하는 것을 방치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무너지면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에는 고엘제도가 있었다.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으면 가까운 형제나 친족이 대를 잇게 해주는 제도이다. 친족 중에 땅을 잃어 버리게 되면 가까운 친족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대신 찾아 주는 제도이다. 하나님은 추수할 때도 밭 모퉁이를 다 베지 말라고 하셨다.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해 남겨두라는 것이다. 이러한 연대 책임의식은 토라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 마음에 강하게 심어졌다. 그래서 이들은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흩어져 살아도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았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전세계 유대인 네트워크를 통해 지금의 경제를 쥐고 있는 비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에서 성막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함께 행진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눈앞의 만족을 주는 것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을 주목하고 따라가는 삶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산다. 그러나 우리는 광야에 그냥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마 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의 임재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약속으로 주어졌다. 그래서 광야와 같은 삶속에서도 예수님을 따르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임재와 함께 산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더라도 자신이 광야에 내던져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산다. 광야와 같이 험한 세상에 살면서 불안을 먹고 산다. 내게 풍요와 권력을 약속하는 신에게 절하며 행복을 보장받기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마음의 빈 공간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소유의 넉넉함이 문제가 아니다. 소유의 많음이 우리 존재적인 불안의 그늘을 거둬낼 수 없다. 하나님의 임재가 관건이다. 이스라엘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상황때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던 사람들, 광야와 같은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에 주목하며 믿음으로 반응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여호수아가 그랬다. 결국 마음의 문제다. 광야와 같은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결단하는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맘몬의 힘이 더 커져가고 있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회가 되고 있다. 나도 먹고 살기 힘든데 연약한 다른 사람에게 공동책임을 갖고 베푼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생각일 수 있다. 공동체의 가치를 위해 나의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 것도 아깝게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나타나고 경험되어졌다.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 자원하고 그것을 선택한 자에게 나타났다.
하나님의 존재를 그냥 인정하는 것과 그분을 경험하며 사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반응했던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경험했던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다. 바라기는 이스라엘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경험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마음속에 자원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3월 5일 이익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