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레9:1-11:47/ 삼하6:1-7:17/ 막9:2-13
토라포션 25 어린 양의 노래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계 15:2-4)
유월절이 끝났다. 이번 주 토라포션과 연결되는 신약의 구절은 요한계시록 15장이다. 이 말씀이 유월절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역사의 현장속으로 이동했으면 한다. 먼저 우리가 이동할 현장은 기원전 1446년 출애굽이 있었던 이집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출애굽을 준비했다.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았다.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인방과 좌우 기둥에 뿌렸다. 그날밤 그 피를 뿌린 집은 죽음의 사자가 건들지 못하고 넘어갔다. Pass over, 사망의 권세가 유월, 넘어간 것이다. 애굽 전역에서는 장자들의 죽음으로 인한 통곡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통곡소리를 들으며 급히 라암셋을 떠났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남은 것은 그들이 의로워서가 아니었다. 사망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인해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차 이루실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의 모델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이동할 곳은 오늘 우리가 세례식을 할 요단강 예수님 세례터다. AD 27년경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베다니 부근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 세례요한은 이곳에서 자기에게 나아오시는 예수님을 본다. 그리고 외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세례요한은 계시를 통하여 그가 인류의 죄를 위해 죽임당하실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직감했다. 그의 직감대로 예수님은 그로부터 3년 뒤 유월절 양잡는 시각에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흘리며 죽게 된다. 예수님은 유월절 마지막 식사를 제자들과 하실 때 잔을 들고 말씀하셨다.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죄의 댓가는 죽음이지만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구원받았다. 그가 의로워서가 아니다. 예수님이 대신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사망권세가 유월,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도 바울이 외쳤다. 고전 5:7,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우리가 다음으로 이동할 곳은 오늘 요한계시록의 배경이 되는 천국이다. 사도요한은 AD90년경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다가 환상중에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가게 된다. 계 5:1-4,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사도 요한의 눈물 사이로 그가 보게 된 것은 어린 양으로 상징되는 존재였다. 계 5:5-6,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요한은 이어서 이십사 장로들와 천사들이 부르는 새노래를 듣게 된다. 계 5:9-10,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우리가 지금까지 상상속에서 이동한 현장에서 공통적으로 본 것이 있다. 그것은 죽임 당한 어린 양이었다. 먼저 출애굽 유월절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죽은 어린 양이었다. 그 다음 골고다 언덕에서 온 인류를 대신해서 죽임 당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승리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본문인 요한계시록 15장에서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계 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그들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짐승과 그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에 살면서 사자굴에 들어갈지라도 느부갓네살왕이 만든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다. 로마제국에 살던 기독교인들도 순교의 제물이 될지언정 황제 앞에 절하지 않았다.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천상에서 부르고 있는 노래가 바로 어린양의 노래인 것이다. 계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목할 것은 이들이 부르고 있는 노래를 모세의 노래라고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먼저 천상의 성도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계 15:3,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리하여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은 홍해 곁에서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출 15:1-2,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애굽이라는 강력했던 제국도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 무릎 꿇어야 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로 구원을 경험한 자들은 그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찬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어서 천상의 성도들은 왕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계 15:3,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성경에 모세의 노래는 신명기에도 나온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부른 노래이다. 신 31:30-32:4,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 [32: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2]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여기서 모세는 공의롭고 참되신 하나님을 노래했다. 그리고 그분을 반석이라고 표현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반석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다.
신 32:12-13,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13]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 대신에 흔들리는 이방신들을 섬겼다. 신 32:15-16,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여수룬은 ‘곧은’, ‘의로운’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구원한 자들을 의로운 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그들의 반석이 되신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발로 찬 것이다. 가난해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다. 힘이 생기고 부유해질 때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다시피 구약에 정통한 랍비였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통해 계시가 열린 사람이었다. 그는 이 반석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고전 10:1-4,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오늘날도 세상과 제국의 힘있는 자들은 반석이신 예수님을 업신여긴다. 그분을 조롱하고 그 분을 따르는 자들을 핍박한다.
신 32:43,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이 모세의 노래가 언제 이루어지는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심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의로우신 심판의 대상이 되어 친히 희생의 피를 흘리신 것이다. 힘에 의한 정복이 아니라 아무 죄없으신 분이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를 받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속죄를 노래하고 있는 이 모세의 노래는 결국 예수님을 통한 완전한 속죄를 노래하는 어린 양의 노래인 것이다. 천상의 성도들은 이제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이 만국의 왕이시며 그의 구원이 의롭고 참된 것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천상의 성도들은 또한 주의 거룩하심을 노래하며 만국이 주께 와 경배할 것을 노래한다. 계 15: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계획은 순종하여 승리하신 어린 양이 영원한 경배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분의 계획은 이 땅에 어린 양을 노래하며 따르는 자들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어린 양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계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이것이 인간 삶의 실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이 땅에 힘을 가진 세력, 짐승으로 묘사되는 세상의 시스템에게 절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반석이신 예수를 업신여기고 결국은 흔들리고말 세상의 권력에 머리를 조아리며 사는 것이다.
결국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누가 세상의 주인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어린 양을 따를 것이냐, 짐승을 따를 것이냐의 선택이다. 아무 힘없는 어린 양을 따르는 것은 무력해 보인다. 바보같아 보인다. 세상에서 힘을 가진 짐승 편에 서는 것, 그것이 더 안전하게 보일 수 있다. 부와 힘과 윤택함을 보장 받는 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흔들리고 마는 길이다. 사도요한은 고난과 박해를 통과하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계 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나님의 진노는 무섭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이 이 진노를 피할 수 있다. 생명책에 기록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 (계 14:12) 이다.
오늘날 우리 역시 짐승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기술의 진보와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그를 따르는 것이 조롱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오늘날 누가 이 짐승의 시대에 맞설 수 있을까? 권력이 있는 자가 아니다. 부자가 아니다. 어린 양을 따르며 어린 양을 향해 노래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최후 승리가 어린 양께 있음을 아는 자들이다. 요 11:25-26절의 예수님의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을 믿는 자들이다. 성경은 짐승의 시대를 사는 자들에게 최후승리가 어디있는지 보여준다. 계 17:13-14,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사실 사단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힘을 가진 자가 아니다. 어린 양과 그 분이 흘리신 보혈이다. 그리고 그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이다. 의로우신 분이 순종하며 흘리신 보혈 앞에 사탄은 두려워 떨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린 양을 노래하라 그분이 흘리신 보혈을 찬양하라.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이제 승리하신 메시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 때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다같이 참여하는 성도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4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