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레 16:1-20:27/ 암9:7-15/ 요7:1-10:21
토라포션 27 하나님 나라 유업의 조건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주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23]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24]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20:22-24)
시인과 촌장의 ‘좋은 나라’란 노래가 있다.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곳에서 만난다면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들을 까맣게 잊고 다시 인사할지도 몰라요’ 한 때 많이 불렀던 노래다. 좋은 나라에 살고 싶고, 지금 그렇지 못하다면 죽은 이후에라도 좋은 나라에 가고 싶은게 우리 인간의 바램이다. 여러분은 지금 좋은 나라에 살고 있는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린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주신 가나안은 좋은 나라였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가득했던 가나안 원주민들을 심판하시면서까지 그 나라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업으로 주셨다. 그러나 그 좋은 나라에 거주하는 조건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었다. 레 20:22,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주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그 땅이 그 백성들을 토해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땅을 주시면서 가장 염려하신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땅의 풍속에 물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부하셨다. 레 20:23,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이 말씀은 레위기 18장에서도 부탁하셨던 내용의 반복이다. 레 18: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애굽 땅의 풍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의 구원이 있기 이전 너무나 익숙한 문화였다. 가나안 땅의 풍속은 이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차 다가올 유혹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세상의 풍속에서 구별되기 원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기 원하셨다.
하나님이 염려하셨던 가나안의 풍속은 무엇이었을까? 첫번 째는 근친상간이었다. 그래서 레 18:6절에서 “각 사람은 자기의 살붙이를 가까이 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두번 째는 간음이었다. 레 18:20, “너는 네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여 설정하므로 그 여자와 함께 자기를 더럽히지 말지니라” 세번 째는 몰렉제사였다. 레 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몰렉은 고대근동에서 사람들이 섬기던 신이었다. 자식을 바치는 것을 가장 소중한 제사로 여기는 우상숭배였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식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모압왕 메사도 전쟁을 이기기 위해 큰 아들을 몰렉의 제물로 바쳤다. 네번 째는 동성애다. 레 18:22,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다섯 번째는 동물과의 성행위다. 레 18:23,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여섯번 째는 접신자와 무당을 따르는 것이다. 레 20:6,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 가나안의 풍속에서 구별되기 원하셨다. 그래서 반복해서 당부하셨다. 레 18:24-25, 28,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지만 그 땅의 사람들이 더럽혀졌을 때 그 주민을 토해내는 희한한 땅이었다.
이 희한한 땅은 결국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백성 모두를 토해내고 말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가나안 땅의 풍속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부르심과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더이상 그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신약에 와서 비슷한 맥락의 말을 바울이 한다. 고전 6:9-1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고린도 지역에도 당시 성도들이 물들 수 있는 세상 풍속이 있었다. 아프로디테 신전을 통해 성이 찬양되었다. 간음과 잘못된 성행위에 대한 집착, 동성애가 보편화되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도 이전에 이런 행위가운데 있었던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그렇지만 세상의 풍속에 미혹되어 다시 옛행위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호소하고 있다.
자, 여기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있다. 유업으로 받는 것의 차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유업으로 받는 것은 ‘땅’이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된다. 1세기 유대인들은 이 땅의 회복을 원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철저히 지키며 경건에 힘썼다. 에세네파들은 쿰란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그들의 메시아를 기다렸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도 그들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라고 질문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눅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땅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회복이었다. 그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외치신 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였다. 막 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 이 땅에 선포되었고 예수님을 통해 이미 시작된 나라다. 지금 이 땅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여기서 천국은 ‘The kingdom of heaven’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쓴 글이기에 ‘하나님’ 대신 ‘하늘’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시작된 나라이다. 이 하나님 나라는 감추어진 보화같은 것이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숨겨두고 기뻐한다. 그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통째로 산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 나라를 발견했는가? 그것을 구매했는가?
사탄은 경제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처럼 사람들을 속인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도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메시아임을 입증하라고 유혹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과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린다. 이것이 해결되면 좋은 나라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떡은 생존에 필요한 것이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말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세상은 지금 의가 없기 때문에 고통 당한다. 바른 정치가 없고 굽은 판결 때문에 세상은 신음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상은 또한 샬롬이 없기 때문에 고통 당한다. 인간의 탐욕과 죄의 역사는 남을 짓밟고 전쟁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소유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관계를 회복하고 샬롬을 가져 온다. 세상에 이 하나님 나라의 평강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세상은 진정한 기쁨을 상실했기에 고통당한다. 남편들이 다른 여자와 탐욕적인 쾌락을 즐기는 동안 아내의 삶에는 희락이 사망 선고되는 것이다. 희락은 인간의 욕심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희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 먼저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늬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눅 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에 임하는 나라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되실 때,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왕이 되실 때 그 분의 킹덤이 시작되는 것이다. 막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설득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냥 받는 것이다. 자녀의 분깃으로 주어지는 것을 받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가 준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기다린다. 기다렸다 받는다. 물론 부모에게 많이 속아본 애들이나 똑똑한 애들은 의심한다. 의심하고 안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으로 주시는 분을 따를 때 받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런 어린아이와 같기를 축원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막 9: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언제 이루어지는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다.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의 마음가운데 임한 것이다. 예수의 영인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 후로 제자들이 변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더이상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고 질문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를 온 세상에 선포하는 담대한 증인이 되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하나님 나라의 주인을 보았다. 그 후 그들은 오른 뺨을 맞을 때 왼뺨을 돌려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억지로 오리를 가자는 사람에게 십리를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원수를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하여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 가슴에 소유한 자가 되었다. 그리고 고통받는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심는 자가 된 것이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선택과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통해 세워졌다. 당시 왕과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기름부음 받은 작은 메시아들이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작은 메시아들이 된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보기 위해 이 작은 메시아들을 기다린다. 나와 여러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작은 메시아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는 쾌락과 탐욕이 지배하는 사회다. 즐거울 수 있다면, 더 가질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용납되는 사회다. 간통죄도 사라지고 동성애도 합법화되는 사회다. 애완동물과의 결혼도 인정해달라는 사회다. 대학가에 점집이 성행하고 있다. 옛날 가나안의 풍속이 지금 부활하고 있다. 애굽에서 처럼 구원받기 이전 우리에게 익숙했던 문화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구원 이후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세상 문화에서 우리를 구별해야 내야 한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자녀는 구별됨으로 거룩한 땅,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자격을 부여받았다. 오늘날 위기는 이 세상의 풍속이 교회 안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섬기는 물질만능주의가 교회에서도 숭배되고 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는 상향성에 대한 욕구가 교회 안에서도 만연하다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는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기 보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복을 빌어주는 교회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사람, 그런 공동체에는 숨겨지는 나라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를 붙들고 가는 나라다. 그 나라가 작아보일 수 있다. 그 나라가 무력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갈 때 하나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이 땅에 심어지고 회복되는 것이다. 그 나라는 세상이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아도 다시 살아나는 나라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작은 메시아가 되길 바란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때 그 좋은 나라에서 서로 마주 보며 함께 기뻐할 수 있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5월 14일 이익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