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29 희년의 자유

이번 주 토라포션: 레 25:1-27:34/ 렘 16:19-17:14/ 눅 13:1-33, 14:1-15:32

토라포션 29 희년의 자유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10]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11]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레 25:8-12)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민주화 투사가 아니었어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을 때가 있었다. 운동권이 아니었어도 거리에 나가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돌을 들었을 때가 있었다. 자유를 얻기 위한 바램이었다. 그것이 나의 1987년 대학교 1학년 때의 기억이다. 그 후 우리 사회는 독재라는 눈에 보이는 폭력과 쇠사슬에서 벗어난 듯 했다. 그리고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지금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여러분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대학을 나와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소위 좋은 직장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들어간 곳에서 여러분은 새로운 형태의 독재를 만난다. 그곳에서 나의 자유는 제한되고 조직의 목표에 대한 복종이 요구된다.

법학자인 영남대 박홍규 교수는 지금의 우리 사회를 이렇게 진단한다. 한국에서 자유란 내 마음대로 소유하고 소비하며 향유하는 등의 행위를 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돈만 있으면 자유롭다 그러나 그 소유나 사유의 자유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결과는 형언할 수 없이 비참한 양극화가 아닌가? 이는 우리 나라만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특히 한국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왜 이렇게 자유는 타락했는가? 이는 기업 권력과 기업 정신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즉 대기업이 정치인을 매수하거나 스스로 정치인이 되거나 미디어를 지배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모두 지배하여 인민은 그것을 알 수도 없고, 그것에 저항하지도 못하면서 수동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공감이 되는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시민들의 자유를 위협하는 가장 큰 독재는 무엇일까? 박 교수는 “형식적인 자유를 주장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방종화해 거의 독재 수준에 이른 국가 권력과 자본 권력”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국가 권력과 자본 권력을 미화하는 보수언론과 물질주의, 경쟁주의 등이 결합해 전체주의적 분위기가 조성됐고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들이 자유를 상실하고 기계의 일부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오늘 우리는 토라포션을 통해 우리가 누리고 지켜야 할 자유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오늘 본문은 희년에 대해 다루고 있다. 레 25:8-9,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하나님은 구구단 중 7X7=49를 좋아하시는 것 같다.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유대인들은 초실절로부터 일곱 번의 안식일을 계수하고 그 다음 날인 50일째를 오순절로 지킨다. 오순절은 추수를 통해 한 해 가장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날이다. 이것을 확대하여 하나님은 7년마다 있는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내고 오십 년째 해를 희년으로 지키도록 하셨다. 한 해를 통째로 은혜의 해로 지키게 하신 것이다. 희년은 욤키푸르 때 요벨이라는 숫양의 뿔나팔을 불며 시작되기에 ‘요벨의 해’라고 한다. 요벨을 영어로 음역한 것이 Jubilee이고, 한자로는 기쁠 희자를 써서 기쁨의 해, 즉 희년으로 번역한 것이다.

희년에 시행되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부채의 탕감이다. 레 25:10,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여기서 자유는 히브리어로 ‘드로르’다. 아카디어 ‘안드라루’에서 차용된 말인데, ‘부채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얼마를 빚졌건 모든 부채가 탕감받는 해가 희년이다. 빚을 진 모든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해가 바로 희년이다. 희년은 빚 때문에 집을 떠난 사람들이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오는 해이다. 땅을 팔아서 돌아갈 땅이 없는 사람도 다시 자기의 원 소유지로 돌아오는 해이다.

희년에 시행되는 두번 째 사항은 땅을 쉬게 하는 것이다. 레 25:11-12,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믿음이 필요한 행위다. 마찬가지로 일곱번째 안식년과 이어지는 희년까지 2년을 경작하지 않고 땅을 쉬게 하는 것은 큰 믿음이 필요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레 25:20-21,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21]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희년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믿음으로 지켰을 때 내가 미리 예비한 은혜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의 계산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부분들이 물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하지 않고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지킬 때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그분의 은혜로 이끄시는 삶의 영역들이 있는 것이다.

희년에 시행되는 세번째 사항은 토지 소유가 원상태로 회복되는 것이다. 레 25:23-24,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4]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사실 토지는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토지는 다 내 것이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만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 하나님과 함게 살아가는 존재였다. 토지는 다만 사람들에게 맡겨진 것이기에 영원히 팔 수 없는 것이었다. 팔 수는 있지만 영구히 팔지 못한다는 것이다. 경제 사정이 안 좋아 팔았던 토지는 나중에 돈을 벌어 다시 살 수 있었다. 자신이 다시 살 수 없으면 가까운 친족 중에 대신 값을 치르고 토지무르기를 할 수 있었다. 토지 무를 돈도, 부자 친척도 없으면 남의 종이 되거나 도망 다니며 희년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희년에 시행되는 네번 째 사항은 노예해방이다. 레 25:39-40,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40]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그래서 희년에는 모든 사람이 원점에서 다시 재기를 꿈꿀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희년에 시행되는 사항은 주택 소유를 원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다.  레 25:31, 그러나 성벽이 둘리지 아니한 촌락의 가옥은 나라의 전토와 같이 물러 주기도 할 것이요 희년에 돌려보내기도 할 것이니라 희년은 이처럼 한 사람이 토지에 토지를, 가옥에 가옥을 대를 이어 소유하는 것을 방지한다. 모든 것을 무한 소유하는 탐욕을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사회시스템인 것이다.

이러한 희년제도가 실제로 실행되면 어떻게 될까?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을 것이다. 흙수저, 금수저 논쟁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부익부 빈익부 현상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희년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 것으로 보인다. 대하 36:20-21, 칼에서 살아 남은 자를 그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의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통치할 때까지 이르니라 [21]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땅이 70년의 안식년이 필요했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490년 동안 안식년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BC690년경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가 오셨을 때 진정한 희년이 이루어질 것에 대해 예언했다. 사 61:1-2,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나사렛의 한 회당에서 이 이사야서 말씀을 선포하셨다. 눅 4:18-2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셨다. 단순히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희년이 단순히 사회개혁을 통해 이뤄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으셨다. 영적으로 해석하신 것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제 인간 사회에 희년이 시작되었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포로됨에서 자유를 얻는 희년은 50년을 기다려야 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희년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을 통해 희년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 종노릇하는 노예로 살게 된다. 예수님은 이 희년의 자유를 모든 사람이 누리기 원하셨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렇게 되묻는다. 요 8: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님은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죄의 종으로 사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요 8:34-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종과 아들의 차이가 있다. 종은 영원히 아버지의 집에 거하지 못하나 아들은 영원히 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탕자의 비유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로 부터 자유 선언을 한다. 아버지 기업의 유산을 미리 받아 완전히 탕진해버린다. 먹을 것이 없어 돼지를 치는 종이 된다. 그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품꾼의 하나로 여겨달라는 마음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다시 회복시키시키시고 잔치를 벌인다. 하나님은 이처럼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에게 이전의 것을 다시 누리게 하신다. 잃어버렸던 기업, 잃어버렸던 자유, 잃어버렸던 아들로서의 위치를 제자리로 돌리신다. 이것이 바로 탕자가 누리게 된 희년의 축복이다. 희년은 곧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품에서 우리가 원래 누릴 수 있었던 축복을 다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인권과 자유를 말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난 인본주의적 자유를 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인본적인 자유의 실상은 자유가 아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자유는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기업으로 회복해야 한다. 시 25:12-1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3]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매여 자유가 없는가? 기쁨과 행복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기업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야 한다. 희년은 우리의 기업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다. 죄의 노예됨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그래서 희년의 자유와 기쁨을 누리도록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빚을 지불하셨다. 여러분 인생의 희년은 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시작되는 것이다. 그 분이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을 이렇게 표현했다. 빌 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진정한 기쁨과 자유는 외부 환경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모든 포로됨과 눈 멈과 눌림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소유가 많아 많은 것을 소비할 수 있을 때 자유롭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주는 일루젼이다.

우리는 지금 쉬운 해고를 바탕으로 한 무한 자유경쟁체제, 신자유주의가 이끄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다. 최고 생산성을 올린 사람에게는 승진과 보너스가 몰리지만 생산성이 낮은 사람은 언제 해고될 지 모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소수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로 자유를 누리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존 그 자체를 위해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서로를 생각해주고 세워주는 공동체성은 파괴된다.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는 점점 작아진다. ‘응답하라’ 시리즈라든가, 복고 열풍이 부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까지 각박하게 살지 않았던 따뜻했던 때가 그리워서 일지 모른다. 교회도 어려운 때를 지나고 있다.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 자신의 생존과 가족을 위해서만 살기에도 힘든 때가 아닌가 한다.

희년의 자유는 예수님이 오셔서 이미 선포되었다. 이 희년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외부의 환경과 상관없이 주님이 그 마음 중심에 있는 사람이다. 주님 외의 다른 것이 우리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를 방해한다. 자식도, 남편도,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행복도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되어선 안된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기업이 되는 삶이 되야 한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 희년의 삶은 예수님이 주인되실 때에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따를 때 우리 역시 희년의 자유를 선포하는 삶을 살게 된다. 예수님을 소유하지 못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인생의 이런 저런 염려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하는 자가 된다.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바라기는 이 땅에 이미 시작된 희년의 은혜와 자유를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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