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30 하나님께 인생을 심으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렘 17:5-8)
축복과 저주는 성경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다. 누구나 축복을 받는 삶을 살고 싶지, 저주 받는 삶을 살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축복받고 싶다는 희망,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번 주 토라포션의 주제는 한마디로 축복과 저주다. 레 26:3-4,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4]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축복이다. 이어 저주에 관한 구절이 이어진다. 레 26:14-16,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15] 내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내 법도를 싫어하여 내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배반할진대 [16]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가 파종한 것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다른 민족과 달리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축복의 기준은 힘에 있지 않았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있어야 축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했는가가 축복을 받는 기준이었다. 기원전 1450년 경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었다. 그 후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가 토라에서 약속한대로 너무도 분명하게 이루어졌음을 안다. 토라를 사랑해서 머리와 팔뚝에 감고 다녔던 민족이었다. ‘쉐마 이스라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문기둥에다가 말씀을 새겨 넣고 문을 드나들 때마다 입을 맞추었던 민족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어찌하여 토라를 지키지 못한 민족이 되어 하나님의 저주를 경험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840년 이후 기원전 610년경의 기록인 예레미야서를 통해 찾아 보고자 한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했고, 남유다는 망하기 약 24년 전의 일이다. 렘 17:1-2,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2] 그들의 자녀가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당시 유다백성들은 풍요의 신인 아세라에 빠져있었다. 유다 백성들은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예레미야에게 항변했을 수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너희들의 자녀가 아세라들을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부모들의 평소의 삶이 풍요의 신인 아세라에 대한 생각으로 골똘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도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풍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찼던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러한 유다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한다. 렘 17: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개역성경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 뒤에 나오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저주받으리라’는 선포가 문장 맨 앞에 위치한다. 저주가 임하는 대상은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인간의 부르심이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했다. 그것이 이 민족의 존재적인 부르심이었다. 당시 국제정세는 앗수르 제국이 기울고 바벨론이 제국으로 일어나는 때였다. 기존의 애굽과 신흥 바벨론이라는 두 경쟁 강대국 사이에서 남유다는 어디에 줄을 서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힘을 가진 이방 나라를 의지했다. 하나님보다는 이방신을 의지하면서 안전과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남유다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셨다. 사 2:22-3:1,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3:1]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의지하는 것을 끊어서라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백성이 되길 원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과 육신의 힘을 의지하는 유다백성의 운명에 대해 예레미야는 이렇게 선고한다. 렘 17: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사막의 떨기나무는 히브리어로 ‘아르아르 베아라바’이다. 아라바 광야에 있는 ‘아르아르’라는 나무와 같다는 것이다.
‘아르아르’가 뭘까? 이스라엘 광야에 가면 ‘소돔사과’라는 나무가 있다. 히브리대 식물학자인 하루베니는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사막의 떨기나무가 바로 이 ‘소돔사과’ 나무라고 한다.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열매가 열려있는데 만져보니 풍선처럼 말랑말랑했다. 이것을 본 근처 유대인이 그 나무에 독이 있으니 손을 씻으라고 했다. 보기에는 그럴듯한 열매인데 독이 있고 열매 안은 텅비어있다. 그 안은 솜같은 실로 차있는데 열매를 따면 열매가 부서지면서 그 실이 연기처럼 날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소돔사과는 ‘광야의 저주받은 레몬’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힘만 의지하는 사람이 바로 저주받은 이 소돔사과 나무와 같다는 것이다. 그 열매가 있어보이는 것 같지만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지못하고 허망하게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맥과 자기 재산, 자기 경험을 믿는다. 그것으로 세상을 움직일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를 다니고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믿는다. 그래서 사실 기도하지 않는다. 사람을 믿고 자기가 가진 것을 믿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기도를 한다하더라도 하나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세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기도한다. 그러다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예레미야는 모두가 저주를 향해 달려가는 그 상황에서 축복을 받는 삶에 대해서 말한다. 렘 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이 구절도 히브리어 성경에는 ‘복을 받을것이다’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복을 받는 사람은 여호와를 의지하고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삶을 예레미야는 이렇게 표현한다. 렘17:8,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열매를 먹을 수 없는 광야의 소돔사과나무가 아니라 물가에 심어져 결실이 그치지 않는 나무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축복이 고난과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기대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이라고 고난과 고통이 비껴가지 않는다. 그 사람도 더위를 겪고 가무는 해를 통과 할 때가 있다. 암에 걸릴 수도 있고, 재난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이 다른 점은 그가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그 인생의 뿌리가 하나님께 심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고난은 원망의 자리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 왜 나에게 고난을 주셨냐고 쉽게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은 더 깊은 신앙의 자리로 나아가는 기회가 된다. 복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남을 쉽게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며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반응한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고난과 상처를 부여잡고 더욱 능력있는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고난도 축복으로 바꿔버리는 삶이 되는 것이다.
히스기야는 남유다의 왕중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심으로 의뢰한 몇 안되는 왕이었다. 왕하 18:5,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그는 앗수르의 침략으로 국가 존립의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그는 고난 속에서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기도의 자리로 나아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다. 18만 5천의 앗수르 군대가 몰살당하고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한 결과다.
시편기자도 복있는 사람의 삶을 비슷하게 표현한다. 시 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삶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심느냐의 싸움을 하며 산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심어져 있느냐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갈리게 된다.
렘 17:9-11,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예레미야는 또 하나의 그림 언어로 그 마음에 하나님 경외함이 심어져 있지 않는 사람, 그래서 불의한 방법으로 치부하여 재물을 모으는 사람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한 사람은 자고새가 자기가 낳지 않은 알을 품고 있는 것 같다고 묘사한다. 자고새는 남의 알을 훔쳐다가 그것을 자기알처럼 품어서 부화시킨다고 한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가 잘 자라도록 먹이도 물어다주고 정성을 기울여 키운다고 한다. 그런데 새끼가 자라면 자기 어미가 아닌 것을 알고 이 새끼가 자고새 어미의 품을 떠난다고 한다. 불의한 재물은 결국 아무리 품어도 자기 품을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우리 마음 속에 심어져 있지 않을 때 우리는 내 것이 아닌 것을 품고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다.
남유다백성들이 누리고 싶었던 축복은 결국 자고새가 낳지 않은 새끼처럼 그들의 둥지를 떠나 날라갔다. 토라를 통해 유다백성들에게 남겼던 축복과 저주는 결국 남유다의 멸망으로 끝났다. 레 26:43-44, “그들이 내 법도를 싫어하며 내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그 땅은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리라 [44] 그런즉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땅에 있을 때에 내가 그들을 내버리지 아니하며 미워하지 아니하며 아주 멸하지 아니하고 그들과 맺은 내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니라” 남유다는 70년의 바벨론 포로생활이라는 저주와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처럼 아주 멸망하지 않고 다시 포로에서 돌아오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했다.
자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토라의 축복과 저주는 아직도 유효한 것인가? 구약 레위기와 신명기에 나와 있는 축복과 저주를 현대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나는 이제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예수님을 통해 주신 새로운 언약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바울이 말했다. 갈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전에는 유대인 역시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받을 수 없었다.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인들이 받아야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 그리하여 불순종에 따르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축복은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을 때 완성되도록 하셨다.
자 다시 정리한다. 축복과 저주는 모든 인류의 실제이다. 우리가 관심이 없다고 제껴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축복 아니면 저주를 받는다.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축복을 우리가 받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주가운데 놓일 수 밖에 없다. 이 저주를 끊어야 한다. 이 저주를 끊는 길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저주받았음을 믿는 것에서 시작된다.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나무에 달리셨을 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았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을 위해서 받은 것임을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공의로운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 인류에게는 이제 축복을 받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통해 그 축복이 실제가 되는 삶을 살았다. 고후 6:4-10,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상당히 역설적인 삶이다. 세상의 풍요나 사람의 힘에 기대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심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하나님께 뿌리내린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로 살아간다. 그런 사람은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아간다. 바라기는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 심겨져서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월 6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