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민1:1-4:20/ 호2:1-22/ 눅16:1-17:10
토라포션 31 광야를 통과할 때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계수된 자니 모든 진영의 군인 곧 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며 [33]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계수되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느니라 [3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 (민 2:32-34)
출애굽 이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기대했던 이스라엘이 먼저 마주친 것은 광야라는 현실이었다. 광야는 기대해서 가는 곳이 아니다. 거기서 살 수 있는 곳도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곳이다. 그래서 시간을 돌리고 싶은 곳이 바로 광야다. 애굽이라는 옛 시절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아직 이르지 못한 가나안을 더욱 동경하게 만드는 곳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은 민수기 말씀이다. 광야 40년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왜 그토록 오랜 시간 광야를 통과해야 했을까? 하나님은 왜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 가나안에 이르는 직행열차를 깔아주지 않으셨을까? 광야를 잘 통과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걸어서 일주일이면 간다. 해변길은 애굽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대로였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해변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스라엘이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 13:17-18,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가나안 땅 해변길에는 블레셋 민족이 버티고 있었다. 하나님은 블레셋의 전력을 알고 계셨다. 이스라엘이 맡붙으면 아주 많이 얻어 터질 것도 알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치밀한 배려와 사랑으로 그의 백성들을 대로가 아닌 광야로 인도하신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광야에 들어서면서 그들의 결핍에만 주목한다. 물이 없고 먹을 게 없어서 아우성쳤던 것을 우리는 출애굽기 말씀을 통해서 알고 있다. 애굽 땅 고기가마 곁에서 바베큐하고 떡을 배불리 먹었던 때를 그리워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를 주셨고 메추라기 고기도 주셨다. 광야에서 이전과 같지는 않았겠지만 부족하지 않는 공급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출애굽 후 50일만에 토라를 주셨다. 또한 출애굽 1년 후에는 성막이 세워지게 하셨다. 그리고 광야에서도 그분의 영광과 임재로 동행할 것을 약속하셨다. 성막이 세워지고 한 달 뒤의 이야기가 바로 민수기에서 펼쳐진다.
민 1:1-3,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3]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하나님은 인구조사를 하라고 하신다. 이 책의 제목이 영어로 numbers라고 불리게 된 이유다. 유대인 최초의 인구조사다. 사실 요즘 정통 유대인들은 인구조사에 비협조적이라 조사기관이 애를 먹는다고 한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다가 7만명이 죽은 사건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다윗이 사람의 수를 센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보다는 자신의 군사력을 의지하는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람의 수를 셀 때 ‘하나, 둘, 셋…. ”으로 세지 않는다. ‘로 아인, 로 슈타인…’ 즉 ‘하나가 아니고 둘이 아니고…” 하면서 우회적으로 센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직접 인구를 조사하라고 명하신다. 그들을 이제 군대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다. 각자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살기에도 벅찬 삶이었다.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는 삶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지파별로 계수된다. 그리고 성막을 중심으로 배치된다. 동쪽에 유다, 잇사갈, 스블론 지파, 남쪽에 르우벤, 시므온, 갓지파, 서쪽에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지파, 북쪽에 단, 아셀, 납달리 지파가 포진한다.
그리고 동서남북 각 진영에는 그들의 지파를 상징하는 깃발이 세워진다.
민 2:17, “그 다음에 회막이 레위인의 진영과 함께 모든 진영의 중앙에 있어 행진하되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각 사람은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들의 기를 따라 앞으로 행진할지니라”
랍비들의 견해에 의하면 동쪽에는 유다를 상징하는 사자깃발이, 남쪽에는 장자 르우벤을 상징하는 사람 머리모양의 깃발이, 서쪽에는 에브라임을 상징하는 소문양의 깃발이, 북쪽에는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있었다고 한다. 애굽에 노예로 있었을 때 그들이 흔들 수 있는 깃발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깃발을 흔들며 함께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는 민족이 된 것이다. 그들은 더이상 존재감이 없는 노예가 아니였다. 생존을 위해 각자 힘든 싸움을 하는 개인들도 아니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민족의 일원으로 행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머리 위로 깃발이 바람에 휘날릴 때 이제 하나님나라 민족 공동체라는 그들의 존재감도 펄럭이게 된 것이다.
자, 그런데 흔들 수 있는 깃발이 있다고 광야를 잘 통과 할 수 있을까? 그렇지가 않다. 깃발을 흔든다고 밥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가나안 정탐꾼들이 돌아와 부정적인 보고를 했을 때 하나님의 군대라는 그들의 존재감은 한 순간에 꺾이고 만다. 그들의 펄럭이던 자존감은 사라지고, 자신들이 스스로 보기에 ‘우리는 메뚜기 같다’는 집단 컴플렉스에 빠진다.
광야에서 우리는 내가 사회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깃발이 있어도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없기때문에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성공의 대열에서 멀어지거나 감당할 수 없는 사고와 질병을 마주 할 때, 혹은 자녀들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우리는 무력감에 빠진다. 무력감이 깊어지면서 염려와 불안이 커진다. 나를 고통스런 광야의 현실로 인도한 모든 것에 대한 원망도 커진다. 내 위에 있는 사람, 그것이 상사이든, 하나님이든, 이러한 상황을 허락했을 것 같은 사람에 대한 불신과 원망도 커진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광야라는 공간을 만드신 의도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광야를 왜 만드셨을까? 광야라는 히브리어는 ‘미드바르’이다. 말하다라는 ‘다바르’와 어원이 같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유다백성을 바람난 아내로 표현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호 2: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친 들은 광야다. הֹלַכְתִּיהָ, הַמִּדְבָּר 할라흐티하 하미드바르 그녀를 광야로 데려가서, וְדִבַּרְתִּי베디발티, 말하겠다는 것이다. 즉 광야 ‘미드바르’는 하나님이 ‘다바르’ 말씀하시는 곳이다.
호 2:15-16,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죽음과 같은 골짜기에서도 소망의 문이 열게 된다. 거기에서 주님이 나의 유일한 남편이라는 신부의 고백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고통이 크기 때문이다. 내 안의 탄식이 너무나 커서 하나님의 음성은 그저 침묵으로만 여겨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상황가운데 불신의 목소리가 커져간다. 나에 대한 좌절과 원망, 다른 사람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아우성친다.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기대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독촉하는 마음이 속에서 빗발친다. 그래서 광야를 걸을 때 보통은 비딱하게 걷게 되는 것이다.
원망이 커져있을수록, 염려와 불안이 커져있을수록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 내면와 외부에서 들리는 말들을 잠재우고 오직 하나님께로 우리가 순전히 돌아설 때 하나님의 음성은 열정적인 사랑의 계시로 들려오게 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그분의 임재와 영광을 거두시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볼 수 있도록 성막을 진 가운데 배치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 성막을 담당하기 위해 레위지파를 따로 구별하여 세우셨다. 그래서 그들은 군대 소집을 위한 인구조사에서도 제외되었다. 민 1:49-50, “너는 레위 지파만은 계수하지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 [50] 그들에게 증거의 성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모든 부속품을 관리하게 하라 그들은 그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운반하며 거기서 봉사하며 성막 주위에 진을 칠지며” 그래서 고핫자손, 게르손 자손, 므라리 자손이 각각 성막 남쪽, 서쪽, 북쪽에, 그리고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은 성막의 동쪽에 진을 쳤다.
그들이 하는 일은 성막 기구와 부속품을 관리하고 그것을 운반하고 다시 조립하여 세우는 단순한 일이었다. 어쩌면 허드렛일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는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진가운데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 주 몸살을 않으며 짧은 광야와 같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 두 가정이 한국으로 가시는데, 남아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세보려다 말았다. 교회가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하나 하는 조바심도 났다.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축제에서 장사를 했던 때도 생각났다. 민중가요를 카세트 테잎에 녹음해서 천원씩 팔았었다. 내가 한 최초의 비지니스였다. 딱 하루 벌은 돈으로 친구들과 막걸리 사먹은 기억이 있다. 교회 수입을 위해 뭔가를 해야하나 고민도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소리를 잠재우는 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분명해진 것은 교회를 위한 나의 사명은 레위인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운반하는 사역에 계속해서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덮혀진 책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생명처럼 들려지게 하는 것이 나의 부르심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광야 끝, 가나안 동편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애굽을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다. 물론 광야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고 그들의 불신 때문에 모두 죽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세대는 이제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만한 군대가 되어 광야 끝에 서 있게 된다. 그들은 더 이상 홀로 생존을 위해서만 사는 자들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헌신된 공동체가 되었고, 하나님의 언약에 충성하며 하나로 묶여 있었다. 그들이 혼자 였다면 결코 광야를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깃발 아래 함께 협력했고, 매일 매일 함께 행진했기에 그들은 더 좋은 땅 가나안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곳에 텔아비브 욥바교회라는 깃발을 세우게 하셨다. 이 깃발 아래 우리는 각개전투하는 자들이 아니라 함께 행진하는 공동체가 되길 소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자가 처한 광야와 같은 현실속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드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신 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결국 광야를 만날 때 그것을 통과하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다. 내 판단, 내 기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선악간의 기준까지 내려놔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관점이 나의 온 마음을 지배하게 해야 한다. 그 때 우리는 비로서 광야가 주는 결핍과 두려움, 불안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광야를 통과하고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도 마찬가지 삶의 원리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영으로 충만한 자가 하나님이 누리게 하신 생명의 능력으로 이 땅에서 사는 것이다.
매번 광야를 만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싸움이다. 광야를 만날 때마다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은 경계선에 설 것이다. 불평과 원망을 쏟아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만 구하기 위해 침묵할 것인가… 그 경계선에서 우리가 겸손히 침묵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 영혼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오늘은 오순절이다. 오순절을 통해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토라를 받았다.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을 받았다.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했던 제자들은 그들의 인생에서 광야와 가나안이라는 경계선이 사라졌다. 그들에겐 더 이상 광야도 없었고 가나안도 없었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는 것은 이 유한한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특권이다. 이 특권이 여러분에게 있길 원한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광야에 있든, 가나안에 들어 갔든,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어 살아가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6월 11일 이익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