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민4:21-7:89/ 삿13:2-25/ 요11:1-54
토라포션 32 축복을 전달하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 6:22-27)
유월절이나 초막절에 서쪽벽에 가면 제사장들의 후손들이 모여 아론의 축복기도를 선포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 나오는 이 제사장의 축복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라는 말씀은 광야에서 주어졌다. 지파별로 진의 배치가 끝나고 이스라엘 민족이 한 공동체로 가나안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면서 주어졌다. 하나님은 특별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통해 날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축복하도록 하셨다. 광야의 여정동안 이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보자. 민 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먼저 하나님은 이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셨다. 복이 있는 인생과 그렇지 않는 인생은 차이가 있다. 복이 없는 인생은 통계와 산술에 근거하여 산다. 그러나 복이 있는 인생은 하나님 나라의 경제를 산다. 예수님께서 빈들에 가셨을 때 많은 무리들이 먹지도 못한 채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계산하기 시작했다. 빌립은 각 사람이 조금씩 먹으려해도 200데나리온, 즉 노동자의 200일 품삯에 해당하는 돈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안드레는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많은 사람을 먹이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축사하셨다. 그리고 나눠주셨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을 때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음이 있었다. 손에 떡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것을 축복하셨는가가 중요한 것이었다. 우리의 소유,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인생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 손에 있는 떡으로는 한정된 사람만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축복하시면 기적이 일어난다. 200백만이 넘는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것은 산술적으로 견적이 나오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식탁을 베푸시고 날마다 초자연적인 축복을 주시기 원하셨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삶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은 또한 너를 지키기 원하신다고 하셨다. 지킨다는 히브리어 샤마르는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친다’는 말이다. 목자는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해 가시로 된 울타리를 쳤다. 그리하여 늑대나 사나운 짐승으로 부터 양들을 보호했다. 축복은 보호받아야 유지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노리는 적들이 있다. 베드로 사도도 경고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는 성도들의 행복을 깨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자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을 선언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의 울타리를 스스로 걷어 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가 없다면 적의 공격에 노출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켜주심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아야한다. 그리고 그 지켜주심의 복이 있기를 간구해야 한다. 신 32:9-10,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하나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지켜주시는 은혜가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한다.
민 6: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얼굴을 비춘다는 것은 호의를 베푼다는 뜻이다. 반면 얼굴을 숨긴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한다. 신 31:18,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얼굴을 비춰주시는 삶이 되길 원한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는 인생처럼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막히지 않게 해야 한다. 축복을 방해하는 것을 제거해야 한다.
무엇이 축복을 방해하는가? 가장 먼저 우상숭배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부른다. 신 27: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두번 째,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다. 렘 17:5-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세번째로 남을 비방하는 사람이다. 약4:11-12,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는 행위다. 관계 속에서 비방하는 말이 있을 때 축복은 막힌다.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은 상대방으로부터 악과 욕을 받았을 때 오히려 복을 빌라고 한다. 그것이 복을 유업으로 받는 행위라고 한다.
축복과 저주에는 부메랑효과가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0:12-13,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그래서 누구를 만나거나 방문할 때 축복하는 것이 남는 장사이다. 그 사람이 받을 만한 사람이면 그 축복이 그에게 임한다. 그러나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축복은 나에게로 돌아온다. 저주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이 그 저주를 안 받는다면 그것은 저주를 한 사람에게 돌아온다. 축복과 저주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실제이다. 축복의 말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민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들게 될까? 그것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부모가 자녀를 들어서 기쁨으로 바라보는 그림이다. 아이는 자신을 향해 든 부모의 얼굴을 볼 때 가장 큰 기쁨과 샬롬을 누린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가 되도록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날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한 것이다.
성전이 파괴되면서 제사장도 사라졌다. 이 제사장의 축복은 이제 유효기간이 다한 옛의식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복주시기 원하시는 분임을 알아야한다. 그것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만들 때부터 하나님의 소원이셨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 이상의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세상 모든 만물에 임하길 원하셨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이 땅에 저주가 들어왔다. 그로 인해 홍수심판이 불가피했고,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가길 원하셨다. 창 9:1-2,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러나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바벨탑을 쌓았다. 축복은 인류의 불순종으로 다시 막혔다.
하나님은 순종하며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사람을 찾으셨다. 그 사람이 아브라함이었다. 창 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그가 복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인생이되어야 복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 순종의 댓가를 지불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축복을 준비하시는 분이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대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책임감을 갖고 따르는 자들에게 축복하신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이 그랬고, 야곱이 그랬다. 창 22:15-18,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아브라함의 순종은 이삭의 순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이삭에게 전달되었다.
이삭이 받은 축복은 장자권을 소중히 여겼던 야곱에게 이어졌다. 이삭이 야곱을 이렇게 축복한다. 창 27:28-30,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야곱의 축복은 12아들에게 남긴 축복을 통해 전달된다. 그리고 그들은 12지파 민족이 되어 광야에서 제사장 나라로 세워진다.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은 열방에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아론 이후 제사장을 통해 날마다 제사장의 축복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나라로 열방에 축복을 전달하는 사명에 실패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실패를 역전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다. 그리고 저주가 다시 축복으로 바뀌게 하셨다. 갈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제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대상이 된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서 받는 물질적인 축복을 넘어서는 것이다. 자식이 잘되고 땅을 차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늘의 속한 영적인 축복까지 축복의 영역이 확장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신약의 교회가 이 땅의 축복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는 늘 축복에 목마르다. 이왕이면 땅에서도 잘되고 영적인 축복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축복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축복을 전달하는 책임이다. 신약성경은 교회인 우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제사장이라면 우리는 제사장의 축복을 선포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축복은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의 경계를 넘어서서 선포되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것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엡 2:16-18,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자들이다. 우리의 자녀들을 축복하고, 이웃들을 축복하고, 열방을 축복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제사장들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때 하늘의 축복이 열린다. 산술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하나님이 축복으로 기적의 역사가 된다. 우리가 손을 들어 축복할 때 하나님의 지키시고 그의 얼굴빛을 비춰주시는 역사가 있게 된다. 축복하는 자는 결코 손해보거나 소진되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축복하는 자나 축복을 받는 자 모두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분이시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 축복을 이 세대에 전달하는 책임을 감당하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6월 18일 이익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