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민8:1-12:16/ 슥2:14-4:7/ 눅17:11-18:14
토라포션 33 산 제물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 세워 여호와께 요제로 드릴지니라 [14] 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15] 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16]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17] 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18] 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19]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민 8:13-19(
모순 (矛盾)이란 말이 있다. 한자로 창 모(矛)에 방패 순(盾)자다. 초나라에 무기를 파는 상인이 있었다. 창 하나를 들어보이며 “이것은 세상의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입니다”라고 광고했다. 이어 방패 하나를 들어보이며 “이것은 어떤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입니다”라고 광고했다. 구경꾼 한 사람이 질문했다. “그런 그 창으로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됩니까?” 상인이 대꾸를 하지 못했다. 여기서 모순이라는 말이 나왔다. 두 개의 명제가 동시에 참이 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구경꾼의 질문에 가장 좋은 대답은 뭐였을까? ‘궁금하면 둘다 사서 찔러 보라’는 것이다.
오늘 설교 제목이 ‘산 제물’이다. 제물은 죽어야 제물이 된다. 그 제물이 살아있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그런데 모순처럼 여겨지는 ‘산 제물’의 실체가 있었다. 그것이 레위인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산제물이 되었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장자로 여기셨다. 애굽에 있던 그들을 빼내어 하나님을 섬기는 장자 민족이 되게 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출 4:22-23,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장자를 내보내지 않는 애굽의 바로에게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장자를 죽이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장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전체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장자의 죽음이라는 대속이 필요했다. 출애굽이 있었던 밤 애굽의 전역에서는 장자의 죽음으로 인한 통곡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집에는 장자의 죽음이 넘어갔다. 장자를 대신해서 죽은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애굽 전역에 임한 장자의 죽음을 대속하는 피였다. 어린 양의 피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운명이 바로 장자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었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출 13:2,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장자는 가족을 대표하는 사람인데, 장자가 내 것이라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선포이다. 그런데 본격적인 광야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장자를 대신해서 레위지파를 세우신다. 민 3:12-13,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스라엘 장자들을 대신하여 한 지파 전체를 대신 구별하여 세우신 것이다.
인구조사를 통해 계수된 레위지파의 수는 이만 이천명이었다. 그리고 일개월 이상된 모든 장자의 수는 이만 이천이백칠십삼명이었다. 273명이 모자랐다. 하나님은 이 273명의 숫자를 채우기 위해 5세겔의 속전을 내게 하셨다. 민 3:46-47,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칠십삼 명이 더 많은즉 속전으로 [47] 한 사람에 다섯 세겔씩 받되 성소의 세겔로 받으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자 이제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는 대속물로 세워진 것이다.
오늘 토라포션에는 레위인들을 이스라엘 장자를 대신하여 요제로 구별하여 세우는 장면이 나온다. 먼저 그들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한다. 민 8:7,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하게 하되 곧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에게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하게 하고” 레위인들은 머리카락과 온 몸의 털을 삭도로 밀었다. 어딜가도 저 사람들은 레위인이구나 확실이 표시가 나도록 구별되었다.
이어 그들을 위한 속죄제사가 드려졌다. 민 8:8, “또 그들에게 수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그 소제물로 가져오게 하고 그 외에 너는 또 수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가져오고” 수송아지 한마리는 번제로, 다른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드려진다. 번제는 수송아지가 불태워져 하나님께 드려진 것과 같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헌신하겠다는 의미로 드려지는 제사다. 속죄제사는 그들의 죄를 사하는 제사다. 죄가 해결되지 않은 채 하나님이 게신 성막에서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레위인을 요제로 흔들어 바치는 장면이 나온다. 민 8:10-11, “레위인을 여호와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안수하게 한 후에 [11]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을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그들에게 여호와께 봉사하게 하기 위함이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레위인들을 안수했다. 아마 장자들이 그들을 안수했을 것이다. 안수라는 것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자신을 대신하여 희생되는 제물과 동일시 하는 행위다. 그 제물이 동물이라면 그 짐승은 안수한 사람의 죄를 쓰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장자들이 레위인을 안수했다는 것은 레위인이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제물로 바쳐진 존재라는 선언이다. 그 후 아론은 레위인을 흔들어 바치는 요제로 여호와 앞에 드렸다.
요제는 화목제물의 일부를 흔들어 바치는 제사다. 레 7:30-31, “여호와의 화제물은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지니 곧 그 제물의 기름과 가슴을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가슴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31] 그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사를 것이며 가슴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 것이며” 요제로 드려진 화목제물의 일부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갔다. 레위인들이 요제로 드려졌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바쳐졌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몫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민 8:19,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그래서 모든 레위인 중 30세에서 50세까지 팔천오백팔십명이 제사장에게 주어져 그들의 관할 하에 성막 봉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의 봉사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속죄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은 성소를 가까이 할 때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레위인의 정체성은 한마디로 산 제물(living sacrifice)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기에 자신에 대하여는 죽은 자들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서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겼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레위인을 보면서 자신들이 누구인지 확인해야 했다. 인생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 레위인들의 삶이 사실은 자신들이 살아야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는 대속제물로 살았던 것이다.
장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대신하여 어린 양의 대속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여 광야에서 레위인들의 대속이 있었다. 그리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온 인류를 대신하여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있었다. 하나님의 장자이신 그분이 산 제물로 우리를 위해 바쳐진 것이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한 몸으로 받는 대속물이 되셨다. 그 아들의 희생을 통해 우리는 죽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통해 하늘의 장자들의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히 12:22-24,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대속의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산 제물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한 분도 예외 없이 이 대속의 은혜를 누리게 되길 축원한다.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에 다 참여하는 자가 되길 축원한다.
사도 바울은 신약 백성인 우리들에게 도전한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산 제물로 사는 삶은 레위인만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만의 삶이 아니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난이 아니다. 제물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죽는 삶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죽으면 고통이 끝나겠지만 살아서 제물이 된다는 것은 고통을 현재진행형으로 감당하는 삶이다. 십자가는 제물이 산 채로 달리는 장소다. 그래서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다.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다. 기도 끝에 예수님은 ‘내 원대로 마옵시오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하셨다. 이미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린 것이다. 자신에 대하여 죽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헌신한 것이다. 그런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기꺼이 목을 드리우는 장소가 되었다. 가장 기꺼운 순종과 가장 영화로운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되었다.
사도 바울 역시 스스로 산 제물이되는 삶을 살았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에 자신을 죽인 제물이지만 죽지 않고 살아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산 제물’로 산 것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것이 산 제물로 사는 바울의 고백이었다.
우리에게 산 제물로 살라는 바울의 권면은 로마서 12장, 교회의 몸을 세우라는 상황속에서 주어졌다. 제물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를 대신하여 고통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롬 12:3-5,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한 몸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각자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상처받는다는 말을 한다. 교회니까 상처받는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몸으로 모였기에 상처받는 일이 생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상처받는다는 것은 내가 죽지 않았다는 말이다. 상처를 느낀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겟세마네로 가야 한다. 거기서 나를 산 제물로 드리는 기도를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기꺼운 순종으로 십자가에 올라야 한다. 그리고 바울처럼 그 십자가에 나를 못박아야 한다. 그리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버리고 믿음의 분량대로 내 몫의 헌신을 해야 한다. 각자 몫의 헌신이 있을 때 몸이 세워지는 것이다. 내가 받지 않아도 되는 고통이지만 누군가를 대신하여 그 고통을 담당하게 된다면 그것은 산 제물로서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이다.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억울하게 내가 제물이 될 수 있다. 자식들 때문에 우리는 희생제물로 살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영화로운 영적 예배가 되는 것이다. 내가 죽고 기꺼이 제물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리시는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자기를 PR하는 이 시대에 살았으나 자신을 제물로 드리며 죽은 자처럼 사는 것은 세상 사람은 알 수 없는 모순이다. 그러나 우리의 제물된 삶을 통하여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은 온전히 세워진다. 하나님이 장자를 세우시는 구원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이 살리시는 생명의 역사가 여러분의 제물된 삶을 통하여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 몸된 교회와 여러분의 모든 관계 가운데 일어나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6월 25일 이익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