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민13:1-15:41/ 수 2:1-24/ 막 10:1-45
토라포션 34 정탐의 정석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18]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 곧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와 [19]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20]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담대하라 또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민 13:17-20)
수학의 정석이라는 책이 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면 모두 사서 공부했던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과 별로 친해지지 못했다. 수학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수학과 친해지지 못한 사연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서대문중학교는 18반까지 있었다. 우리반은 4층에 있었고 화장실 건물은 각 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실 건물 바깥 지상에 따로 있었다. 짧은 쉬는 시간 동안 화장실 다녀오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아이들이 화장실 대신 4층 위 옥상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해결하고 오는 것이었다. 그 짜릿하고 경제적인 일에 나도 동참했다. 그러나 그 일이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밑에 2학년 17반 교실로 많은 양의 오줌이 새버린 것이다. 그 반 담임은 여자 기술선생님이었다. 학생들을 툭하면 플라스틱 자로 손가락 등을 때리던 분이었다. 그 분은 교무회의에서 이 사실을 알렸고, 그날 부터 학생주임은 오줌을 싼 사람들 검거에 나섰다. 그 날부터 한 사람 두 사람씩 불려나갔다. 일주일이 일년 같았다. 한 주가 지난면서 수사가 끝나는 줄 알았다. 거의 마지막날 수업 중 문이 열리더니 내 이름을 불려졌다. “이익환 나와!” 불려가 보니 한 35명이 도서관에 모여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 정학을 받았다. 그리고 매일 도서관에 모여 반성문을 썼다. “다시는 옥상에서 싸지 않겠습니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일주일 후 수학 수업시간이었는데, 수학이 갑자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후로 수학이 싫어진 것이다. 나는 미적분을 다 아는 것이 수학의 정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학의 정석은 더하기, 빼기, 나누기, 곱하기라고 생각한다.
오늘 토라포션은 가나안 정탐꾼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정탐의 정석’이라는 제목으로 수학적으로 풀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애굽을 출발한지 2년이 되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란광야 북단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다. 그곳은 브엘세바에서 남서쪽으로 80km 떨어진 곳이었다.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의 도착한 것이다. 가나안 정탐은 누가 원했던 것일까? 하나님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일까? 민수기 13장을 보면 가나안 정탐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전 상황에 대한 정보가 신명기에 나온다.
신 1:20-22,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너희가 이르렀나니 [21]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22]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
하나님의 뜻은 이미 이 땅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기로 약속한 땅이었기에 올라가서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먼저 정탐하기 원했다. 가나안 일곱 족속과의 전쟁을 앞두고 전쟁이 두려웠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적의 전력을 알아보기 위해 정탐을 해보자고 모세에게 요구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를 허락하셨고 지파별 대표 12명을 뽑아 보내게 하신다.
자 이제 정탐의 정석 더하기 편을 시작하겠다. 정탐꾼 중 여러분이 아는 사람의 이름을 대보라. 여호수아와 갈렙일 것이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의 원래 이름이 아니다. 원래 이름은 눈의 아들 호세아다. 민 13:16, “이는 모세가 땅을 정탐하러 보낸 자들의 이름이라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 불렀더라” 왜 모세는 유독 한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불렀을까? 호세아(הושע)는 ‘여호와가 구원하셨다’란 뜻이다. 여호수아(יהושע)는 ‘여호와가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요드(י)가 붙으면서 미래형이 된 것이다. 탈무드에 의하면 모세는 대부분의 정탐꾼들이 불안정하고 충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겸손하고 충실했던 호세아가 그들에게 휘둘릴까봐 우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에 점 하나를 더한 것이다. 그런데 요드는 야훼의 첫 글자이기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문자다. 즉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반드시 먼저 와야 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그의 이름에 요드를 더했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원래부터 강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어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준비시키시면서 모세에게 당부한다. 신 3: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를 담대하게 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자크’이다. 용기를 북돋아주고 기가 꺾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를 강하게 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마츠’이다. 방심하지 않게 하고 마음을 무장하게 하라는 것이다. 원래부터 강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당부가 필요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에 하나님을 의미하는 요드가 더해지면서 그는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정탐의 상황에서도 늘 하나님이 앞서 행하실 것을 마음에 새겨 두었을 것이다.
모세가 죽은 뒤에 하나님은 직접 여호수아를 격려하신다. 수 1:8-9,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 하나님의 말씀이 더해진 인생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여호수아가 강해진 이유였다. 그는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늘 하나님이 앞서 행하심을 바라보는 인생이 된 것이다. 그래서 정탐의 정석 첫번째 공식은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을 더하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정체성에 하나님을 더할 때 강해지는 것이다. 여러분의 인생 여정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더해질 때 여러분은 좌로나 우로 치우심 없이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정탐의 정석 두번째는 빼기다. 12명의 정탐군들은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그들이 본 것을 온 회중 앞에서 보고한다. 민 13:25-29,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26]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27]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28]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객관적인 보고였다.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열명의 정탐꾼들은 갈렙의 말을 무시하고 주관적인 해석을 늘어놓는다. 민 13:31-33,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왜 이런 해석의 차이가 생겼을까? 갈렙은 두려움을 뺀 사람이었다. 그러나 열명의 정탐꾼은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는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합리적인 사고를 방해한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광야에서 군대로 조직된 60만 대군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길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애굽의 군대도 무너짐을 경험했던 민족이었다. 객관적인 전력이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거인 아낙자손만 보였다. 그들을 묵상하며 두려움을 키웠다. 두려움이 주는 환타지를 따라가 보라. 끔찍한 결론을 마음속에 그리게 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결국 쫄아버린다. 그들은 스스로 메뚜기 같이 여겼고 적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가나안 족속들이 떨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여리고에 살던 기생 라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수 2:9-11,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열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족속들이 두려워 떨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 민족의 겉모습만 보고 그 앞에서 두려워 떨었던 것이다. 두려움의 보고는 삽시간에 전염되었다. 온 회중이 밤새 통곡하며 울부짖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고 그들을 인도해내신 하나님까지 원망했다. 민 14: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두려움은 그동안의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게 한다. 그동안 그들이 간직해왔던 믿음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그들의 결론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이 가장 쉽게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뒤엎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정탐의 정석 두번째 공식은 두려움을 빼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조사해야 한다. 상황이나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다. 두려움을 뺄 때 뒤에 계신 하나님이 보인다. 흔히 두려움 때문에 어떤 일을 서둘러 결정할 때가 있다. 그러나 두려움이 남아 있을 때는 결정을 내려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계획과 반대로 가는 결정이 되기 쉽다. 두려움은 우상이다.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과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일 때까지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스며든 두려움을 빼 내야 한다.
정탐의 정석 세번째는 나누기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 앞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을 나누었다. 민 14:6-9,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수학에서 통계는 현상을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데 사용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통계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통계가 오히려 믿음의 역사를 방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현상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그 믿음을 나누며 그 믿음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통해 진행된다.
히브리서 3장은 광야세대를 통한 교훈을 이렇게 전한다. 히 3:12-14,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믿지 않을 때 악한 마음을 품게 된다. 악한 마음의 원어의 뜻은 ‘억눌려 지친 마음’이다.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억눌리고 지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갈 위험이 있다. 광야의 백성들은 2년의 시간동안 나름 지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단 한번의 부정적인 보고로 믿음을 상실한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오직 애굽에서 구원을 시작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정탐의 정석 세번째 공식은 믿음을 나누라는 것이다. 요즘 많은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집에서 엄마 아빠가 맨날 교회 욕을 하는데 그런 교회에 다닐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나 교회 다니는 분들이 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믿음의 평가가 필요하다. 그 믿음 말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분의 믿음의 나눔을 통해 믿음의 세대들이 일어나길 축원한다.
정탐의 정석 마지막은 곱하기다. 오늘 토라포션은 이 말씀으로 끝난다. 민 15:37-4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4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이스라엘 거리에서 유대인들 옷에 치렁치렁 달린 실들을 보았을 것이다. ‘찌찟’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민수기의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옷에 찌찟을 달고 다니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청색은 히브리어로 테켈렛이다. 왜 청색일까? 민수기서 4:5절을 보자. 민 4:5-6, “진영이 전진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들어가서 칸 막는 휘장을 걷어 증거궤를 덮고 [6] 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여기서 순청색이 테켈렛이다. 광야에서 궤를 이동할 때 언약궤를 최종적으로 덮는 것이 순청색 보자기다. 광야에서 진영이 전진할 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는 순청색 보자기에 쌓여 이동했던 것이다. 그래서 찌찟에 있는 테켈렛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동했던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와 함께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보며 그 분이 하신 말씀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히브리원어로 다시 해석하고자 한다.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וְלֹא-תָתוּרוּ אַחֲרֵי לְבַבְכֶם, וְאַחֲרֵי עֵינֵיכֶם, אֲשֶׁר-אַתֶּם זֹנִים (베 로 타투르 아하레이 레바베켐, 베 로 아하레이 에이네켐 아쉘 아템 자님). 이 말을 직역하면 ‘너희의 마음을 따라, 그리고 너희를 간음하게 하는 눈을 따라 정탐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이다. ‘정탐하다’가 히브리어로 ‘라투르’다. 그 미래형이 ‘타투르’다. 오늘 토라포션의 정탐이야기는 찌찟을 보며 너희 마음대로, 너희의 눈으로 보는대로 정탐하지 말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 결혼한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빼앗겼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들 마음을 따른 해석과 눈으로 본 현상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졌다. 민 14:22-23,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아브월 9일에 있었다고 한다. 아브월 9일. 이 날은 BC 586년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날이다. AD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탐의 마지막 공식은 기억을 곱하라는 것이다. Multiply… 증대시키라는 것이다. 광야의 세대, 이전 조상들이 어디서 실패했는지 기억해내라는 것이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에 품는 것을 통해 상황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것은 행동으로 옮겨진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본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만을 따라 행동할 때 죄를 짓기가 쉽다.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하다. 겉으로 드러난 표면의 현상만 보는 것은 우리를 전진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것으로 현상을 해석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전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나안 정탐 이야기는 너무나 슬픈 사건이다. 믿음이 없어 한 세대가 사라져버린 이야기다. 하나님나라는 오직 믿음의 세대가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이 사라지는 세대에 다른 전부를 놓치더라도 우리는 믿음을 잃어선 안 된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주는 시간들을 계속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직 가보지 않았고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정탐의 정석을 기억하기 바란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이 더해진 삶이 되길 바란다. 두려움을 다 뺀 삶이 되길 바란다. 믿음만을 나누는 삶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기억을 곱하는 삶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광야와 같은 인생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는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7월 2일 이익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