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6월 17일 설교 이익환 목사
여호수아서 강해 7 ‘82년생 김지영’과 슬로브핫의 딸들
“헤벨의 아들 길르앗의 손자 마길의 증손 므낫세의 현손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딸뿐이요 그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 [4] 그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지도자들 앞에 나아와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우리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라 하셨다 하매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들에게 그들의 아버지 형제들 중에서 기업을 주므로 [5] 요단 동쪽 길르앗과 바산 외에 므낫세에게 열 분깃이 돌아갔으니 [6] 므낫세의 여자 자손들이 그의 남자 자손들 중에서 기업을 받은 까닭이었으며 길르앗 땅은 므낫세의 남은 자손들에게 속하였더라” (수 17:3-6)
‘82년생 김지영’이란 소설이 화제다. 주인공이 어린시절부터 학창시절,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차별을 담담하게 그린 소설이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1982년에 태어난 여성 중에 가장 많은 이름이 ‘지영’이고, 가장 흔한 성이 ‘김’씨라 책제목을 ‘82년생 김지영’으로 정했다고 한다. 여성을 위한 책이지만 그래서 더욱 남자들이 읽어야 할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지금은 육아에 힘쓰고 있는 우리 여자 집사님들… 그 분들의 남편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란 생각이 든다.
오늘 설교 본문에는 다섯 명의 여성들이 나온다. 말라, 노아, 호글라, 밀가, 디르사.. 슬로브핫이라는 사람의 다섯 딸들의 이름이다. 당시 수에도 치지 않았던 여성들의 이름이 3400년 전의 성경에 어떻게해서 등장한 것일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 다섯 명의 여성들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민수기서 26장, 27장에서다. 광야에서 두번째 인구조사를 마치고 난 직후인 기원전 1410년경의 일이다. 민수기는 영어로 Numbers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를 조사한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다. 첫번 째 인구조사는 시내광야에서 있었다. 그 때는 출애굽한 세대의 총수를 파악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했다. 20세 이상 싸움에 나갈만한 남자들의 숫자가 육십만 삼천오백 오십명이었다. 두번째 인구조사는 요단강 근처 모압 평지에서 이루어진다. 출애굽 1세대가 불신앙으로 죽고난 뒤 살아 남은 다음 세대의 숫자를 조사한 것이다. 인구조사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될 가나안 정복을 준비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또한 정복한 땅을 지파별로 나누어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모두 육십만 천칠백 삼십명이었다.
당시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아버지의 기업은 아들에게만 상속되었다. 그것이 상식이자 전통이었다. 그런데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이 이 상식과 전통에 문제를 제기한다. 아직 가나안 땅에 발도 들이기 전이었다. 가나안 전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리란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땅이 분배될 때 자신들도 그 땅을 기업으로 받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회막문에 있는 모세와 대제사장 엘르아살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지휘관들과 온 회중 앞에서 당당히 자신들의 원함을 요청한다.
민 27:3-4,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로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4]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그들의 아버지는 광야에서 죽었지만 당시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의 무리에는 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아버지는 정탐꾼들의 보고에 놀라 애굽으로 돌아가길 원하며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죽은 출애굽 1세대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 아버지 슬로브핫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만약 아들들이 있었다면 그 아들들이 당연히 가나안 땅에서 자신들 몫의 기업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 아버지의 이름은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었을 것이다.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은 아버지의 이름이 지파에서 끊어지지 않기를 바랬다. 그 이유로 자신들에게도 기업을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지혜로운 요청이었다.
이제 모세가 온 회중 앞에서 판결을 내어야 했다. 모세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당시 남성들은 이 딸들의 요청에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모세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그들을 위한 판결을 쉽게 내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 민 27:5,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아뢰니라” 모세는 그 사연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어떤 판결이 나왔을까?
민 27:6-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7]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8]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딸에게 돌릴 것이요 [9] 딸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10] 형제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아버지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11] 그의 아버지의 형제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주어 받게 할지니라 하고 나 여호와가 너 모세에게 명령한 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판결의 규례가 되게 할지니라”
하나님은 융통성이 있는 분이시다. 그 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규례가 만들어졌다. 하나님이 ‘오케이’하신 것이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더이상 논의할 필요도 없었다.
하나님의 승인이 떨어졌지만 이것이 실제로 시행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민수기 36장에서는 새로운 이슈가 제기된다. 므낫세 지파의 수령들이 모세에게 문제 제기를 한 것이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다른 지파 남자들에게 시집가면, 그들에게 준 땅이 다른 지파의 땅이 되버린다는 것이었다. 모세는 이 문제를 가지고 또 고민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난 결론을 제시한다.
민 36:6-7,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대한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종족에게로만 시집갈지니 [7]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니”
슬로브핫의 딸들은 공동체의 선을 위해 같은 지파 내의 남자들과만 결혼해야 했다. 어쩌면 그들은 다른 지파에서 봐두었던 멋진 오빠들과 마음의 작별을 해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슬로브핫의 딸들은 권위자의 결정에 순종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숙부의 아들들과 결혼한다.
그리고 7년의 시간이 흐른다. 그간 모세는 요단강 동편에서 죽고 여호수아가 새로운 세대를 이끌고 정복전쟁을 수행한다. 정복전쟁이 끝나고 땅분배가 시작된다. 요단강 서쪽 므낫세 지파의 제비를 뽑을 때 이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이 다시 등장한다. 그들은 대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지도자들 앞에 나아간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자신들에게도 기업을 주라고 하신 7년 전의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마침내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자 자손들로서는 최초로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게 된다.
한 세대는 가고 새로운 세대는 늘 일어난다. 이전에 당연시 되었던 전통이 새로운 세대에는 불필요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러한 역사의 부침을 경험하는 우리들에게 슬로브핫의 딸들의 이야기는 어떠한 교훈을 주고 있을까?
먼저 믿음이 상식과 전통을 뛰어 넘는다는 것이다. 당시 전통으로는 여자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슬로브핫의 딸들은 모든 것이 남자들 중심으로 진행되던 그 때에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부모세대들이 왜 실패했는지를 알았다. 부모세대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모세대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다수의 뜻을 따랐다. 다수가 불안해 할 때 같이 불안해하며 원망했다. 부모세대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기보단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슬로보핫의 딸들은 부모세대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았다. 그녀들은 부모세대들의 실패를 반복하길 원치 않았다. 그녀들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실 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여자 자손들은 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들은 믿음으로 그 땅을 기업으로 받고 싶다는 소원을 말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기뻐하셨다. 그리하여 당시 상식과 전통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셨다. 믿음은 상식과 전통을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두번 째, 모든 판결의 최종 권위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옳아야 옳은 것이다. 세대가 지나면서 요즘 정의와 인권을 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여성의 권익를 위한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들도 많아진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옳아야 옳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슬로브핫의 딸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여성들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외치는 페미니즘 스토리가 아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단순히 여성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가족과 지파와 공동체 전체의 선을 위해 이야기 했고 행동한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전통이 진부하다고 비판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유지하고 자랑스러워하는 핵심가치에 자신들의 상황을 호소한 것이다. 그것은 가족과 지파의 씨가 끊어지지 않고 세대를 통해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옳다고 보신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세대가 끊어져 불이익과 어려움에 처할 수 있는 여성들을 대변하게 되면서 당시 세대의 여성들을 위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세번 째, 새로운 세대에는 가치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적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대간의 가치는 늘 충돌한다. 부모세대의 가치와 자녀세대의 가치가 다르다. 직장 상사들이 일하는 방식과 신세대 직원들이 일하는 방식이 다르다. 한국 사람이 일하는 방식과 유대인들이 일하는 방식이 다르다. 다른 것이지 누가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치의 충돌은 갈등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반드시 서로 타협하고 이해하는 지점이 필요하다.
새로운 세대는 기존의 세대와는 다르다.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 오늘 본문에서 새로운 세대로 대표되는 슬로브핫의 딸들은 옛세대들의 권위를 존중한다. 옛세대가 옛날 사람이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과 가치를 시대에 뒤떨어진 옛날 것이라고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재해석하면서 새로운 세대들에게 필요한 합리적인 타협점을 요구하는 담대함이 있었다. 그리고 세워진 권위에 대해 존중하며 따르려는 순종의 스피릿이 있었다.
반면 모세나 옛 세대 지도자들은 신세대들의 요구가 인생을 모르는 철없는 것들의 주장이라고 일축하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었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씨름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전통과 상식에 갇혀있는 분이 아님을 발견했다. 하나님께서 작은 자의 신음과도 같은 요청을 들으시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결정을 들으면서 새로운 세대들이 던지는 질문과 요구에는 기존의 전통과 가치을 넘어서는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우리 일상의 문제들로 돌아와 보자. 78년생 조남주 작가는 ‘82년생 김지영’이란 소설을 통해 우리 사회에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여성들이 여자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 늘 던졌던 질문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질문들이 한국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낼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질문을 들은 교회와 한국사회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는 것을 가지고 사회의 흐름으로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 전체 공동체의 선을 위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인생 살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말을 하게 된다. 이전 세대도 그런 말을 했고, 지금 세대도 그런 말을 내뱉는다. 광야와 같은 인생,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는 시대에서 우리는 이왕이면 고생 안하고 편하게 살 길이 없는지 기웃거리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바울은 기도했다.
엡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 그래야 상식과 전통을 뛰어넘어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에 이르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믿음으로 살게 된다. 우리 자녀들이 공부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한다. 일반적으로 공부만 잘하는 사람은 기존의 상식과 전통, 가진 자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머리를 쓰며 살기 쉽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기 위해 살게 된다. 바라기는 우리가 받고 누리게 될 영원한 기업을 위해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