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6월 24일 설교 이익환 목사
여호수아서 강해 8 자기 부정의 길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1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16]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17]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18]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수 17:14-18)
미래학자인 최윤식이 이런 말을 했다. “삼성 같은 거대 기업의 최대 약점은 인재, 기술, 자본, 마케팅 능력의 부족이 아니다. 바로 ‘자기 부정’의 어려움이다. 현재 삼성의 조직과 문화에서는 자기 부정이 어렵다. 유일한 길은 DNA와 문화가 완전히 다른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시키는 것뿐이다.” 잘 나가는 기업,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있다. 그래서 자기부정이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닌가 싶다.
오늘 본문에는 자기부정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파가 나온다. 요셉의 자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다. 이들은 조상 요셉 덕분에 화려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다른 지파들과 갈등을 일으킨다. 한마디로 자기부정이 안되어 겪는 어려움이었다. 그들의 어려움이 무엇이었는지 함께 살펴보며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유다지파를 이어 요셉자손들은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땅을 분배 받고 난 뒤 불만을 터뜨린다. 더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 수 17:14,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사실 요셉자손은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이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과거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아 애굽의 총리까지 된다. 그리고 그가 총리가 되어서도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먹여 살렸다. 아마도 다른 형제와 그 자손들은 애굽에서 사는 내내 요셉지파에게 찍소리도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과거가 있었기에 요셉지파는 430년이 지나 이제 땅분배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큰소리 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그 자손들에게 복을 주신 것은 사실이었다. 야곱은 열두 아들들에게 예언과도 같은 유언을 남겼다. 그 중 요셉에 관한 예언이다. 창 49:22, 26,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이 유언처럼 요셉은 형제 중에 뛰어난 자가 되었다.
모세 역시 그가 죽기 전 요셉지파를 향해 예언과도 같은 유언을 남겼다. 신 33:13,16, “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16]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이 유언처럼 요셉지파는 그 형제지파 중에 구별한 자라는 칭호를 받는다.
‘형제 중 뛰어난 자, 형제 중 구별한 자’는 곧 요셉지파의 정체성이 된다. 요셉지파는 다른 형제들 중에 구별한 자가 되었기에 다른 지파들보다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여호수아에게 한 요셉지파의 말에는 ‘그들 자신에 대한 자긍심’으로 가득하다. 여기까지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또 다른 분깃의 땅을 원하는 그들의 요구는 잘못된 것이다.
왜 잘못된 것일까? 광야에서 열두 지파를 나눌 때 요셉 대신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의 지파로 들어 간다. 요셉은 야곱과 같이 족장 반열에 오르고, 그 아들들은 요셉의 형제들과 같은 반열로 올라가게 된다. 그래서 요셉자손은 이미 두 분깃을 차지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므낫세 지파의 절반은 이미 요단 동쪽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았다. 그리고 요단 서쪽에서 에브라임지파와 므낫세 나머지 절반의 지파사 각각의 땅을 기업으로 받았다. 이렇게 따지면 요셉자손은 이미 세 분깃을 받은 셈이다.
당시 에브라임지파는 32,500명이었다. 므낫세지파는 52,700명이었다. 이에 비해 유다지파는 76,500명, 잇사갈은 64,300명, 스불론은 60,500명, 단은 64,400명 이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다른 지파에 비해 더 적은 인원임에도 훨씬 더 많은 지역의 땅을 기업으로 받았다. 그리고 그것도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옥하고 비도 많이 내리는 골란고원과 이스르엘 평원이 있는 땅을 받은 것이다. 다른 일곱 지파는 아직 땅도 분배받지 못한 상황에서 이미 많이 받은 지파가 더 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잘못된 요구다.
이 요구를 받은 여호수아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난감했을 것이다. 그 역시 에브라임 지파였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최고권력가로서 자신의 친족지파로부터 청탁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반응한다. 수 17:1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여호수아는 그들이 큰 민족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큰민족이라면 스스로 삼림지역에 올라가서 개척하라고 요구한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자기부정을 요구한 것이다. 스스로 올라가 개척하려면 기득권을 주장하는 자신들의 요구를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개척하라’는 원어의 뜻은 ‘창조하라, 나무를 자르라’는 의미가 있다. 나무를 자르고 숲을 개간하여 버려진 땅을 사람 사는 공간으로 창조하라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말에 요셉자손이 대답한다. 수 17:16,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자신들을 큰 민족이라고 말하던 요셉자손들이 갑자기 약한 모습을 보인다. 이유는 가나안 족속에게는 철병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큰 민족인데 땅이 좁다고 불평하던 그들은 이제 정복할 가나안 족속이 철병거가 있다는 이유로 개척하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철병거를 가진 가나안 족속을 이긴 경험이 있다. 수 11:9,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로 살랐더라” 요셉자손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승리한 전쟁의 기억을 잊었던 것이다. 그들은 철병거가 없는 자신들의 현실을 더 크게 바라본 것이다.
이에 여호수아는 요셉지파를 따뜻한 말로 격려한다. 수 17:17-18,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18]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여호수아는 큰 민족이라고 자처했던 요셉지파에게 ‘너는 큰 민족’이라고 세워준다. 그리고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고 믿음의 말을 한다. 여호수아는 요셉자손에게 또 한번의 자기부정을 요구한 것이다. ‘너는 큰 민족이요’라라고 말하는 여호수아의 비전을 취하려면 이들은 ‘내가 큰민족이 되었거늘’이라고 말했던 과거의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 이들이 여호수아가 제시한 승리의 비전을 취하려면 ‘우리는 철병거가 없기 때문에 약하다’라는 나약한 자기 정체성을 부정해야 한다. 그 대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긴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요셉자손의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난다. 이들에게 더 다른 땅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여호수아가 제시한 자기부정의 길을 걸어갔을까? 자신들의 자만심과 잘못된 정체성을 버리고 스스로 개척하는 길로 갔을까? 성경의 기록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에브라임지파나 므낫세 지파는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않는다. 그들이 강성해진 후에도 가나안 족속들을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어 노역하는 종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개척 정신으로 살기보다 편안한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죽고 이어진 사사기 시대에는 더 심한 모습이 나온다. 에브라임지파가 사사 기드온에게 원망하는 장면이다. 삿 8:1,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기드온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삼백명만 데리고 미디안족속과 전쟁을 벌였다.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그런데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자신들과 상관없이 전쟁을 했다고 기드온을 책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쟁은 분명 모든 백성에게 공지한 전쟁이었다.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고 해서 만 명이 남았고, 하나님께서 그것도 많다고 해서 물을 손으로 떠서 먹는 삼백명만으로 승리하게 하신 전쟁이었다. 에브라임 지파는 그 전쟁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전쟁이었음에도 분별력없이 장자지파 행세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비슷한 장면이 또 나온다. 삿 12:1-3,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 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맷돌 손잡이를 ‘어이’라고도 한다. 맷돌에 음식을 갈려고 하는데 손잡이가 빠져있을 때 하는 말이 ‘어이가 없네’이다. 황당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입다가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이 말을 했을 것 같다. “어이가 없네.” 요셉자손들은 자기 부정의 길을 가지 못하고 계속 어이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결국 에브라임 지파 중심의 시대는 실로의 법궤가 빼앗기며 막을 내리게 된다.
자기 부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도 에브라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기 부정의 길을 갈 수 있을까?
먼저 불평을 버려야 한다. 우리 삶에 불평이 많아지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부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하나의 증거다. 요셉지파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제비뽑기에도 불만을 표시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을 내려놓지 않았기에 모든 상황이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둘째 자기 부정의 길을 가려면 우리는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 현실에서 불평과 불만이 많아지는 것은 잘못된 자만심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지파가 성공하고 큰 민족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복주신 결과였다. 그러나 요셉 이후 세대는 그 복을 자신들이 당연히 받고 누려야할 특권의식으로 발전시켰다. 잘못된 특권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잘 하는 말이 있다. ‘내가 누군데…’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자꾸 갈등구조를 만들어 낸다. 자기의와 자만심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점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사명의 길에서 멀어져가는 것이다.
셋째 자기 부정의 길을 가려면 우리는 나의 가치와 가능성을 하나님 앞에서 평가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과거에 얼마나 성공했는지에 달려있지 않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지금 얼마나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지에도 있지 않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정체성은 매일 매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지에 달려 있다. 요셉자손은 여호수아를 통해 ‘너희는 큰 민족이기 때문에 환경의 어려움과 상관없이 개척하라”는 하나님의 비전을 전해받았다. 요셉자손에게는 땅 몇 평 더 갖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존재가 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남들보다 더 잘살고, 남들보다 더 대접받고, 남들보다 더 큰 집에서 편안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은 성도의 부르심이 아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다시 나무를 자르고 길을 내는 삶을 사는 것, 개척자로 사는 것, 그것이 성도의 부르심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그 부르심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불평과 자만심이 있다면 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비전을 받기 위해 엎드려야 한다. 여러분이 자존심을 버리고 스스로 개척해야 할 영역은 어디인가? 바라기는 늘 개척자의 정신으로 이 땅에 길을 만들며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해내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에브라임은 참 어이없는 지파였다. 그러나 어이없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렘 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어이없는 자녀들이었다. 하나님이 쓰시고 싶어도 손잡이가 빠져있어 쓰실 수가 없었다. 그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진노 중에라도 사랑으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고자 마음이 들끓고 계시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완전히 항복해야 한다. 그래야 회복이 있는 삶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쓰임받는 인생이 된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함께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