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신 3:23-7:11/ 사 40:1-26/ 눅 22:13-38
토라포션 41 쉐마의 완성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 6:4-9)
유대인의 집집마다 집 문기둥에 메주자가 있다. 성문 벽에도 달려 있다. 유대인들은 이 문들을 드나 들 때마다 메주자를 만지며 입맞춤을 한다. 이 메주자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다. 우리가 읽은 신명기 6:4-9절 말씀이다.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아도나이 에하드” ‘쉐마 이스라엘’로 시작되는 이 신명기 말씀은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문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루 두 번 이 쉐마의 말씀을 암송한다. 바벨론 탈무드에 의하면 유대인 남자아이가 태어나 말을 배울 때 부모가 가장 먼저 가르치는 말이 쉐마 첫 절인 신명기 6:4절 말씀이라고 한다. 또한 죽기 직전 마지막 신앙고백으로 암송하는 것이 이 쉐마의 말씀이라고 한다. 유대인의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것이 쉐마의 말씀인 것이다. 이 쉐마의 말씀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우리에게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쉐마는 ‘듣다’라는 뜻의 히브리동사 ‘샤마아’의 2인칭 단수 명령형이다. ‘너는 잘 들으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들이 손주들에게 ‘엄마 아빠 말씀 잘 들어라’고 하실 때가 있다. 단지 리스닝을 잘 하라는 말이 아니다. 엄마 아빠 말에 순종하라는 말이다. 쉐마는 마음을 기울여 듣는 것이다. 듣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전체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한 개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는 명령이다.
모세는 이제 가나안 진입을 앞 둔 광야 2세대들에게 말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다” 이스라엘의 주인은 그들의 옛생활을 주관했던 애굽의 신이 아니었다.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의 축복을 위해 섬기는 가나안의 신들도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주인은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 한 분을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중요하다.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인가?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신인가? 하나님인가?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분명한 선포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단지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되시는 삶을 살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삶을 살게 된다.
모세는 이어서 말한다. 5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마음을 다하는 사랑이 뭘까? 마음이 나뉘지 않는 사랑이다. 에하드의 사랑이다.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여자도 사랑하는 사람을 세상에서는 능력있는 남자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에하드의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사랑은 나뉘지 않는 것이다. 에하드 하나님을 향하여는 마음을 다한 에하드의 사랑만 요구되는 것이다.
원래 사람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인생의 모든 상황들을 자신의 이기적인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생사의 좋고 나쁨에 대해 하나님 중심의 관점을 갖는다. 하나님이 인생의 진정한 주관자임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고난의 순간, 역경의 순간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놓치지 않는다. 내가 힘들다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삶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두번째 표현인 ‘뜻을 다한 사랑’은 뭘까? 본문에서 ‘뜻’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네페쉬’다. 숨을 쉬다라는 동사 ‘나파쉬’의 명사형이다. 숨을 쉬는 생명의 본질을 말한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분에서는 ‘목숨을 다하여’라고 번역되어 있다. 랍비 문헌에서도 이 말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게 바치는 마음가짐으로 해석했다. 여기서 유대교의 순교적인 신앙이 나왔다.
랍비 아키바에 대한 일화가 있다. AD 135년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는 바르코크바의 대로마항쟁을 진압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을 몰아내고 율법교육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유명한 랍비 아키바는 로마의 명령을 거부하고 토라를 가르쳤다. 로마군인들은 그를 잡아 고문하기 시작했다. 쇠로된 빗으로 그의 살가죽을 벗겨냈다. 그런데도 아키바는 쉐마를 암송하며 기뻐했다. 제자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질문했다. 아키바가 대답했다. “내가 한평생 쉐마를 암송하며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갈등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면 ‘뜻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을까 늘 고민했는데, 오늘에야 그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내가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는 ‘아도나이 에하드’를 외치며 그의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뜻을 다한 사랑은 결국 내 목숨을 드릴 수 있는 사랑을 말한다.
세번 째, 힘을 다한 사랑은 무엇일까? 힘으로 표현된 히브리어는 ‘메오드’다. 메오드가 붙으면 ‘매우’라는 뜻이 있다. ‘나임 메오드’는 ‘매우 반갑다’는 뜻이다. 그런데 메오드가 명사형으로 쓰이면 ‘힘, 능력, 부’를 뜻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과 함께 재력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은 너의 모든 소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해석한다. 그들은 인생이 물질 소유를 통해 확장되고 풍부해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 삶의 부요함를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려 한다. 재물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유대인들이 돈을 잘 버는 것 같다. 힘을 다한 사랑은 결국 나의 모든 능력과 소유를 다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세는 이어서 말한다. 6절,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마음에 새긴다는 것은 자신이 들은 것을 늘 기억하라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암기하라는 말로 적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암송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말씀을 자신의 삶에 내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새 언약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렘 31:33,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삶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셨다. 그가 40일을 주리신 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그는 신명기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분별하며 물리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지 않을 때 우리는 마귀의 그럴듯한 유혹을 덥썩 물게 된다. 말씀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삶에는 마귀의 시험이 비껴가는 것이다.
7절,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히브리어 본문에 ‘솨난’이란 동사를 ‘부지런히 가르치다’로 번역했다. ‘솨난’의 원래 의미는 ‘갈아서 날카롭게 하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으로 적용했다. 그래서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교육방법은 구전을 통한 반복학습이다. 반복 교육을 통해 그 내용이 날카로운 칼처럼 자녀들의 삶을 뚫고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강론하라’는 것은 일상적인 삶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토라 교육은 랍비가 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하는 것이다. 말씀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부모를 통해 자녀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8절,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매는 경문, 즉 테필린이 이 말씀을 적용하면서 시작되었다. 왼쪽 손에 칭칭 감는 것이 ‘테필라 쉘 야드’다. 이마에 매는 것이 ‘테필라 쉘 로쉬’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극히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대표적인 예다. 사실 맨다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신체 부위에 매다는 것이 아니다. 말씀의 가르침을 늘 지니고 다니며 지키라는 의미다.
9절,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여기서 문설주가 히브리어로 메주자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문에 쉐마 말씀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바깥 성문에도 그렇게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전 공동체의 일임을 명심한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차고 있는 테필린에서, 그리고 그들이 입맞추는 메주자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열심을 보게 된다. 그러한 열심이 있었기에 많은 고난 속에서도 그들은 토라를 지켜내고 유대인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성공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실패했다. 왜 실패했을까?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여러가지 규례와 장치들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에 신경쓰다가 정작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놓쳐버렸다. 쉐마의 방법론에 치중하다가 쉐마의 본질을 놓친 것이다.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 새언약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백성이었다면 그 말씀들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히브리서는 말한다. 히 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뜻을 전하셨다. 예수님은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본다고 하셨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다. 신약의 시대에는 예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사랑과 함께 이웃사랑을 강조하신 이유이다.
예수님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는 한 서기관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다. 막 12:29-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처음에 신명기 쉐마말씀을 인용하셨다. 그리고 거기에 레위기 말씀을 더하셨다. 이것은 613개의 계명 중 243번 째 계명이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눈에 보이는 사람부터 사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전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 친구들이 말했다. 그들은 소위 세속 유대인들이었다. 그분들은 정통 유대인들의 신앙적 열심이 대단할지는 모르나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같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 그분들은 오직 그들에게 전해지는 사랑을 통해 종교적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평가했다. 마찬가지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지, 십일조를 많이 내는지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전해지는 사랑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섬긴다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포로생활했다는 것은 너무도 큰 충격이고 상처였다. 그래서 그들은 포로 이후 더욱 종교적 열심에 매달렸다. 율법을 완벽히 지키기 위해 더 많은 규례와 유전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하나님과 이웃을 더 뜨겁게 사랑한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종교로 변하고 말았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회복해야 한다. 이웃 사랑하는 것을 회복해야 한다.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해선 안된다. 메마르고 형식적인 종교인이 될 뿐이다. 사랑은 내 삶, 내 전 존재를 사로잡는 감정이다. 사랑에 사로잡혀본 적이 있는가?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어떠한 희생도 희생으로 느끼지 않는다.
중학교 때 보았던 벤허라는 영화를 이틀 전 다시 보았다. 주인공 벤허가 자기의 집 문에 달린 메주자를 만지는 장면이 세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자신이 성공한 유대인으로 살아갈 때였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습관적으로 메주자를 만지고 지나간다. 그 후 그는 누명을 쓰고 노예선에 끌려 간다.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집에 와보니 사랑하는 어머니와 여동생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홧김에 메주자를 내려쳤고 메주자는 깨져버린다. 그 후 그는 예수님이 못박히실 때 그 분이 자기가 노예로 끌려갈 때 물을 준 분임을 깨닫는다. 그는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자신의 죄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깨진 메주자 사이로 보이는 쉐마 양피지를 정성스럽게 만진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결국 하나님의 사랑, 쉐마의 본질을 만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져야 하나님을 만질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나야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 출애굽 때 문설주에 발라진 것은 어린 양의 피였다. 그 피가 발라졌기에 죽음이 넘어가고 구원이 임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메주자를 만지며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피를 만져야 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쉐마의 완성은 단순히 메주자를 만진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 인생의 문위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사랑을 만져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요 17:21, 23,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나와 여러분을 한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에하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을 통해 그 사랑을 만질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을 내 마음을 다해, 내 목숨을 다해, 내 능력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사랑을 자녀들과 다음세대에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온 세대가 종교적인 형식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8월 20일 이익환 목사
우연히 글을 읽다가 마음에 감동이 되는 내용이 많아서….반복해서 읽어보기 위해서 캡쳐하였습니다. 글 올려주신 덕분에 많은 깨달음 얻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