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신 7:12-11:25/ 사 49:14-51:3/ 요 13:31-14:31
토라포션 42 마음의 할례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 10:12-16)
얼마전 우리 교회 나왔던 자하바 자매의 손자 할례식 잔치에 다녀왔다. 결혼식 못지 않은 성대한 파티였다. 할례의식을 볼 기대를 하고 갔는데 할례는 며칠 전에 미리 행했다고해서 아쉬웠다. 유대인들은 난 지 8일 밖에 되지 않는 아이를 위해 왜 그리 성대한 잔치를 하는 걸까?
우리가 아는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를 선택하고 언약식을 맺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도 언약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은 세가지 차원에서 있었다. 첫번째는 안식일이다. 출 31:16-17,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이스라엘은 매번 안식일을 맞을 때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관계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적인 차원에서 일어난 언약이었다. 두번째는 무지개다. 창 9:12-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노아에게 하신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은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다. 이것은 공간적 차원에서 일어난 언약이었다. 세번째는 할례다. 창 17:10-11,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다. 이것은 몸에 새기는 언약이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언약의 표시를 바라보며 자신이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자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할례식은 히브리어로 브릿트 밀라라고 한다. 번역하면 ‘할례 언약’이다. 자기 아들의 삶에 하나님의 언약이 새겨지는 순간이 바로 할례식이다. 한 아이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그래서 유대인 부모들은 친지들을 불러 할례식 잔치를 성대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이제 가나안 진입을 앞둔 광야 2세대들을 향하여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설교를 한다. 몸이 아니라 마음에 행하는 할례는 무엇일까? 함께 그 의미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신 것은 그의 나이 99세 때였다.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나온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24년이 지난 시점에서 언약을 맺으신다. 창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런데 언약에는 반드시 약속이 따른다. 창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에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관계임을 새기기 원하셨다. 창 17: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기 전,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할례를 행해야만 했다. 할례는 언약을 맺은 백성에게 요구하신 첫번째 순종 명령이었다.
약속하신 선물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약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이다. 결혼을 약속했다고 해도 상대방이 간음을 했다면 그 언약은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언약에 합당한 자가 되길 원하셨다. 99세에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하며 자기 몸에 하나님의 언약을 새겨넣었다. 그것은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평생을 하나님과 함께 가겠다는 다짐이었다. 몸에 할례를 했지만 그의 마음에도 분명 할례 받은 자로서의 다짐이 있었다. 그 후 하나님은 그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신다. 이 기괴한 명령에 아브라함이 순종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의 몸과 마음에 할례의 언약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 내 의지, 내 뜻 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 그는 자신의 포피를 베면서 자신의 육신의 의지마저도 하나님 앞에서 베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다시 한번 축복을 약속하신다. 창 22:16-17,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이루어지는 전제는 몸뿐 아니라 그 마음에도 할례가 이루어질 때임을 알 수 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제 가나안 진격을 앞둔 백성들에게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인 가나안 땅을 받기에 합당한 백성이 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에게나 던져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할례를 통해 ‘나는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분명히 하는 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정복하기 전 백성들의 상태를 아셨다.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다. 그리고 광야에서도 종종 노예 근성 때문에 멸망을 자초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않고 여전히 노예처럼 살아간다면 그들에게 가나안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광야2세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이 새겨지길 원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게 하신다. 할례를 행한 후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수 5:9,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길갈이란 이름이 히브리어 동사 ‘가랄’에서 나왔다. ‘굴러가게 하다’란 뜻이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게 하셨다. 애굽에서의 육신의 성향과 종이라는 자기이미지를 굴러가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할례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새로운 정체성을 심어주신 것이다. 옛이미지와 성향을 굴려버려야 이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할례를 통해 새롭게 된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방향을 볼 수 있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방향을 따라갔을 때 대적들은 그러한 이스라엘을 막아설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 전쟁에 나섰을 때 그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가나안 땅에서 최대의 적은 가나안 족속들이 아니었다. 할례받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그들 자신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가나안 땅을 선물로 받게 된다. 그러나 그 땅의 문화 속에서 살면서 그들은 처음 할례를 통해 새롭게 된 그들의 마음, 그들의 정체성을 놓치게 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런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렘 4:3-4,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할례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으로 살았다. 그러나 할례받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놓치고 말았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를 약속하셨음에도 할례받지 않는 그들의 마음은 가시덤불이 자라나 경작할 수 없는 땅과 같이 되었다. 스스로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작할 수 없는 삶이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네 종류의 땅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중 가시덤불이 있는 땅을 이렇게 묘사하셨다. 눅 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자들이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염려와 물질에 대한 관심이 그들의 삶을 가로 막았다. 그리하여 하나님보다 바알과 맘몬에 열광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기보단 세상에서의 성공과 안정된 삶을 구했다. 결국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의 결실, 풍성함을 수확할 수 없었다. 할례받지 않은 마음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삶에 뿌리를 내리거나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 육신의 성향대로,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사는 삶일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그들이 약속으로 받은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다시 새 언약 백성을 일으키겠다고 선포하셨다. 겔 36:24-26,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그것은 새 영을 통해 마음의 할례를 받은 백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는 마음의 할례를 의미한다. 바울도 그 사실을 강조했다. 롬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이제 육신의 할례를 한 유대인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의 할례를 한 사람이 육신의 할례를 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이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할례 없는 백성, 그래서 개처럼 여겼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드러났다. 엡 2:11-18,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와 상관없이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하늘 아버지의 백성이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이 오심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갈라디아서는 말한다.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정체성이 바뀌었다. 하나님의 언약이 새겨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받을 유업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유업을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이다. 구약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마음에 할례받은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롬 8:12-14,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업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의 영,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의 가죽을 베어내야 한다. 과거 나를 지배했던 육신의 성향을 제거해야 한다. 죄의 종으로 살아왔던 나의 옛자아에 대한 이미지도 굴려버려야 한다. 주님이 의도하신 승리를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야 하는 것이다.
신명기서는 말한다. 신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마음의 할례가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게 된다. 나그네를 돌보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은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삶이며, 우리가 결국 생명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유업을 얻는 삶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왔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에 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약속이 있는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로 그분이 의도하신 언약이 내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3년, 4년 이 땅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목적이 나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 역시 마음의 할례가 필요하다. 그동안 내 삶에 쌓였던 애굽의 수치를 굴려내야 한다. 죄에 굴복하는 육신의 성향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언약백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서야 한다.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할례가 이루어질 때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의 방향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내 상식과 내 의지를 뒤엎는 요구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사람과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주님 뜻을 따르겠나이다’라고 결단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의 뜻은 우리 삶에 심겨져 삽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교회를 몇 년 다녔는가 중요하지 않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이 숨쉬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바라기는 이스라엘에서의 시간이 다시 묵은 땅을 가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여러분 삶에 자라났던 가시덤불을 제거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 바로 결실할 수 있는 좋은 땅이 되길 바란다. 성령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언약 때문에 다시 가슴 뜨거워지는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8월 27일 이익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