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43 하나님나라의 경제

이번 주 토라포션: 신 11:26-16:17/ 사 54:11-55:5/ 요 15:1-17:26

토라포션 43 하나님나라의 경제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가난한 형제에게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이르기를 일곱째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것이요,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안에 형제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손을 펼지니라” ( 15:7-11)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당신의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나눠지는 세상을 만들기 원하셨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복이 어떠한 것인지 세상에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에 들이신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누리는지 세상에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는 광야 2세대들에게 말씀하셨다.  15:4-5, “네가 만일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명령을 지켜 행하면 [5]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가난한 자가 없는 사회는 모든 통치자들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매 칠년마다 모든 빚을 면제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히브리어로 쉬미타, 면제의 해를 선포하신 것이다. 매 칠년마다 빚의 면제가 시행된다면 어떻게 될까? 실직, 파산, 부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가난의 대물림이 없을 것이다. 칠년마다 모든 빚이 면제된다는 소식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다. 이 복음이 가나안 땅에서 들려졌을까?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백성들에게 어떠한 삶을 원하셨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가나안 땅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공의’라는 단어이다.  16:20,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원어로는 쩨데크, 쩨데크, 즉 ‘공의, 공의’라는 단어를 두번 반복하면서 ‘너는 그것을 뒤쫓으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랍비들은 이 말씀을 ‘너는 마땅히 구제하라’는 말씀으로 번역했다. 사실 구약성경에는 구제라는 단어는 없다. 그런데 탈무드 시대를 거치면서 공의라는 뜻을 가진 ‘쩨다카’란 단어를 구제라는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구제가 공의의 차원에서 해야할 유대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구제를 많이 한다. 미국 인구 2%의 유대인이 전체 기부액의 50%를 한다고 한다.

설교를 준비하며 텔아비브 교육부 국장의 인터뷰 기사를 읽게 되었다. ‘이스라엘 교육의 주요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하나님과 이웃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티쿤 올람의 정신으로 세상을 바꿔나가라고 교육한다” ‘티쿤 올람’은 ‘세상을 고친다’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쩨다카를 통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다고 믿는다. 구제금을 모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필요한 이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창조주의 파트너로 티쿤 올람에 참여하는 일이라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어려서부터 쩨다카를 가르치며 생활화하는 것을 주요 교육목표로 삼는 것이다. 집에 있다보면 가끔씩 초등학교 아이들이 삼삼오오 찾아온다. 기부금을 모금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기부하는 문화가 생활화 된 것이다. 예루살렘에 가면 ‘쩨다카’를 외치는 걸인들이 있다. 유대인들은 걸인들도 당당하다. 쩨다카를 외치며, ‘너희가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고 복을 받는 행위에 참여하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쩨다카’는 구제라는 뜻으로 한정할 수 없다. 더 넓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원하셨던 의로운 삶의 총체적인 모습이다.  18: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의와 공도를 행하는 백성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의’는 ‘쩨다카’, ‘공도’는 ‘미쉬파트’이다.

쩨다카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행하는 의로운 행위를 말한다. 미쉬파트는 뇌물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르게 내린 판결을 의미한다. 보통 하나님의 공의를 말할 때 쩨다카와 미쉬파트라는 개념이 같이 사용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왜 선택하고 부르셨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쩨다카와 미쉬파트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복을 받는 비결이었고, 천하만민 역시 그들이 받는 복을 통해 하나님께 나오는 통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예레미아서에서 이 백성을 향한 슬픈 탄식을 듣는다.  4: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2]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외침이다. 정의와 공의 , 즉 미쉬파트와 쩨다카를 회복하라는 외침이다. 그들 안에 정의와 공의가 회복될 때 열방의 나라들이 하나님께 스스로 복을 빌며 나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에스겔은 소돔백성이 망한 원인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16:49-50, “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 [50]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소돔은 미쉬파트와 쩨다카가 사라진 사회였다. 이스라엘이 망한 것도 주변의 강대국 때문이 아니였다. 그들 안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정의와 공의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사야서는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5:1-2,6-7,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중에 망대를 세웠고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 [6]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것이며 내가 구름에게 명하여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극상품 포도나무인 이스라엘 족속을 심으셨다. 거기서 좋은 포도맺기를 바랬는데 먹지 못하는 들포도만 맺었다. 하나님은 그런 백성을 더이상 복주실 수 없으셨다.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 말은 원어로 보면 더 그 의미가 다가온다. 그들에게 ‘미쉬파트’를 바라셨는데 도리어 ‘미쉬파흐’였다. 즉 ‘정의’ 대신 ‘포학과 피흘심’을 보았다는 말이다. 그들에게 ‘쩨다카’를 바라셨는데 도리어 ‘쩨아카’였다.’ 즉 ‘공의’ 대신 ‘부르짖음과 절규’를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5:22-24,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 노랫소리를 앞에서 그칠지어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정의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미쉬파트를 물같이, 쩨다카를 강같이 그 사회에 흐르게 하라는 것이다.

‘시대의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오직 정의와 공의를 회복하라 그러면 내가 복주겠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경제 원리였다. 처음 가나안에 들어갈 때부터 하나님은 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말씀하셨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다.  15: 7-8, 10, “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가난한 형제에게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것이요,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에서 미쉬파트와 쩨다카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풍요와 번영을 약속하는 바알을 따라갔다. 뇌물을 받으며 판결을 굽게 했다. 부자와 고관들은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고 자기 배만 불렸다. 피흘림과 억울한 부르짖음이 그 땅에 점점 쌓여갔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떠한가? 공의와 정의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지금 우리는 전 세계 1% 부유한 금융자본가들이 99% 사람들을 점점 더 가난하게 만들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 국가의 정부나 국회는 금융자본가들의 뜻에 따라 세계를 고리대금의 시장으로 만들고 있다. 그들의 불의한 금융시스템을 법으로 만들어 보장해주고 있는 것이다. 금융자본은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시스템이다. 빌려간 돈을 갚지 못하면 망하는 시스템이다. 자본이 있는 사람은 더 부자가 되고, 대다수의 월급장이들은 금융자본가들이 발급해준 신용카드를 사용하며 점점 더 자본 권력에 종속되는 사회인 것이다. 신문과 방송에는 이 자본 권력들의 광고가 넘쳐나고 있다. 세상은 점점 더 부자기업가들과 고리대금업자들이 부를 독차지하고 있다. 대기업은 돈의 힘으로 국가와 언론 권력을 매수하여 자기 이익을 지키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탐욕이 통제되지 않고 상대적으로 가난해져가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그 사회는 멸망으로 가는 것이다.

올바른 판결인 미쉬파트가 사라지고, 공의로운 나눔인 쩨다카가 사라진다는 것은 멸망의 전조이다. 정글과 같은 시장 경쟁시대에서 어째튼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오늘날의 가장들에게 있다. 이러한 시대에는 남이야 어찌되는 나와 내 가족은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다. 여기에 교회의 위기가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나라의 위기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절박한 생존경쟁 때문에 ‘익스큐즈’된다는 것이다. 양보된다는 것이다. 내가 좀더 벌고, 안정되고 난 그 다음에 신앙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엿새 일하고 하루 안식하는 것이다. 내가 거둔 소득의 십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물질만능주의에 빠지지 않고 가난하고 더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며 나의 물질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다. 물질만능주의시대에 더 위험한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알신앙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뭘 원하시든, 남들이 어찌되든, 나와 내 가족의 물질적 풍요와 안전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며 사는 것이다.

부자였던 한 청년이 예수님께 질문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켰던 사람이었다. 예수님이 그에게 대답하셨다.  10:21-22,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근심하며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이 부자 청년의 모습 속에서 이 시대 수많은 가장들의 자화상이 보인다.

지난 주간에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가 쓴 ‘하나님은 복으로 장사하지 않는다’는 책을 읽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로운 생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 아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풍요로운 생은 사람의 가치를 부정하는 가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1년에 5천만원을 버는 사람은 7천만원 벌면 여유가 생기리라 여긴다. 그런데 7천만원 버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일억은 벌어야 잘 살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세상의 경제가 얼마나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과 삶의 패턴을 휘어잡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복된 삶을 주시는 예수님을 잘 믿기 보다는 나와 가족의 안정된 미래를 위한 삶을 준비하는데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간다.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 분의 길을 따르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놓치는 것이다.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의 돈을 벌어도 여러분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한 그 물질로 결코 만족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기술사회는 지금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에 불만을 느끼게 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제품을 사라고 말한다. 카드를 긁어서라도 당장 그 만족을 사게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평생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이건 사회주의 사회이건 가난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오늘 본문 말씀이 오늘의 시대에도 중요한 이유가 있다.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안에 형제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손을 펼지니라” 가난의 문제는 어느 시대나 그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국가 권력을 전복하는 것으로, 탐욕적인 자본가들을 징계하는 것으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고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영구적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러한 세상의 시스템을 눈감아주라는 말이 아니다. 교회인 우리는 이 세상의 악에 대해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늘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대가 어떠하든 늘 개인적인 선택과 적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겠으니 너는 네 손을 펼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10:42-44,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집권자들과 고관들이 권세 부리는 그 자리를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이 열망하고 부러워하는 길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기는 자로 살라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여 나중에 기부를 많이 하는 삶보다는 지금 내가 섬길 수 있는 사람을 위해 음식 한 끼 대접하는 것을 주님은 더 원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목숨을 위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그 의는 바로 올바른 판결인 미쉬파트과 이웃을 위해 내 것을 나누는 쩨다카를 추구하는 삶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그 의를 먼저 구할 때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미쉬파트와 쩨다카를 추구하며 살 때 모든 것을 더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경제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과 살아계심을 보고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권면한다. 딤전 6:17-19, “네가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을 방해한다. 재물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지금 선을 행하고 나누어주는 삶을 살 수 없다. 그것은 공동체 안에 사랑과 공의의 나눔을 마르게 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로운 복을 놓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손을 펼치는 삶을 산다면 맘몬의 권세는 여러분의 삶에서 무장해제될 것이다. 가져도 가져도 부족한 삶이 아니라 풍성한 하나님의 채우심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함께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경험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우리 교회가 그러한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

쩨다카(צדקה)는 그림언어다. 짜딕은 낚시 찌의 모습이다. ‘웅크리다’라는 뜻이 있다. 사자가 먹이를 잡으려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달렛은 문이다. 카프는 머리의 뒤를 표현한 것이다. 마지막에 오는 사람, 가장 작은 자를 뜻한다. 헤이는 창이다. 보여준다는 의미다. 쩨다카는 ‘가장 작은 자에게 문을 열어 하나님나라가 어떠한 곳인지 보여주기 위해 웅크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나도 잘 못하는 쩨다카의 삶을 설교로 전해서 죄송하다. 그러나 나와 여러분이 가장 작은 자에게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 쩨다카의 삶을 살아가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이 땅에 끌어오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눠주는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 9 3 이익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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