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라포션: 신 16:18-21:9/ 사 51:12-52:12/ 마 26:36-27:10
토라포션 44 그 선지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신18:15 -18)
일자리에 대한 걱정이 많아진 시대를 우리는 통과하고 있다. 이틀 전 뉴스에서도 20대 취업준비생이 원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청년들이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다. 현재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도 내년에 어떻게 될런지 알 수 없다. 요즘은 50대가 되기도 전에 조기 퇴진의 압력을 받는다. 자녀교육비, 대학등록금, 주택 비용을 생각하면 일이 힘들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은퇴 전까지는 꾹 참고 일해야 한다. 은퇴하신 분들도 막막하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 백살까지 사는 시대가 되었는데, 앞으로 살아갈 40년, 50년이 막막하다. 치킨집 같은 자영업을 해도 5년 안에 열 명 중 7-8명은 망한다고 한다. 생존 자체가 막막하신 분들 앞에서 헌신, 나눔, 이웃사랑과 같은 설교는 사치스럽게 들릴 것이다.
2016년 1월 다보스 포럼에서 ‘일자리의 미래’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2020년까지 인공지능, 로봇, 생명공학 등 미래 기술의 영향으로 일자리 500만개가 사라질 것’이라는 내용이다. 2020년이면 4년 남았는데, 그때까지 여러분의 지금 일자리는 무사할까?
미래가 불안하니 연말연초에는 점집이나 사주카페에 사람들이 몰린다. LA지역에서는 점집을 찾는 사람 70%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사주 팔자나 무당을 통해 귀신이 전해주는 예측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미래를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다. 우리 모두가 미래를 맞이하기 때문에 미래는 늘 궁금하다. 광야를 통과한 이스라엘도 이제 출애굽 40년 만에 그토록 기다렸던 가나안 입성이라는 미래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미래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430년 동안 살아보지 않은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땅에는 아낙자손이라는 거인들이 살고 있었다.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에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발을 들여놔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 명령을 내리신다. 어떤 명령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번째 명령이다. 신 18:9-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12]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희들의 미래를 귀신에게 맡기지 말라는 것이다. 타로점도 단순히 하나의 문화가 아니다. 점성술에 기초하여 길흉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두번째 명령이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선지자의 말만 들으라는 것이다. 너희들의 미래를 하나님의 말씀에 정조준하라는 것이다. 선지자는 히브리어로 ‘나비’다.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예언하는 사람을 말한다. 아모스서 3:7절은 말한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나님 나라는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진행되어온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는 여호수아였다.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는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철통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그가 생존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통한 미래를 맞을 수 있었다. 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모두가 자기 옳은대로 행하는 사사기 시대를 맞이한다. 그리고 이어진 왕정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계속 선지자를 일으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우실 때 그가 할 사역의 성격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렘 1: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여섯 개 동사 중 네 개는 파멸에 관한 것이고 두 개만 긍정적인 것이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을 잘 요약해서 보여준다. 즉 67%는 심판에 관한 메세지고 나머지 33%는 회복에 관한 것이다. 심판에 관한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평안과 축복을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좋아했고 그들의 말에 귀기울였다.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 축복과 ‘잘 되는 나’를 지지해주는 설교를 듣기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세운 왕국이 파멸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인생에 심어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힘들더라도 우리 인생에 ‘건설을 위한 파괴’가 시작될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축복인 것이다.
사람들은 참 약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삶, 내가 원하는 축복에 대한 집착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란 존재는 내 축복을 지지해주는 맘 좋은 분이길 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귀찮은 것을 요구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내 삶의 뒷방으로 조용히 모셔둔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너의 삶의 중심이 되야 한다. 그 분은 결코 벤치만 달구는 후보가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선지자들이다. 선지자들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상식적인 판단과 예측을 거스른다. 선지자들은 우리의 상황을 봐주지 않는다.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우리 삶에 중심이 되는 미래를 회복하라고 독촉한다. 여러분은 이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있는가?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했을 때 유대인들은 그에게 ‘네가 엘리야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했다. 이어 ‘네가 그 선지자냐’라고 물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겠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그 선지자’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는 아니라고 말했다. 신명기서에서 말씀하셨고 당시 1세기 유대인들도 궁금해했던 ‘그 선지자’는 누구일까?
히브리서는 말한다. 히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셨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체험 후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한다. 행 3:20, 22-23,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 [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그 선지자’는 누구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 선지자’로 오셔서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은 무엇인가? 간단히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정권이나 영토의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번째로 ‘하나님 나라의 삶은 이렇다’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허락된다는 것이다. 세번째 하나님 나라는 장차 완성된다는 것이다. 에수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죄인은 영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 선지자가 와서 전하는 말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르신 말인지 알겠는가’라는 질문에 신명기에서는 이렇게 답한다. 신 18:22,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그 선지자의 말과 사역에서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증거가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다(요 12:49)”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메세지를 전하러 오신 선지자였던 것이다.
그 예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었다. 막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죽은 나사로도 말씀으로 명령하여 살리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주를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이 말했다. 요 6: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예수님이 오셔서 전한 말씀과 사역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증거들이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로 믿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런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 요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그들은 ‘돌을 떡으로 만드시는 분이 우리 왕이라면 적어도 먹고 살 걱정은 없겠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기대를 뒤로 한 채 혼자 산으로 떠나 가셨다. 여러분이 만약 여러분이 기대하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을 위해 예수님을 구주로 삼으려 한다면 예수님은 여러분 곁을 떠나실 것이다. 예수님은 더 큰 목적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 이후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교정해주신다. 요 6:32-33,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당연히 그들은 생명을 주는 떡을 받기 원했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요청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이 말이 어려웠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셨다. 요 6:53, 56,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떡은 그들이 기대했던 빵이 아니었다. 이후로 예수를 기대하며 쫒아다녔던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났다.
그렇다면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태초에 말씀이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은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피와 살을 가진 육신으로 오신 이유는 뭘까? 우리의 죄를 위해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셔야 했기 때문이다. 히 2:14-16,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는 대속의 원리 때문에 예수님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야 했던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와 떡에 참여하는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고전 11:25-26, “…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의 피와 떡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여 증인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가장 하시고 싶은 말씀일 것이다. 우리는 결국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요 선지자로 부름받은 것이다.
선지자의 삶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했다.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죽을 때까지 전하는 삶을 산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돌들을 떡덩이로 만들라고 유혹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메시아가 되라고 유혹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4: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는 어찌하든 우리가 삶의 문제, 경제의 문제에만 집중하게 한다. 그러나 선지자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 회복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생명을 놓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예언하셨다. 눅 21:20-21,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21]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지금의 요르단 펠라 지역으로 피한 제자들은 AD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때 멸망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 후 승천하셨지만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제자들의 마음에 살아있게 하셨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이 오셔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거의 다 성취되었다. 다시 오시겠다는 재림의 예언만 아직 성취되지 않고 남아 있다. 여러분은 ‘그 선지자’를 만나셨는가? ‘그 선지자’가 오셔서 전한 말씀을 들었는가? 뭘 전했는지 모르겠다면 다락방 하셔야 한다. 성경공부 해야 한다.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것이 여러분이 멸망하지 않고 살 길이다.
내일이 와도, 해가 바뀌어도 미래는 여전히 예측하기 힘들 것이다. 사실 여러분은 불과 얼마 전에 여러분이 기대했던 미래에 현재 살고 있다. 이스라엘에 발령 받으면 뭔가 새로운 일이 열리겠지… 직장을 옮기면 뭔가 새로운 일이 시작되겠지… 여러분이 이전에 기대했던 미래를 여러분은 지금 현재 살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현재 부딪치며 겪는 어려움 때문에 여러분은 아마 또 다른 미래가 열리길 희망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미래가 열려도 여러분이 헤쳐가야 할 파도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삼재가 끼었나’라는 운명론에 여러분의 미래를 맡겨서는 안된다. 여러분의 상한 감정이 아니라, 상황의 열악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들려져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의 삶에서 확인되야 한다.
사 55:6, 8-11,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우리는 시대의 예측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야 한다. 거기에 성도의 미래가 있다. 우리의 길보다,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생각을 찾아야 한다. 아무 성취 없이 헛되이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내야 한다. 그 말씀이 찾아질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며 하나님이 보내신 일에 형통하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미래가 안전한 사람은 현재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심어진 사람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새겨진 사람이다. 여러분 안에서 그 분이 말씀하시기에 늘 여러분의 오늘을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자로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9월 10일 이익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