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46 깨닫는 마음

이번 주 토라포션: 신 26:1-29:8/ 사 60:1-22/ 눅 23:26-56

토라포션 46 깨닫는 마음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9]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신 29:1-4, 9)

 

청년부 때 내가 교회 누나들로부터 들었던 말이 있다. “쟤 또 징징거린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 마다 한참 징징거리다가 뻘쭘해지곤 했다. 그런 피드백을 받으면서 후에 그런 징징거림은 나의 상처받은 마음에서 나온 반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마다 상처받은 마음을 표현하는 반응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상처 받았을 때 마음의 벽을 쌓고 그 속에 숨는다. 더 이상 상처 받고싶지 않아서이다. 그러나 그 벽 안에서 이미 받은 상처를 곱씹으며 우울해 하거나 분노하거나 낮은 자존감으로 괴로워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상처받을 때 공격적이 되는 사람이 있다. 폭력으로 맞서거나 공개적으로 상처준 사람을 비난하거나 반항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상처를 해결하는 반응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를 키우고 내면화시킬 뿐이다.

상처받지 않는 인생은 없다. 원죄가 들어온 세상에 살고 있기에 우리는 누구나 상처받는다. 그것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서 받는다. 하와는 아담에게서 상처받는다. 하와는 아담에게 한 때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었다. 그러나 원죄 이후 ‘저 여자 때문에 모든 일이 벌어졌다’는 아담의 비난을 받는다. 우리도 가장 가까이 있는 부모나 형제, 배우자, 선생님, 직장 상사나 동료들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교회 지도자나 교우들도 예외는 아니다. 요셉은 자신의 형제들에게 노예로 팔리는 상처를 받았다. 그는 구덩이 안에서 떨어질 때 받은 외상보다도 형들에 의해 버려졌다는 마음의 상처 때문에 더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나중에 형들에게 이런 고백을 한다. 창 50:19-21,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는 마음의 벽을 쌓고 우울증에 빠지지 않았다. 권력의 자리에 올랐을 때 형들에게 복수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자신의 상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와 상처에 대해 하나님을 통해 깨닫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광야 2세대에게 모세가 마지막으로 설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광야 2세대는 상처받은 세대다. 광야 40년이라는 결핍과 고난의 시간을 지나왔다. 그러면서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거역했던 부모 세대가 불순종으로 죽어나가는 장면도 목격해야만 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과거와 상처에 대해 깨닫는 마음이 필요했다. 그것이 없이 주어지는 가나안은 그들에게 축복의 시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 광야2세대들에게 필요했던 ‘깨닫는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자신도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도 받는 상처들에 대해 깨닫는 마음을 얻게 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1절,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호렙, 즉 시내산에서 세우신 언약 외에 이제 40년 후 모압 땅에 이른 광야 2세대에게 또 다른 언약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 언약의 말씀을 설교하게 하신다. 신 29:2-4,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유대인 랍비들은 이 말씀을 ‘깨닫는 마음을 오늘날까지는 주시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깨닫는 마음을 주셨다’라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더 일찍 깨닫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광야에서 생고생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을 주시지 않아서 일까?

비슷한 예를 바로에게 살펴볼 수 있다. 롬 9:17-18,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자 그렇다면 바로가 완고해진 것은 하나님 책임일까 바로의 책임일까? 하나님의 책임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는 이미 완악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한 사람이다. 출 5: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완고했던 바로가 계속 고집을 부리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다.

광야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았다. 시내산에 가득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그새를 못참고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반석이 갈라져 물이 나오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기적을 경험했다. 그러나 애굽에서 먹었던 고기생각에 우울증에 빠졌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들을 이끌고 나온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다. 가나안 정탐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나안 땅의 풍성함과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땅의 거인들을 보고 스스로 메뚜기처럼 여겼다. 애굽의 노예였을 때 가졌던 낮은 자존감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 하기보다는 모든 어려움을 다 상처로 받았다. 그러면서 마음이 완고해진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광야 백성들을 이렇게 평가한다. 히 3:8, 10,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광야 백성들은 하나님이 시험하실 때 마음을 완고하게 했던 것이다. 광야에서의 시험을 모두 상처로 받은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자신의 육신의 판단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완고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책임이었던 것이다.

과거 출애굽 세대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들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영적 감각이 없었던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바로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보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너희에게 깨닫는 마음이 없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신 29:5-6,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6] 너희에게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광야 40년을 허락하신 것은 결국 그 가운데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광야는 힘든 곳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그러나 그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옷이 낡아지지 않고, 신이 해어지지 않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눈으로 본 체험을 통해영적인 눈이 열려 결국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하신 적이 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는데, 네가지 다른 상황에 뿌려졌다는 것이다. ‘길 가에 떨어진 것은 새가 와서 먹었다. 돌밭에 떨어진 것은 흙이 깊지 않아 싹이 나왔지만 해나 돋은 후 말라버렸다.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것은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삽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하였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 말하셨다.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그러면서 그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마 13:19-23,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이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 있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더러는 사탄이 그것을 빼앗기 때문이고, 더러는 세상의 염려와 유혹 때문에 방해받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 15절에서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라고 탄식하셨다. 깨닫는 마음이 없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져 있기 때문이다. 원어적으로 ‘완악’이란 말은 살찌게 된 상태, 마취된 상태, 굳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이 말했다. 고후 3: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바울도 한 때는 완고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 눈을 가렸던 수건이 벗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했다. 예수님만이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할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말한다. 고전 1:21-24,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나는 교회를 오래 다녔고, 또 목사였지만 인생에서 쉽게 해결되지 않았던 마음의 짐이 있었다. 오랜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 그것은 때론 죄책감으로, 지나친 책임감으로, 또 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났다. 미국에 상담을 공부하러 간 것도 사역도 사역이지만 내 안에 오래된 상처를 고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미국에서 한 집회에 참석했는데 기도를 도와주시던 한 분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면서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지나가셨다. 그런데 그 말이 내 마음에 박혔다. 그 순간 ‘예수님이 내 인생의 문제, 내 상처와 멀리 계신 분이 아니구나’ ‘그분이 나를 위해 고통당하신 나의 주님이구나’란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때 얼마나 통곡하며 울었는지 모른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이유가 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영적인 눈이 열려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예수님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계속해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이미 표적을 보았어도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영적인 눈이 뜨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 이후로 자신이 고난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날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에 베드로가 항의하고 나섰다.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마 16:23-24,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당시만해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데 실패했다.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 예수님처럼 인간적으로 상처를 많이 받으신 분이 없으실 것이다.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구원하러 온 자기 백성에게 외면받으셨다. 인류의 죄를 뒤집어 쓰셨기에 공의의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으셨다. 인간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에게 허락된 고난의 잔이 옮겨지길 원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 중에 그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마음이 있었기에 그동안 예수님에게 가해졌던 모든 거절은 더이상 상처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지게 될 십자가도 더이상 두려운 것이 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삶에 머문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은 주저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십자가에 완전히 못박히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받는다. 내 자아가 아직 살아있기에 상처를 받는 것이다. 과거에 받았던 상처, 현재 받는 상처를 십자가에 가져가지 못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벽을 쌓고 우울해하거나 원수갚지 못해 분노하는 것이다.

신 29:9,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모세는 광야 2세대들에게 선택을 촉구했다. 그들의 선택에 따라 그들은 축복의 길로 갈 수도 있고, 저주의 길로 갈 수도 있었다. 우리에게도 완전한 언약으로 오신 예수님을 선택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 예수님을 따라 우리는 십자가를 선택할 수도 있고 선악과를 선택할 수도 있다. 우리의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따라 선악과를 선택한다면 관계는 죽는다. 상대방을 죽일 뿐 아니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짐은 나의 상처도 더 심화시킬 뿐이다. 그러나 내 자아를 못박고 십자가만을 선택할 수 있다면 누가 나를 찌른 것이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선택한 사람에게 부활의 능력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딱딱해진다. 상처받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완고해진다. 그리고 상처받은 마음은 벽을 쌓는다. 그 속에 숨는다. 우리 마음이 딱딱해질 때, 그 때가 위기이다. 우리는 그러한 때 완고함으로 갈 수 있다. 내게 상처 준 사람들과 하나님께 원망을 퍼부으며 마음의 벽을 쌓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 우리가 광야를 지나거나 고통당하는 순간 우리는 겸손히 깨닫는 마음을 구해야 한다. 시 119:34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받은 상처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다림줄을 내려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내린 판단도 치워야 한다. 내 자신이 내린 정죄의 끈도 버려야 한다. 오직 내 상처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조명되었을 때에야 돌파가 일어난다.

바울은 말한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단순히 십자가에 감사하는 삶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는 삶을 선택했다. 바울은 십자가를 선택한 이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기도 했고, 동족으로부터 배척과 많은 위험을 당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상처로 남지 않았다.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이다. 상처받을 자아가 죽었기 때문에 더이상 상처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말이 쉽지 우리는 예기치 않는 순간에 날아온 상처 때문에 여전히 아플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육신이 살아있는 날까지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깨닫는 마음을 구해야 한다. 그래야 상처가 상처로 남지 않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상처를 극복한 만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그래서 상처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사명의 토대가 된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묵묵히 십자가를 선택했던 예수님처럼 우리가 상처를 입어도 그 상처와 함께 상처입은 치유자로 성장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6년 9월 24일 이익환 목사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