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49 기억은 감사로 이끈다 

토라포션 49 기억은 감사로 이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8]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신 32:7-12)

 

올해 노벨문학상은 미국 대중가수인 밥 딜런에게 돌아갔다. 노래를 통해 귀를 위한 시를 썼다는 것이 수상 이유였다. ‘참신하다, 파격적이다’라는 반응이 있는 반면, 기존의 문인들은 아주 기분나빠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신명기 말씀에는 귀를 위한 시가 나온다. 모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시를 노래로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노래에는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예측까지 다 담겨져 있다. 모세가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왜 노래로 만들었을까?

노래는 영혼을 울리는 힘이 있다. 오래 기억되고 세대를 통해 전해질 수 있다. 그래서 모세는 그가 죽기 전 유언과 같은 노래를 만든 것이다. 자신이 죽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이 이 노래를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서 있길 원했던 것이다. 그는 사실 이스라엘이 장차 하나님을 떠나 배교할 것을 미리 알았다. 신 31:29,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길을 떠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하게 하므로 너희가 후일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그래서 모세는 이들의 반역 가운데 하나님이 하실 일들에 대해 예언적으로 들려주길 원했던 것이다. 그의 다짐을 들어보자. 신 31:28, “너희 지파 모든 장로와 관리들을 내 앞에 모으라 내가 이 말씀을 그들의 귀에 들려주고 그들에게 하늘과 땅을 증거로 삼으리라” 그는 하늘과 땅을 두 증인으로 채택하여 노래를 시작한다. 마치 법정에서 부르는 노래같다. 신 32: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았을까?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죽어도 하늘과 땅은 남는다. 모세는 그래서 자신이 전하는 메세지에 대대로 변함없는 하늘과 땅을 두 증인으로 세운 것이다.

모세는 서두에서 두 가지 사실을 대비한다. 신 32:3-4,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첫번째 사실은 하나님은 반석이라는 것이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 사실은 뭘까? 신 32: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이스라엘 백성은 삐뚤어진 세대라는 것이다. 반석이신 하나님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만의 모습이 아니다. 반석과 같으신 하나님 앞에서 삐뚤어진 모습으로 살아가는게 우리의 모습이다. 오늘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에게 주는 모세의 권면은 무엇일까? 초막절을 맞이하면서 그의 권면을 통해 다시 우리 삶에 감사를 회복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첫번째 모세의 권면은 과거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신 32: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광야 2세대 중 연장자들은 역대의 연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모세는 그것을 설명한다. 신 32:8,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이것을 알려면 창세기 10장으로 가야 한다. 창세기 10장에는 노아의 자손들의 족보가 나온다. 모두 70명이다. 그런데 이들은 바벨탑 사건 이후 온 지면으로 흩어져 각각 나라를 이룬다. 노아의 자손의 수효대로 70개의 나라의 경계가 정해진 것이다.

민수기서에는 장막절 규례가 나온다. 초막절 7일 동안 매일 수송아지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다. 자 그런데 번제를 드리는 특성이 있다. 민 29:13-32, “너희 번제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리되 수송아지 열세 마리와… [17] 둘째 날에는 수송아지 열두 마리와… [20] 셋째 날에는 수송아지 열한 마리와 … [23] 넷째 날에는 수송아지 열 마리와… [26] 다섯째 날에는 수송아지 아홉 마리와… [29] 여섯째 날에는 수송아지 여덟 마리와… [32] 일곱째 날에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 13+12+11+10+9+8+7 모두 더하면 70마리다. 이것은 세상의 70나라를 위한 번제였다. 13에서 7로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소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번제를 드리는 것은 이 세상 나라들이 소멸되지 않도록 기원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민29:35-36절은 “여덟째 날에는 장엄한 대회로 모일 것이요… [36] 번제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리되 수송아지 한 마리…”를 드리라고 말한다. 초막절 8일째 드리는 이 한마리는 뭘까?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번제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 자신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을 뿐 아니라 온 열방을 위한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래서 이 초막절 번제 규례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부르심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었다. 신 32: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이스라엘은 온 열방을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기업이라는 것이다.

초막절을 지나면서 우리 역시 기억할 것이 있다면 우리의 부르심이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부르심을 이렇게 말한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그저 한 개인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다. 열방을 위해 기도하고 열방을 살리기 위한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광야 생활 그 자체였다. 신 32:10-12,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물론 광야생활은 터프했다. 아직 날 수 없는데 둥지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아찔함도 있었다. 그러나 독수리가 떨어지는 자기 새끼를 날개로 받아 날 수 있게 했던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강하게 훈련시키셨다. 그리고 위험한 광야에서도 그들을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다.

유대인은 초막절이 되면 수카를 짓고 거기서 일주일동안 지낸다. 그들의 광야생활을 기억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그들은 가진 것이 없었다. 그들이 유일하게 가진 것이 있다면 초막 사이로 보이는 불기둥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언젠가는 가나안으로 우리를 이끄실 것이라는 소망 하나였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 하나만 가지고 광야를 통과했던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남이 가진 것을 내가 갖지 못했을 때 슬픔을 느낀다. 한 해를 돌아보며 내가 이룬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할 때 의기소침해진다. 그럴 때 우리 역시 초막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서 나의 현재를 비교하지 말고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 내가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 한 분만 소유하면 되다는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내 삶에 광야를 허락하시는 것은 나를 독수리처럼 날 수 있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과거를 기억할 때 감사가 회복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이었다. 신 32:13-14,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14]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지 못했다면 그들은 다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것은 구원의 반석이었고, 거기서 나온 물은 생명의 물이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성전시대 초막절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초막절 마지막 날 성전 앞에서 물 붓는 의식이었다. 이 날은 호산나 라바, 큰 구원의 날이라고 부른다. 탈무드 Sukkah 486절을 보면 이 행사를 이렇게 묘사한다. ‘백성들이 성전에 모이고, 대제사장이 두 물 항아리를 들고 성전 앞의 뜰에 있는 바위 위에 선다. 백성들은 옛 광야를 생각하며 “목이 마르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며 반석을 쳐다본다. 대제사장이 물을 그 반석 위에 붓는다. 옛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이 흘러나온 장면을 재현해 보이는 것이다. 물이 반석을 타고 흘러내릴 때에 백성들은 환호하며 춤을 추면서 기뻐하고, 초막절 행사가 절정을 이루게 된다.’

요한복음에서 초막절 때 예수님이 등장하시는 장면이 바로 이 때였다. 요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바울도 광야 반석 사건을 이렇게 해석한다.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광야 반석에서 구원의 물을 주셨던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도 그 반석에서 꿀과 기름을 빨게 하셨다. 밭의 소산인 밀과 포도주를 먹게 하셨다. 그러나 물질의 풍요는 아이러니하게도 풍요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배도로 나타났다. 신 32:15,18,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18]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이스라엘이 누리게 된 풍요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과 더 많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초래했다. 그들을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기고 그들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여수룬(ישרון)은 ‘의로운’이란 뜻을 가진 ‘야살(ישר)’에서 나온 말이다. 여수룬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이스라엘의 별칭이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배가 부르자 하나님을 발로 찬 것이다. 번영이 결국 독이 된 것이다. 한 해의 수확에 감사하는 추수 감사절기에 우리는 번영 그 자체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물질을 많이 누린다고 우리의 영혼의 목마름을 채울 순 없다. 요 7:39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의 강은 결국 성령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성령이 부어져야 인생의 목마름이 끝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반석이 되신 하나님을 망각한 결과는 결국 재앙과 포로됨이었다. 신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 바벨론 제국, 로마 제국을 일으키셔서 살찐 여수룬을 심판하셨다. 그 심판 속에서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신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그러나 모세의 노래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구원과 회복에 대한 소망으로 끝난다. 신 32:43,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속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예수님이 언제 오셨을까? 지난 주 한 메시아닉 유대인 성경학자로 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첨부파일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진짜 생일은 초막절이라는 내용의 소논문이었다. 예수님의 생일을 추론하는데는 몇가지 단서가 있다. 먼저 세례요한이 잉태되고 6개월 후에 예수님이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장에 나온다. 두번 째 단서는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직무 시기다. 그는 제사장으로 아비야 반열이었다. 역대상 42장 10절을 보면 아비야의 직무순서는 24명 중 8번째로 나온다.  3월 경인 니산월 1일부터 시작하여 일주일씩 직무를 담당하는데, 모두가 함께 직무를 서는 유월절과 오순절을 고려하면 그의 직무 순서는 오순절을 지나고 난 10번째 주가 된다. 성경은 사가랴가 직무를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세례요한을 잉태했다고 한다. 이 때가 6월경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잉태시기는 6개월 뒤인 12월 경이다. 그리고 출생은 그로부터 10개월 뒤인 초막절 때라는 것이다. 요 1: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표현한다. 거하시다라는 말은 ‘장막을 같이하다’라는 뜻이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예수님이 초막절 때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내용이다.

신 32:2절에서 모세는 말했다.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하늘에서 내리는 물에 비유했다. 물(מים)은 하늘(שמים)에서 내린다. 물은 하늘에서 내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에 생명을 준다. 토라 역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의 형태로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왔다. 그 말씀이 비처럼 내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말씀은 심어져야 생명을 얻어 자라게 된다. 식물을 심고 한번 물 주었다고 계속 주지 않는다면 말라 죽는다. 마찬가지로 말씀이 공급되지 않는 신앙은 말라 죽게 되는 것이다.

모세는 그의 노래를 마치며 다시 한번 온 이스라엘에게 당부한다. 신 32:46-47,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47]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토라의 말씀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초막절 8일째를 심캇토라로 지킨다. 토라의 기쁨이란 뜻이다. 토라를 완독하고 유대인들은 이날부터 다시 창세기를 읽기 시작한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말씀이셨던 예수님은 이 초막절의 시즌에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말씀으로 오신 그 분은 다시 오셔서 그 말씀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 요한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우리는 주님의 신부로 장차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과 영원히 거하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미래다. 그 때 초막절의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초막절은 단지 유대인만의 절기가 아니다. 여호와의 절기(레 23:39)다.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장막에 거하기까지 우리는 이 날을 주신 의미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열방을 만드시고 우리를 그 열방을 축복할 제사장나라로 부르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인생의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같이 보호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광야에서, 그리고 가나안에 이르러서도 반석에서 우리를 공급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반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광야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 광야 한 복판에서도 소망할 수 있다. 결국 풍성하고 안정된 삶, 그 자체는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을 추구하다가 정작 반석이신 하나님을 놓친다면 우리는 전부를 잃는 것이다. 바라기는 오늘 모세의 노래를 기억하며 우리를 당신의 분깃으로 부르셔서 이끄시고 채우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를 회복하는 인생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초막절 추수감사예배 2016년 10월 15일 설교 이익환 목사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