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50 존재의 부르심을 완성하려면

이번 주 토라포션: 신33:1-34:12/ 수 1:1-18/ 눅 24:44-53

토라포션 50 존재의 부르심을 완성하려면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19]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신 33:18-19)

사람마다 타고난 운명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장남 장녀로, 어떤 사람은 막내로, 어떤 사람은 그 사이에 끼인 채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재벌가의 자녀로 금수저를 문 채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의 자녀로 흙수저를 문 채 태어난다. 그리고 각각 존재의 부르심 앞에 선다. 장남은 가문을 이어가는 부르심이 있다. 알콜중독과 폭력가정의 장녀는 집안의 평화를 중재해야 할 부르심이 있다. 부모의 사업이 망한 가정의 자녀는 쓰러진 가운을 일으켜야 하는 부르심이 있다. 타고난 환경을 마주해야 하는 게 사람의 운명이다.

오늘 본문에는 모세가 가나안 진입을 앞 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온다. 12지파를 축복하는데, 각 지파의 운명과 그들의 존재의 부르심에 맞게 예언적으로 축복하는 내용이다. 오늘은 특별히 스불론 지파와 잇사갈 지파에 대한 축복을 살펴보면서 오늘은 사는 우리 존재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스불론 지파와 잇사갈 지파의 존재적 부르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처음에 어떤 운명으로 태어났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스불론과 잇사갈은 야곱의 아들이었다. 야곱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레아와 라헬이었다. 누구를 더 사랑했나? 라헬이었다. 그것이 레아에게는 수치이자 슬픔이었다. 그런데 레아는 자녀의 축복이 있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를 차례로 쑥쑥 낳았다. 그러자 라헬은 여종 빌하를 통해 단과 납달리를 낳게 하여 자기 무릎에 않힌다. 레아는 이에 질세라 여종 실바를 통해 갓과 아셀을 낳게 한다. 라헬은 언니 레아와의 자녀 대결에서 6대 2로 뒤지고 있었다. 더구나  자신이 직접 낳은 아이는 아직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르우벤은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머니 레아에게 준다. 합환채를 먹으면 임신한다는 믿음이 있어서 라헬은 그 합환채를 요구하고 대신 남편 야곱이 레아와 동침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래서 레아는 다섯번 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잇사갈이라 짓는다. 잇사갈은 ‘값’이란 뜻이다.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라는 레아의 믿음이 담겨져 있다. 이어 여섯번 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스불론이라 지었다. 스불론은 ‘거함’이란 뜻이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는 레아의 희망이 담겨져 있다.

이 시절 아내가 여러 명 있는 남자는 각각의 아내에게 장막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그가 총애하는 아내의 장막에서 살았고 그것은 그 아내에게 영예가 되었다. 자, 이제 여섯 아들을 가진 야곱은 레아의 기대대로 한 장막에서 살게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그 이후 라헬은 자신의 아들인 요셉을 낳게 된다. 야곱이 이 욥셉을 엄청 이뻐했다. 이 후 야곱은 주로 라헬의 장막에서 거주했을 것이 충분히 예상된다. 레아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스불론은 어머니 레아의 쓴 뿌리를 존재적으로 먹고 자랐을 것이 예상된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거하는 장막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없는 장막에서 그는 장막에 거하기 보다는 밖으로 나가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스불론과 잇사갈 지파에게 한 모세의 축복을 다시 보자. 신 33:18,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아이러니하다. 스불론에게는 장막을 떠나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고 하고, 잇사갈에게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고 축복한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에 이 축복의 내용이 너무 짧다. 우리는 야곱이 그 아들들에게 했던 축복에서 그 단서를 찾아야 한다. 창 49:13-15,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14]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15]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놀랍게도 이 축복은 430년 후 이루어진다. 스불론 지파가 실제로 갈릴리 해변과 지중해 사이에 거주하게 된 것이다. 스불론 지파가 위치한 곳은 비아 마리스가 관통하는 곳이다. 이것은 다마스커스에서 시작하여 애굽에까지 이르는 거대한 무역로였다.

모세는 그의 축복을 통해 스불론과 잇사갈 두 지파를 연결한다. 신 33:19,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유대교 랍비인 라쉬는 이 두 지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스불론은 무역을 통해 빵을 가져왔다. 잇사갈은 장막 안에 머물며 토라를 연구했다. 그리고 그의 지식을 스불론과 나누었다.’ 유대인의 성경해석인 미드라쉬에서도 ‘스불론은 장사하는 지파가 되었다. 그래서 바다로 나아가 무역을 했다. 돈을 벌어 잇사갈이 토라를 공부하는데 댔다. 잇사갈은 토라공부를 많이 하여 성전에서 산헤드린 회원을 많이 배출했다’고 기록한다.

유대인들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우리가 잘 모르는 역사적인 간극이 있다. 그래서 이 지역의 역사적인 정황을 좀더 살펴보고자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스불론 땅이 멸시 당하던 땅이라고 표현한다. 사 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들에게 있어 갈릴리는 촌구석 그 이상이었다. ‘이방의 갈릴리’였다. 선지자가 나오거나 율법의 중심지가 결코 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왕하 15:29절을 보자.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BC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기도 전 갈릴리는 BC734년 가장 먼저 정복당한다. 그리고 갈릴리 지역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간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왕하 17:24,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앗수르 왕은 이 지역에 이방인을 옮겨다가 살게하여 혼혈정책을 시행한다. 피가 섞이면서 이 갈릴리 사람들의 억양과 방언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마태복음에는 갈릴리 출신 베드로를 알아보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마 26:73). 순수한 혈통과 전통을 자부하던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점점 더 경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갈릴리 지역은 멸시와 고통을 받는 ‘이방의 갈릴리’로 불리게 된 것이다. 멸시와 고통이 이 지역 사람들의 운명이 된 것이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1세기 당시 갈릴리는 더욱 더 큰 고통가운데 있었다. BC 63년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가 되면서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진다. BC 47년 분봉왕이었던 헤롯대왕은 세포리스를 로마식 도시로 건설하면서 갈릴리 지역의 행정수도로 삼는다. 갈릴리 농민들은 소출의 절반을 바쳐야 했고,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귀족 지주들은 로마 화폐를 앞세워 소규모 농가들을 삼켜버린다. 갈릴리 농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새로운 주인을 위해 일하는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땅을 빼앗기며 빚더미에 앉은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고통 중에 사람들은 메시아가 나타나 그들을 해방시켜주길 기대했다. 살 길이 막막해지자 강도떼가 갈릴리 지역에서 많이 일어났다. 그들은 단순한 강도들이 아니었다. 갈릴리 유다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벌인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로마라는 외세에 대항하여 토라를 준수하고 이방 주인을 섬기지 않으려는 열심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열심’을 의미하는 ‘젤롯(Zealot)’이라고 불렀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젤롯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실천했다. 출 22:20,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그들은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로마인들과 로마에 빌붙어 아첨하는 유대인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했다.

BC 4년 헤롯대왕이 죽자 이들은 세포리스를 습격한다. 왕실병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탈취하고 이 후 로마군을 대상으로 게릴라 전을 벌였다. 1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 운동은 점점 더 규모가 커지고 맹렬해진다. AD 6년 로마가 세금을 거둬들일 목적으로 인구조사를 했을 때 갈릴리 유다는 인구조사에 반대운동을 벌인다. 인구조사에 참여하는 것은 로마에 대한 충성 서약과 다를바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행 5: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결국 갈릴리의 유다는 로마군에 잡혀 처형되었다. 로마군은 세포리스로 진격해 남자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했고, 2000명이 넘는 폭도들을 잡아 십자가에 처형시켰다고 한다.

자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한 아기의 탄생을 예언한다. 사 9:2-3, 6,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한 아기의 탄생이 이방 갈릴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예언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다. 마 4:12-16,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스불론의 장막 가버나움에서 사셨다. 그것은 이사야서 예언의 성취였다. 그분의 거주를 통해 이방의 갈릴리에 빛이 임하게 된다.

갈릴리 사람들은 더이상 그들의 운명에 지배받지 않았다. 그들은 권력과 거리가 멀었다. 출신으로도 내세울 것이 없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가셔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열 두명의 제자를 세우셨다. 눅 6:12-13,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이들은 모두 갈릴리 출신이었다. 5명은 어부고, 1명은 세리고, 한 명은 젤롯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들의 운명은 바뀐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그들 존재의 부르심을 위한 사명자로 세워진다.

마 28:16-20,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자, 예수님이 지시하신 산이 어딜까? 이곳은 스불론 지파의 변경 갈릴리 해변에 위치한 아르벨산으로 여겨진다.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으로의 나감을 명하신다. 스불론은 모세가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고 축복했던 지역이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축복하며 세상으로 나아갈 것을 명령하셨다.

여기서 권세의 위임이 이루어진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이 권세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 권세는 헬라어로 ‘엑수시아’다. ‘엑스’와 ‘우시아’가 결합된 말이다. 엑스는 ‘무엇으로부터, out of’란 뜻이고, 우시아는 본질이라는 뜻이다. 권세는 본질로부터 나오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권세와 다른 것이다. 우리는 권력의 자리에 오른다고 권세있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존재의 부르심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이 권세, 엑수시아를 받는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이 권세를 받을 때 우리의 출신과 운명과 상관없이 우리 각자 고유하게 부여된 존재의 부르심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권세를 사용할 때 우리는 우리 존재의 부르심을 완성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운명의 굴레에 묶여 산다. 출신과 원가족의 영향이 우리를 묶는다.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이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나도 여전히 씨름하고 있다. 또한 시대와 사회상황이 우리를 묶는다. 그 굴레들은 우리의 인생을 어둡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둠을 뚫고 빛으로 오셨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된 관계가 되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의 굴레를 푸는 권세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푸시면 우리 인생의 굴레가 풀리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자동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의 부르심에 대한 주님의 뜻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나는 왜 이런 집안에 태어났는지, 나에게 왜 그런 고통이 허락되었는지, 나의 상처와 고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려 그분의 뜻을 구해야 한다. 존재의 부르심이 확인되어야 우리는 다른 사람과 열방을 향해 사명자로 나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틀 뒤면 초막절이 끝난다. 초막절은 우리 인생 장막에 거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확인하는 절기다. 주님과 함께 거주함으로 여러분 인생의 어둠이 걷히게 되길 바란다. 우리의 운명을 뛰어넘어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시는지 확인하는 시간들이 되길 바란다. 스불론과 잇사갈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자식들이었다. 그러나 훗날 그들 지파는 무역을 하고, 토라 연구에 정진하며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슴으로 이끄는데 쓰임받았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경멸받던 갈릴리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람 낚는 어부로 쓰임받았다. 각자 힘든 운명 속에서도 존재의 부르심을 완성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바라기는 여러분도 각자의 타고난 운명을 뛰어 넘기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여러분 존재의 부르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완성하는 삶을 살게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예배 설교 2016년 10월 22일 이익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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