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행전 9 엘라골짜기

성지행전 9 엘라골짜기: 정체성을 회복하라

 

블레셋 사람이 방패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니라 [42]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알게 하겠고 [47]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1-47)

 

얼마 전 이란에서 이민 온 유대인 할아버지가 아흔 두 살의 나이에 할례를 받았다. 난지 8일 만에 이란에서 할례를 받았지만, 이란에서 행한 할례가 유대법에 어긋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싶으셨기에 아픈 결단을 내리신 것 같다.

며칠 전 메바세렛 찌온이란 지역에 갔다가 할례식을 보게 되었다. 이 지역은 이디오피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2000명 가량  모여 사는 곳이었다. 이 날 난 지 팔일째 되는 아이의 할례식이 있었다. 할례는 모헬이라는 전문가에 의해 마취도 하지 않고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표피가 잘려져 나가자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한다. 그러자 모헬은 손에 포도주를 찍어 아이의 입에 갖다 댄다. 아이는 이걸 빨아 먹느라 순식간에 조용해 진다. 이어서 모헬은 아기 아빠에게 이  이 아이의 이름이 뭐냐고 물어본다. 아빠는 ‘벤야민’이라고 했다. 이 아이는 8일 동안 이름도 불려지지 않다가 할례 이후에 비로소 이름을 가진 하나의 존재가 된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에게 있어서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몸에 새기는 것이다.

할례식을 기다리는 아기 부모

수술을 준비하는 모헬

드디어 할례를 행하기 위해 아빠가 아들을 안고 일어서 모헬에게 간다
모헬은 마취도 하지 않고 순식간에 아기의 표피를 잘라낸다
표피가 잘려져 나가자 아기는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한다
모헬이 달콤한 포도주를 아기 입에 대자 아기는 금방 조용해진다. 할례 끝.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 일어날 때가 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엘라골짜기는 정체성의 충돌이 있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 거인 골리앗이란 정체성과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란 정체성의 충돌이 있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정체성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말씀을 통해 돌아보고자 한다.

엘라골짜기는 벳세메스와 벳구브린 사이에 있는 곳이다. 여기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투를 벌였다. 블레셋은 에게 해에서 건너 온 해양민족이었다. 그들은 철기문화를 알았고, 철기 무기를 만들어 이스라엘을 압박했다. 그동안 사울이 왕이 되면서 나름 블레셋을 잘 방어해 왔다. 그러나 길갈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은 뒤 사울은 점점 어긋나는 길을 가게 된다. 그런 사울에게 사무엘은 이제 왕이 위가 폐해질 것이라고 통보한다. 그 후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고, 사울은 악신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자의 리더십이 흔들릴 때 엘라골짜기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골리앗을 앞세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아무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골리앗이라는 거인 때문에 완전히 기선을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골리앗은 두 전장 사이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로 소개된다. 삼상 17:4-7,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뼘이요 [5] 머리에는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갑옷의 무게가 오천 세겔이며 [6] 그의 다리에는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단창을 메었으니 [7] 자루는 베틀 같고 날은 육백 세겔이며 방패 자가 앞서 행하더라 키가 2미터 90이다. 최홍만 씨보다 72센티가 더 크다. 그는 57kg이나 되는 비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위용만으로도 이스라엘 군인들은 오금이 저렸다. 그는 매일 마다 나와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외쳤다. 삼상 17:8-10,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9]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10]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이스라엘 진영에선 아무도 나설 자가 없었다. 사울왕도 쥐죽은듯 조용히 떨고 있을 뿐이었다.

골리앗은 40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나와서 이스라엘 젊은 애들의 기를 죽였다. 이스라엘 군인들 중에는 너무 무서워서 탈영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들은 왜 그토록 골리앗을 두려워했을까? 보이는 현상에 지배당했기 때문이다. 그 현상을 보고 상상력의 나래를 펼쳤기 때문이다. 저 거대한 키, 육중한 갑옷, 바람을 휙 가르며 휘두르는 철창… 자신의 목이  그 앞에서 덜렁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한 것이다. 상상의 방향을 돌려 놓지 못하고 그들은 위축되어 스스로 보잘 것 없는 자로 여긴 것이다. 두려움 자체 때문에 싸워보지도 않고 압도당한 것이다.

이 때 다윗이 등장한다. 전쟁터에 도시락 배달을 나온 것이다. 그는 골리앗이 하는 말을 듣고 이렇게 반응한다. 삼상17:26, “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다윗에 눈에 골리앗은 한낱 할례받지 않은, 그래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하나의 중생에 불과했다. 그가 거인인 것이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골리앗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의 군대를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다윗에게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고, 그는 골리앗과 대결할 한 사람으로 자원한다.

현실적인 상황을 뛰어 넘어 믿음을 발휘할 때 주변 사람들에게서 오는 반응이 있다. ‘무모하다’는 것이다. 큰 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화를 낸다. 삼상 17:28,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교만과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외부의 적과 싸워야 할 때 내부의 적이 등장한 것이다.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꼭 있다. 그러나 다윗은 형과 싸우는데 감정과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분노에는 싸워야할 대상에 대한 분명한 방향이 있었다. 또한 그의 분노에는 목적이 있었다. 하나님의 영예를 지켜내야 겠다는 것이다. 그의 마음 안에 일어난 분노는 상황이 주는 두려움이나 내부의 방해를 뛰어 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장에 서기로 자원한 것이다.

자원하여 나선 다윗을 이번엔 사울왕이 말린다. 삼상 17: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울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이 말에 다윗이 응답한다. 삼상 17:37, “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실 거룩한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정부에 대해  분노할 수 있지만 시위 현장에 나가기 까지는 행동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윗에게 그 용기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양을 치면서 위기에 처할 때 마다 하나님이 도우셨던 순간을 기억했다. 작은 승리의 반복, 그것에 대한 기억이 더 큰 도전을 위한 용기로 이어졌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쌓였기 때문이다.

사울은 그렇게 고백하는 다윗을 전장에 내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에게 자신의 군복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보내길 원했다. 골리앗을 상대하기에 걸맞도록 무장하기 원했던 것이다. 다윗은 이것을 거부한다. 삼상 17:39-40,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벗고 [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다윗은 사울의 갑옷을 벗고 자신에게 익숙한 싸움도구인 물맷돌을 고른다. 자신만의 패러다임으로 출격한 것이다.

그는 골리앗에게 선포한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그에게 하나님의 명예는 곧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그는 이미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몸에 새긴 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주인의 명예를 위하여 자신을 던진 것이었다. 물맷돌은 날아 갔고, 그것은 골리앗의 이마에 정확히 박힌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앞에 골리앗과 같은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나타날 때가 있다. 골리앗을 묵상하면 할수록 기가 죽고, 살고 싶지 않은 순간이 올 때가 있다. 그 때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를 위해 사는 자인가’ 나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세상은 골리앗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려 한다. 더 강해져야 살아 남는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있는 다국적 기업들이 독식하는 것이 당연히 여겨지는 사회가 되었다. 세계화 시대에 문을 열면서 이제 세계와 경쟁하는 시대가 되었다. IMF를 지나면서 살아 남은 자는 살아 남고, 평범했던 가정들이 위기를 겪거나 몰락하는 것을 우리는 지켜봐야 했다. 아버지가 흔들리는 것을 지켜 본 다음 세대들은 가장 예민한 시기에 세상이 주는 공포를 맛봐야 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다.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스펙을 쌓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위기감이 사회 전반에 일어났다.

골리앗이 이기는 세상에서 교회도 골리앗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축복과 번영을 설교하는 교회에서 성도들은 사울의 갑옷, 골리앗의 갑옷을 갖춰 입길 원했다. 거기서 안정감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남의 패러다임에 마음을 빼앗길수록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는 제자로서의 삶은 살지 못했다.

성도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이 도우시는 작은 승리들을 경험해야 한다. 더 튼튼한 갑옷을 축복으로 알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 익숙한 물맷돌을 찾아 손에 쥐어야 한다. 내게  익숙한 패러다임으로 승부해야 한다. 내가 뭔가 있기 때문에, 내가 뭔가 갖췄기 때문에 하는 싸움은 이미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없는 싸움이다.

베드로 사도는 말했다. 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교회는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주는 봉사 단체가 아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할 수 없고 줄 수 없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는 곳이다. 은과 금이 없어도 우린 줄 수 있다. 세상의 높은 지위에 올라가지 않아도 우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능력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지금 교회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마음의 할례를 통해 세상의 방법론과는 철저히 구별된 사람이 필요하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한 분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외쳤다.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자가 없으리라

마음 가죽을 베는 마음의 할례가 필요하다. 마음의 할례는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 이것이 여러분의 정체성이 되길 바란다. 이 정체성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하거니 타협하지 않게 되길 바란다. 이 정체성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골리앗과 같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사람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2014년 11월 22일 이익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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