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행전 12 에발산 제단: 화목을 회복하라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32]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수 8:30-33)
죽은 사람은 그 송장 위에 아무리 무거운 것을 올려 놓아도 그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죄의 무게를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무게를 느낀다면 그것은 최소한 영적으로 죽지 않았고 살아 있다는 말이다. 죄를 죄라고 깨닫게 하는 것, 그것이 율법의 기능이다. 율법을 통해 우리는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알게 된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수아가 에발산에 한 제단을 쌓는 장면이 나온다. 이 제단은 죄를 해결하기 위한 장치였다. 왜 그리심산이 아닌 에발산에 이 제단이 세워져야 했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에발산 제단(그림)
에발산에 제단을 쌓은 것은 여호수아가 임의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모세 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었다. 신 27:4-8,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것이며 [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8]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에발산 중턱에서 발견된 여호수아의 제단
하이파 대학의 고고학 교수였던 아담 제르탈은 1984년 세겜 지역 고고학 탐사 중 에발산 중턱에서 여호수아의 제단을 발견한다. 그것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아진 제단이었다. 거기서 발견된 동물 뼈와 재의 탄소 연대를 측정해보니 기원전 13세기경, 즉 여호수아 당시로 판명되었다. 제르탈은 원래 무신론자였다. 그런데 이 에발산 제단을 발견하면서 그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사실임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에발산은 실로에 하나님의 성막이 세워지기 전까지 짧은 기간 동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여호수아의 제단을 발견한 고고학자 아담 제르탈
왜 세겜이 내려다보이는 에발산에 제단이 세워진 것일까? 세겜은 여호수아 돌제단이 세워지기 약 600백년 전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첫 제단을 쌓았던 곳이다. 거기서 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만났던 곳이다. 세겜은 또한 이스라엘의 국부 야곱이 20년 만에 돌아와 우물을 파고 살았던 곳이다. 후에 예수님은 이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이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할 때가 왔다고 선포하셨다. 세겜은 그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의 언약이 시작되고 선포된 곳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성 전투를 마치고 세겜으로 가서 언약을 선포하는 의식을 한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 지파는 백성을 축복하기 위해 그리심산 위에 선다. 그리고 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 지파는 백성을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선다.
저주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십계명의 내용과 비슷하다.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세우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간음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등등 12가지 내용이다. 이것은 단순히 백성을 저주하기 위한 저주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있도록 알려주기 위해 저주를 선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의 말씀을 석회를 바른 돌 위에 기록하여 백성들이 저주를 피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법을 만들어 죄의 기준을 낮추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저주를 잘 피해갈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가나안 땅의 문화는 강력했다. 원죄 아래 놓인 인간의 원초적 욕망 역시 강력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 선포에도 불구하고 죄를 향하여 달려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갈라디아서는 말한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인류는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존재가 되었다. 로마서도 말한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어느 누구도 남들보다 조금 더 의롭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 이것이 인류의 운명이다.
여기에 에발산 제단이 필요했던 이유가 있다. 왜 그리심산이 아니라 에발산일까? 에발산은 저주가 선포되었던 산이다. 여기에 제단이 놓인 것은 어느 누구도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제단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에발산 제단에서 번제와 화목제가 드려졌다. 번제는 희생제물을 다 태워드리는 제사다.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희생제물의 피를 흘려 드리는 제사다. 인간의 죄를 위하여 어린 양의 피가 흘려져야 했다. 속죄와 화목의 근거는 그 제단에서 바쳐진 어린 양의 피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에게는 나 대신 어린 양이 피흘려 죽었기 때문에 내 죄가 사해졌다는 최소한의 믿음이 있었다. ‘내가 저주를 받아 죽어야 하는데 나 대신 저 양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와 감사를 회복하는 것이다.
에발산 제단
이 에발산의 제단은 이천년 전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한다. 바울은 말한다. 롬 3:25-26, “이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된 자녀가 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나의 죄를 속죄한다는 최소한의 믿음이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되는 유일한 조건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갈수록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죄의 무게가 더해질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사도 바울도 탄식했다. 좀 길지만 로마서에서 토하고 있는 그의 고민을 함께 읽겠다.
롬 7:12-25,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였지만 여전히 죄의 무게를 느꼈다. 그럼 우리는 죄의 무게를 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 롬 8: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에발산의 제단이 필요했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예수님의 보혈이 필요한 것이다. 그 보혈을 의지하는 자는 정죄 당하지 않는다. 그 피의 생명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에발산 제단 옆에 피어있는 꽃
그런 의미에서 에발산은 저주의 산이 아니다. 은혜와 회복의 산이다. 그 제단에서 대신 저주 받고 피흘린 어린 양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이상 정죄 당하지 않고 속죄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 마찬가지의 은혜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 갈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받고 피흘리셨기에 우리는 성령의 약속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누구를 축복하고 누구를 저주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최종관심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만든 우리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 화목한 자녀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최종 관심이다. 이것을 위해 어린 양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진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방해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지금 현재 죄의 무게를 느끼고 있다면 여러분은 십자가로 달려가야 한다. 거기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야 한다.
에발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동시에 어린 양의 피의 공로로 다시 하나님과 화목을 회복하는 자리였다. 우리 역시 죄의 무게를 느낄 때마다 예수님의 저주받으신 십자가로 나아가야 한다. 거기서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야 한다. 그리하여 다시금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해야만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훌륭한 사람이 되어 많은 업적을 이루고 축복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인생의 최종목표가 될 수 없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는 것,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최종 목표이다. 바라기는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정죄 당하지 않는 인생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5월 27일 설교 이익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