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3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에베소서 5 부르심의 한 소망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7, 11-12)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불러주었고 그 초대에 응하여 우리가 여기 있다. 여기 우리 중엔 회사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에 오신 분도 있다. 개인적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곳에 오신 분도 있다. 아무도 안 불렀는데 스스로 오신 분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결정인 것 같아도 그 뒤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오늘 바울은 부르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에베소교회의 사람들은 부르심가운데 한 교회로 모였다. 오늘 욥바교회에 모인 우리들은 과연 어떠한 부르심 가운데 있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바울은 1절에서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이 편지를 쓰고 있다. 그러나 감옥은 그의 몸을 가둘 수 있지만 그의 영혼을 가둘 수 없었다. 바울은 자신을 ‘주 안에서 갇힌 자(The prisoner of the Lord)’ 라고 표현한다. 바울의 전 존재는 오직 주 안에 갇혀 있었다. 그것은 자발적이고 행복한 갇힘이었다. 갇혀 있는 사람이 지금 갇혀 있지 않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해 권면한다. 1-3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 지역에는 그 동안 없었던 교회라는 공동체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서로 상종하지 않았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회라는 한 울타리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 이들은 로마제국의 다양한 지역에서 살다가 에베소라는 지역으로 모이게 되었다. 바울은 그것을 ‘부르심 받은 일’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외인구단처럼 모인 이들이 하나 되기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워낙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였기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라’ ‘오래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바울은 명하고 있다. 바울은 그것이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욥바교회 역시 수는 작지만 정말 다양한 배경 속에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다. 나와 달라서 용납이 잘 안되는 이유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교회가 그런 곳이다. 힘든 곳이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내야만 하는 곳이다. 그것이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일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세상에서는 개인이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개인의 탁월함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개인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관계 속에서 겸손과 온유와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회라는 공동체의 부르심에 합당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묶어서라도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어서 부르심의 대상을 설명한다. 4-6절,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면면을 보면 외인구단처럼 서로의 성분과 기질이 달랐다. 그러나 그들에겐 공통된 부르심의 소망이 있었다. 그들이 믿고 따르는 주님이 하나라는 것이다. 그들이 고백하는 믿음도 하나라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세례를 통해 한 몸된 교회를 이루었다. 바울은 그것을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똑같은 성령의 세례를 통해 유대인인지, 헬라인인지, 종인지, 자유인인지 하는 구분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또한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했다. 바울은 그것을 로마서 8장 14-15절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갖고 있었던 부르심의 한 소망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One Lord, 하나의 주, one faith, 하나의 믿음, one baptism, 하나의 세례, one God and Father. 하나의 하나님 아버지.
교회는 이 부르심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 부르심의 소망을 따라 움직인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은 지상의 교회가 이 부르심을 따라 견고히 세워지길 누구보다도 원하고 계신다. 그래서 주님은 부르심을 따라 교회로 모인 자에게 각각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 7절,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리고 각자의 부르심에 맞게 직분을 주어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로 세우신다. 11-12절,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에 나오는 직분들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사도’라는 직분은 현재 사용되는 직분은 아니다. 사도는 ‘보냄 받은 자’라는 헬라어 ‘아포스톨로스’에서 온 말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에 의해 보냄을 받으면서 사도로 불려진다. 마 10:1-2, 5,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바울과 바나바도 사도행전에서 사도로 불리고 있다. 사도들의 특징 중 하나는 이미 교회가 세워진 지역을 넘어서서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다. 고후 10:16,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도들의 비전이었다.
두 번째, ‘선지자’ 역시 현대 교회에서 공식적인 직분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구약 시대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자였다. 신약에서도 여전히 선지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자로 활약한다. 행 15: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선지자들이 교회 내에서 말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역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복음 전하는 자’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존재 목적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5:20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대단한 사명 선언이다. 그래서 복음 전도자는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을 향해 항상 움직이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네 번째, ‘교사’다. 교사는 성경을 바로 해석하고 사람들을 진리로 양육하는 사람이다. 당시 아볼로는 순회 교사로 유명했다. 바울이 사도와 복음 전도자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씨를 뿌린 곳에 순회 교사들은 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며 팔로업을 하는 사역을 감당했다. 데릭 프린스 목사님은 지금까지 살펴본,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교사를 ‘mobile ministry’라고 구분했다. ‘움직이는 사역’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지역교회에 속했지만 한 지역교회를 넘어서서 움직이며 사역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르심은 한 지역교회뿐만 아니라 열방에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움직이는 사역자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목사’가 나온다. 목사는 한 지역에 거주하며 하는 사역이다. 바울은 그레데 지역 교회를 견고히 세우기 위해 디도를 목사로 세움을 볼 수 있다. 딛 1: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목사는 그들이 거주하게 된 그 도시와 지역을 섬기기 위해 세워진 사역자다. 목사는 한 지역교회를 견고히 세워나가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가는 일을 하는 것이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은 상당히 역동적이다. 지역 교회이지만 한 지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부르심의 한 소망을 따라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다. 교회를 통해 가족이 세워지는 것이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는 가족이라는 바운더리를 넘어서서 하나님나라의 가족을 찾고 세우기 위해 존재하는 부르심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2018년 2월 3일 현재 텔아비브 욥바교회에 모여있다. 우리는 다양한 배경 속에 한 교회로 모였다. 섬겼던 교회도 다르고, 신앙의 칼라도 다르다. 국가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부르심이 있다. 하나의 주,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 하나의 하나님 아버지라는 부르심 아래 한 몸된 공동체로 모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봐야 한다. ‘나는 지금 이 부르심의 한 소망을 따라 하나됨을 힘써 지키고 있는가?’ ‘나는 지금 주님이 내게 주신 은사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이곳 이스라엘로 부르셨다. 올 한 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이 더 분명해지길 바란다. 그 소망이 우리를 함께 이곳으로 모이게 하신 주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자 하는 열정으로 이어지게 되길 바란다.
바라기는 지금 욥바교회 성도로 함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이 성령 안에서 더욱 하나 되길 원한다.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 되기를 힘쓸 수 있을까? 고후 10:5-6절을 보자.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우리는 누가 나의 주인인가 질문해야 한다. 주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내려 놓고 우리는 우리의 주인 아래 복종해야 한다. 그래야 한 주인 아래서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이 주님 되실 때 서로에게 있던 벽이 무너지고 하나됨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주님께 복종하지 않는다면, 내 생각이 그 분께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결코 벽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주님의 가치는 옳고 그름에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을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긍휼과 사랑으로 형제의 허물을 덮고, 나와 다른 형제의 발까지 씻어줄 수 있는 것이 겸손이고 사랑이다. 서로 다르기에 충분히 선을 긋고,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들수록 더더욱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를 용납하기를 선택하는 결단이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부르심의 한 소망을 따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함께 성장하는 은혜가 있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