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2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고린도전서 2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삶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8-10)
1984년 작고한 기독교 철학자 프란시스 쉐퍼 목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 우리 시대에 사람들을 죄와 악에 물들게 하는 가장 강력한 반 기독교적인 이단 운동이 있다.” 여기서 이단 운동이 뭘까? 그가 말한 이단은 다름 아닌 ‘세속적 인본주의’(secular humanism)’였다. 그는 오늘날 기독교와 삶의 모든 영역에 세속적 인본주의가 깊게 침투해 있다고 경고했다. 세속적 인본주의의 핵심은 뭘까? 그것은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속적 인본주의에서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 같은 하나님을 추방하고 인간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인본주의의 핵심이다.
고린도교회 문제의 핵심은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람의 지혜를 따르는 데 있었다. 즉 고린도교회 안에 누룩처럼 남아있는 인본주의가 그 교회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지혜가 필요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지 않고 세상의 지혜를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우리의 삶에 남아 있는 인본주의적인 신앙을 진단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고전 2: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이 편지를 쓰기 3년 전인 AD 51년 고린도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그 때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세상의 지혜와 수사학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전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는 십자가만 전하기로 작정했을까?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고전 2:4-5,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은 그의 복음 전도에 있어서 인간적인 방법을 쓰기 원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나타나길 바랬다.
아레오바고 언덕
그런데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알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 오기 전 아테네에 도착한다.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철학과 사상을 좋아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라는 철학자의 언덕 위에 세워 그의 이야기를 듣기 원했다. 이 때 바울은 철학자들과 시인의 말을 인용하며 세련된 설교를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행 17:32-34,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는 조롱을 받았고 그의 설교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은 몇 사람밖에 되지 않았다. 바울은 복음 전도에 있어서 철학적인 접근이 별로 소용없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하여 바울이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갈 때에는 전도 방법을 바꾼 듯하다. 행 18:1,5,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5]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보다 직접적으로 전했다.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단순한 진리를 전했다. 그의 공격적인 복음 설교에 물론 대적하며 비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결실도 많았다. 행 18: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이러한 결실이 있었기에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원색적으로 전하기로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
고전 2:6-7,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그러나 바울은 지혜가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온전한 자들, 들을만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를 나누었다. 그 지헤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세상의 지혜는 무엇인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지혜다. 즉 인본주의를 말한다. 인본주의는 반드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하나님의 지혜없이 세상의 지혜만 따를 때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즉, 하나님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최초의 인류가 살았던 에덴동산에서 시작됐다.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하신 열매를 따먹으면서 인본주의는 발동되었다. 사탄은 하와에게 접근하여 이렇게 말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탄은 하나님을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존재로 소개하고 있다. 사탄은 이러한 거짓말로 하와 안에 있는 휴머니즘을 자극한다. 하와 안에 휴머니즘이라는 누룩이 심어졌을 때 선악과가 달리 보였다. 그것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열매로 보인 것이다. 하와 안에 휴머니즘이라는 누룩이 심어졌을 때 그녀는 하나님을 이전과 다른 존재로 보게 되었다. 즉,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자로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하나님의 명령은 따르지 않아도 되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욕구를 따라 행동했다. 선악과를 선택한 하와는 이미 하나님 중심에서 자신의 본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인본주의자가 된 것이다.
인류가 인본주의라는 이상을 처음 실현시켜보려 했던 것은 바벨탑 사건이다. 그들은 탑을 쌓으며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결의한다. 하나님 없이 자신들만의 안전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언어가 혼잡하게 된다. 인본주의를 추구한 결과 세상은 더 혼란스러워진다.
고린도 교회에도 인본주의라는 누룩이 퍼져있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지혜로워 보이는 사람들을 따르며 서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인본주의라는 관점으로 서로를 바라보았기에 서로를 판단하며 하나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 2:8-9,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지혜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한다. 그 결과 그들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지 않기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한다. 바울은 그들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에 속한 사람은 헬라어로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다. 프쉬키코스는 ‘프쉬케’에서 나온 말이다. 프쉬케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에로스와 사랑에 빠진 여인이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에로스적인 사랑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본능에 끌리는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상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은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인간의 본능을 중시한다. 유발 하라리 같은 인본주의자들은 ‘성경은 중세 때나 사람들을 인도했던 가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요즘 시대에는 인간의 본능과 감정 앞에 성경의 기준을 들이댈 수 없다고 말한다. 인본주의자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한다. 하나님의 기준을 없애버리려 한다. 그래서 과거 금지된 성적인 모든 억압을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성연애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인본주의자들의 주장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주장하는 상대주의는 상당히 관용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 기준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결코 관용적이지 않다. 그들은 성경의 기준을 따르는 사람들을 공공의 적으로 만든다. 그들은 성경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인본주의의 종국은 언제나 혼란이라고 말한다. 인본주의적 가치는 결국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과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며 인류를 혼돈가운데로 몰아넣게 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인본주의의 결과를 이렇게 기술한다. 롬 1: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6-28,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인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이 중요한 것이다. 이 인본주의는 교회 안에도 들어왔다.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기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이루기 위해 기도한다.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은 있으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순종은 없다. 영광은 구하지만 십자가를 따르기 위해 감당해야 할 희생과 헌신은 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기복주의 신앙은 인본주의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한편 인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을 통해 교회 안에 들어왔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박애주의자로 묘사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든 인권을 존중하는 휴머니스트로 여긴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를 강조하지 않는다.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십자가 없이, 회개없이 진정한 인간의 해방과 구원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 사회는 점점 인본주의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고전 2:10-13,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우리는 성령으로 복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성령을 따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성령이 가르쳐주신 것을 따를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게 된다.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다림줄을 역사와 개인에게 드리우신다. 다림줄은 건축할 때 건물이 바로 세워지도록 줄에 추를 매달아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다림줄을 잡고서 환상 중에 말씀하셨다. 암 7:8,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인본주의자들은 이 하나님의 다림줄을 걷어내길 원한다. 인간을 위한 법을 만들며, 그 대신 하나님이 정한 기준들을 마음대로 없애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림줄은 그러한 시도로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분명히 그들에게 드리워지게 될 것이다.
인본주의 사회에게 점점 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림줄을 기억하고 그 다림 줄을 따라 인생을 세울 때 우리의 인생은 바로 세워지게 된다. 그것이 세상에서는 고지식해보여도 하나님의 지혜를 선택하는 삶인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도전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은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길을 찾을 수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엎드려야 한다. 우리 안에 철저히 인본주의라는 누룩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 주 전 기도하던 중 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꿈에 누가 교회 점심 식사 후에 양은그릇을 설거지를 했는데, 두 시간도 못되어 곰팡이가 모든 그릇에 퍼져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만큼 누룩은 전염성이 강한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 날 나는 나 자신과 교회 전체를 예수님의 보혈로 씻는 기도를 했다. 우리는 육신의 성향을 가진 자이기에 쉽게 육신의 생각과 본성의 영향을 받는다. 세상에 있는 인본주의라는 누룩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 삽시간에 퍼지게 될 수 있음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인본주의라는 고상해보이는 가치와 결별해야 한다. 겸손히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그럴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 우리에게 이 시대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신다.
바울은 말한다. 고전 2:15-16,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바울은 성령을 따르는 자였다.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가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안에 있지만 여전히 육신에 속하여 하늘의 지혜를 따라 살지 못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사랑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금지명령이 아니었다.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우리 삶 가운데 드리운 하나님의 다림줄은 우리의 삶을 간섭하고 불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더욱 바르고 견고하게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기준을 제거하려는 이 불경한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더욱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