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5 누룩 없는 교회

2018년 6월 2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샤밧설교

고린도전서 5 누룩 없는 교회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고전 5:6-8)

 

지금 이 교회로 이사 오고 나서 나는 해마다 곰팡이와의 전쟁을 벌였다. 비가 새서 건물에 비가 스며들면서 축축한 건물에 곰팡이가 자주 퍼졌기 때문이다. 이번 주에 교회 몇 군데 페인트 칠을 했다. 우기 때 비가 새서 곰팡이가 난 부분을 뜯어내고 다시 하얗게 칠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곰팡이로 얼룩진 부분을 제거하니 기분이 좋았다.

 

유대인들은 해마다 유월절을 맞이하면서 누룩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성경 말씀 때문이다. 출 12:15,19,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19] 이레 동안은 누룩이 너희 집에서 발견되지 아니하도록 하라 그래서 유월절 한 주간은 누룩이 없는 절기라고 해서 ‘무교절’이라고도 한다. 유월절 일주일 동안 유대인들은 평소 먹던 빵을 먹지 못하고 ‘마짜’라는 무교병만 먹는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유월절 기간 ‘하메츠’라고 부르는 누룩이 들어간 음식을 먹거나 집안에 두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다. 그래서 그들은 유월절이 시작되는 아침에 누룩이 들어간 빵이나 음식들을 다 가져와 동네 회당 근처 공터에서 태운다.

 

유월절 첫 날 아침 누룩이 들어간 음식(하메츠)을 태우는 유대인 가족 

 

집안에 있는 누룩은 이렇게 태워버리면 되지만 유대인 상점에 있는 누룩이 들어간 제품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다 태울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상징적인 거래를 한다. 그것을 유대인이 아닌 다른 이방인 한 명 (주로 아랍계 이스라엘인)을 선정해서 그에게 파는 것이다. 그래서 해마다 이스라엘 최고랍비가 재무부 장관의 입회 아래 누룩제품(하메츠)을 파는 거래를 한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5만 세겔($14,000)을 그 이방인에게서 받는다. 그런데 유월절이 끝나는 일주일 뒤에 다시 이 돈을 돌려주면서 누룩 제품은 다시 유대인의 소유가 된다. 이렇게 함으로 유월절 기간 동안 유대인이 소유한 누룩 제품은 유대인의 집과 상점에서 하나도 없게 되는 셈이다. 유대인들이 이처럼 출애굽 이후 3500년 동안 해마다 이 누룩과의 전쟁을 벌여왔다.

 

2018년 3월 유월절에 있었던 하메츠 거래 (출처 The Times of Israel)

왼쪽부터 후세인 자바르, 세파라디 최고랍비 이쯔학 요세프, 재무장관 모쉐 카흘론, 아쉬케나지 최고랍비 다비드 라우

 

바울 당시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고 권면한다. 그가 말한 누룩과의 전쟁은 무엇이었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고전 5: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룩은 적은 양으로도 빵을 부풀리는 효과가 있다. 여기서의 적은 누룩은 다름 아닌 ‘음행의 죄’였다.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 중에 계모와 동침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아버지가 죽고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아버지의 첩과 성관계를 하게 된 것 같다. 구약에서는 명백히 그런 성관계를 금하고 있다. 신 27:20, “그의 아버지의 아내(계모)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이 음행이라는 적은 누룩이 처음 진리 위에 세워진 고린도교회를 변질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그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는 그러한 일은 이방인 중에도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질책한다. 고전 5: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음행의 문제을 통한히 여기지 않았다. 당시 고린도 사회가 음란했기에 그들 역시 음행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바울은 그 일을 행한 자를 출교해야 한다고 하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전 5: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오늘날 교회에서 출교를 시행하는 교회는 많지 않다. 출교 조치를 하더라도 다른 교회에 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출교는 모든 사회적 관계가 끊어지는 엄중한 징계였다. 바울은 그 사람이 출교 조치를 통해 육신으로는 고통을 당하더라도 다시 회개하며 그 영이 구원받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제 문제의 초점을 음행을 행한 그 사람에게서 돌려 고린도 교회 전체 성도들을 향해 말한다. 고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너희는 누룩이 없는 자다” 이것이 바울이 선포한 고린도 교회의 정체성이었다. 음행의 문제가 발생했고 그것에 대해 통한이 여기지 않을 정도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원래  ‘누룩이 없는 자’라는 것이다. 그것은 유월절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무교절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출애굽이 시작되던 밤 모든 애굽의 장자들이 죽는 재앙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에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다. Pass over, 유월절은 죽음의 재앙이 넘어가면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린 양의 피가 있었기에 애굽을 살아서 나오는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출 12:39,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탈출할 때 급히 나와야만 했었다. 그래서 빵을 만들 때 누룩을 넣어서 충분히 부풀릴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누룩을 넣지 않은 딱딱한 빵을 급히 만들어 가지고 나왔다. 그래서 그들에게 무교병은 출애굽을 기억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음식이 되었다. 신 16:3,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 따라 유대인들은 해마다 유월절에 무교병을 먹으며 조상들이 고난의 떡을 먹었던 때를 기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급히 구원하셨던 그 순간을 다음 세대와 함께 기억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교병을 먹는 의미는 고난의 시대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해마다 7일 동안 그 맛없고 딱딱한 무교병을 먹어야 했을까? 왜 7일 동안 누룩이 그들이 사는 집에서 발견되지 않도록 해야 했을까? 그것은 유월절이 과거에 끝난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월절을 경험한 유대인들이 ‘오늘’이란 현재의 시간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유대인 랍비들은 누룩(하메츠)이 ‘오만함, 악한 성향, 우상숭배’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누룩을 제거하라고 하신 궁극적 이유는 애굽의 문화, 애굽 우상숭배의 영향력을 제거하라는 뜻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애굽에 살면서 애굽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길들여졌다. 누룩의 특징은 누룩이 들어간 것의 성질을 바꾼다는 것이다. 누룩이 들어가 발효가 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 옷에 곰팡이가 나면 입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받아들인 것은 힘과 부를 숭배하는 정신이었다. 그 누룩이 이스라엘을 변질시켰다. 변질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 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죄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사건이 지나고 한 달 만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출 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 백성들 안에 누룩이 다 제거되지 않았기에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서도 과거로 돌아가려는 정서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떡을 배불리 먹던 때, 애굽에서 풍요롭고 안락했던 삶을 동경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룩을 제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거룩한 영적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변질시키는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월절의 진정한 의미는 무교절과 함께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물론 유월절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 구원 이후 우리의 삶의 누룩들, 즉 우리를 변질시키는 악한 영항력과 우상들을 제거할 때 유월절에 시작된 그 구원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하도록 우리의 삶을 변질시키는 누룩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제거해야 하는 사명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출 12:17,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로 삼아 대대로 이 날을 지킬지니라” 하나님은 무교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군대’라고 부르셨다. 따라서 더이상 애굽의 노예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변질되지 않은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서는 것이 무교절의 참된 영적 의미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찾아 왔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의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은 그 제안을 거절하시고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그 말에 제자들은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수군댔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마 16:11-12,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의 교훈이 제자들을 변질 시킬 수 있기 때문에 주의를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누룩은 무엇인가?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된 자’라는 히브리 단어 ‘페루심’에서 나온 말이다. 이들이 등장한 것은 기원전 3세기였다. 당시 헬라제국의 영향으로 인본주의적 헬레니즘이 확산되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세속화의 영향에서 분리되어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지켜내길 원했다. 모세의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철저히 지킴으로 유대교의 세속화를 막기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철저히 지키는 종교행위를 통해 결국 자기 자랑과 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람의 가르침인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잘못 가르쳤다. 그들은 사람의 유전을 철저히 지키면서 자신을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포장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며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 12:1)고 하셨다. 그들의 삶은 종교행위라는 누룩을 통해 실제보다 더 부풀려 보이는 포장된 삶이었다. 그들의 종교행위는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완벽해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다르다. 막 7:6-9,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사두개인의 누룩은 무엇인가? 사두개인들은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들과 그에게 충성했던 친인척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당시 예루살렘의 부유한 귀족층과 산헤드린 회원 대부분이 사두개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헤롯왕이나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유대나라에 살면서도 그들이 늘 지향하는 것은 로마의 힘이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대하지도 않았고, 몸의 부활이나 사후 심판을 믿지도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현재였다. 현실 세상에서 권력의 중심이 되는 것이었다. 이 땅에서 번영하고 성공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힘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사두개인들의 누룩이었다.

 

종교적 열심이 있는 사람은 바리새인의 누룩으로 변질되기 쉽다. 세속적 야망이 있는 사람은 사두개인의 누룩으로 변질되기 쉽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러한 교훈에 물들지 않기를 원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누룩 없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누룩 없는 자로 살기가 쉽지 않다. 우리 육신 안에는 과거 구원 받기 이전의 삶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누룩과 같은 영향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누룩들은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살기보다 과거 죄의 노예로 사는 것을 더 동경하게 한다. 우리 안의 누룩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의 나보다 더 부풀려 보이도록,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도록 우리를 포장하게 한다. 우리는 이 누룩과 함께 종교생활에 열심 있는 자로 포장한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주님 한 분을 위한 삶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이 누룩들은 교회 안에서도 성공과, 번영과 힘을 추구하게 한다. 누룩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누룩 없는 자로 사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한다. 고전 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바울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순전함과 진실함의 삶을 살라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도전한다. 그런 삶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누룩 없는 삶을 살기 위한 한 가지 전제가 있다. 그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이루어진 구원의 은혜를 먼저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망의 저주를 받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피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믿을 때 우리는 사망의 저주를 받지 않는다.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구원받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 무교절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이처럼 내 삶에 유월절에 시작되 구원의 은혜가 있고 나서이다.

 

그 후에 우리는 우리의 삶과 교회 공동체 안에 발생하는 누룩들을 찾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세상의 누룩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바꿔버린다. 그것은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교묘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변질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아니라 사람이 기준이 되는 인본주의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묵은 누룩인 것이다. 누룩이 들어오면 그것은 반드시 공동체를 변질시킨다. 누룩은 악을 정당화하고 악을 허용하는 것을 관용과 사랑으로 묘사한다. 동성애와 불륜도 아름다운 것으로 묘사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이러한 누룩 없이 순전함과 진실함을 회복하는 거룩한 교회가 되길 원했다. 거룩한 교회만이 세상을 흔들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욥바 교회가 그러한 교회가 되길 기도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것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진실한 자가 되도록 매일같이 우리 안의 묵은 누룩을 제거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준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물들지 않는 순전하고 진실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나의 삶속에서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지 못하도록 나의 삶을 변질 시키는 누룩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는 인본적인 생각과 가치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그것을 발견하고 제거해야 한다.

 

교회는 성도가 많아지는 것이 부흥이 아니다. 성도를 늘리는 것이 교회의 목적도 아니다. 누룩이 제거된 거룩하고 순전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 교회의 부르심이고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 교회에서 모든 묵은 누룩을 제거하시기 원하신다. 주님 한 분을 위해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일어서는 교회가 되길 원하신다. 그렇게 되길 나는 기도하고 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누룩 없는 순전한 교회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군대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능력 있게 일어서는 교회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고린도전서 5 누룩 없는 교회”의 1개의 생각

  1. 김수진 답글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구원받았다고 방종하는 삶을 살지 않고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주의 성전된 몸을 정결하게 하는 삶에 힘써야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