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4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고린도전서 10 사랑을 연습하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바울 당시 고린도에는 12개의 신전이 있었다. 그 중 사람들이 가장 몰렸던 곳은 아프로디테 신전이었다고 한다. 아프로디테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이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미모에 대한 자존감이 매우 높았던 신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누가 그 자존감에 상처를 내면 질투심이 불타올라 신이고, 인간이고 저주하거나 시련을 주었던 것으로 나온다. 아프로디테는 신화속에서 다양한 애정행각을 벌이며 여러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 이런 여신을 숭배했던 고린도 사람들의 삶은 어땠을까? 고린도는 성적문란으로 유명한 도시가 된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고린도에는 세계 각지에서 원정 매춘을 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기록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숭배했던 도시,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섬기며 사랑에 대한 로망을 키웠던 도시가 바로 고린도였다. 그런데 바울은 이곳에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사랑’에 대해 편지를 쓴다. 그것이 우리가 살펴 볼 고린도전서 13장이다. 바울은 왜 이 도시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사랑에 대해 가르쳐야 했을까?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사랑과 어떻게 달랐을까? 바울의 편지를 통해 우리는 어떠한 사랑을 구해야 할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바울이 말했던 사랑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당시 헬라 세계에 퍼져 있었던 사랑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에로스’다. 에로스는 그리스신화에서 사랑을 담당하는 신이다.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로마신화에서는 큐피드라고 한다. 그가 쏜 화살에 맞은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낭만적으로 그리는 사랑이 바로 에로스다. 마음에 꽂히면서 시작되는 사랑… 그것은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잘못 꽂히면 잘못된 만남이 된다.
그리스인들은 신화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예로부터 아름다움과 힘을 추구했다. 그들에게 아름다움과 힘의 결정체가 바로 에로스였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사랑은 종교가 되어버린다. 신전을 지어 아름다움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숭배한 것이다. 너도 나도 사랑의 화살을 맞은 고린도인들로 인해 고린도는 ‘에로스로 가득한 도시’가 된다. 음행과 근친상간, 동성애로 유명한 도시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신이 되어버린 사랑은 악마가 된다’고 C.S. 루이스는 말했다. 하나님을 떠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절대화되었을 때 사랑은 오히려 추한 것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도 아름다움과 힘을 추구한다. 아름답고 힘 있는 사람이 사랑의 대상으로 관심을 받는다. 에로스적 사랑이 각광받는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진정한 사랑에 목말라 한다. 그런 사회에서 못 생기고 힘 없는 건 죄가 된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외모의 기준이 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인으로 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사랑을 먹지 못해 배고픈 세상이 된다.
또 다른 사랑의 유형은 ‘필레오’다. 친구간의 사랑을 의미한다. 에로스의 사랑이 욕망, desire라면 필레오는 기호, like라 할 수 있다. ‘나 너 좋아…’ 좋아서 끌리는 것이 필레오다. 그러나 이 필레오의 사랑에도 한계가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파벌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자신들의 기호에 따라 파벌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 교회가 아볼로파, 바울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었던 것이다. 사실 어떤 사람에게 끌리고 좋아하는 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공동체 분열의 씨앗이 된다면 우리는 나 자신의 기호마저도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랑의 유형으로 ‘스톨게’가 있다. 부모의 사랑을 말한다. 부모님의 사랑은 숭고하다. 그러나 이 사랑도 이기심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 자식이기에 사랑한다는 의식이 그 뿌리에 있다. 나를 사랑하는 차원에서 내 자식을 끔찍히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내 자식이 아닌 대상을 향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이상 우리가 살펴본 세 가지 사랑은 모두 인간의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영역을 뛰어 넘지 못한다. 특정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모든 인간을 보편적으로 사랑하지 못한다. 에로스는 못 생기고 약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 필레오는 내 스타일이 아닌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 스톨게는 내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 아가페의 사랑이 아닌 인간의 사랑은 결국 편애와 불평등을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길 원했다. 그것이 바로 아가페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아가파오)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가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말한다. 우리가 여전히 죄인일지라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사랑이 아가페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바로 이 아가페 사랑을 설명하고 있다.
고전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방언과 같은 은사에 열광했다. 지식을 추구하던 그들에게 예언의 은사가 더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나타나는 은사들로 인해 오히려 교만해졌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받은 은사들을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판단하는데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아가페 사랑이 없으면 너희가 자랑하는 방언도, 예언도, 구제 행위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도전한다.
예수님을 통해 아가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삶이 변화되는 경험을 한다. 고후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놀라운 전환이다.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할 때 살아가는 목적, 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어서의 혁명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된다. 이것이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있는 비결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 닮은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4절 이후부터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아가페 사랑을 하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참지 못했고, 온유하지 못했으며, 서로 시기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러한 그들을 책망했었다. 고전 3: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며,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고전 13:5,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번 주에 한국에서 출장 온 집사님 한 분을 만났다. 오랫동안 이스라엘에서 일하다가 최근에 한국에 가신 분이다. 한국 사회가 자기 살기에 바뻐 서로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한탄을 하셨다. 모두가 자기 유익을 구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사랑이 없어 상처받는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한 권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던 것을 하나 하나 기억하며 그것을 보복하는 것이 똑똑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아가페 사랑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아가페 사랑은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주는 사랑이다. 거절 당한다 할지라도 주는 사랑이다. 예수님이 그런 사랑을 하셨다. 그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셨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화 내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결국 제자들을 변화시켰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다하는 사람들로 만드셨다. 아가페 사랑이 그런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변덕과 결점 때문에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강점과 잠재력을 보고 계속해서 그들을 믿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변함없이 아가페의 사랑을 선택할 때 원수도 친구가 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가페의 사랑이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 one side love에 익숙해져야 한다. 감정이 일어나서 하는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나에게 상처줄 때, 그 죄를 덮어주는 사랑은 위대한 것이다.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고전13:6-7,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세상 법정에서 서로를 고발했다. 바울은 그러한 그들에 대해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고전 6:8) 라고 말하며 통탄해 했다. 우리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잘 안되길 은근히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들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세상에 고발하려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서로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진리안에서 함께 세워져가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부름 받은 형제이기 때문이다.
고전 13:8-10,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1]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예언과 방언과 지식은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 없이 행해질 때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해주는 것이다. 내가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고, 지식이 많아도 그것이 나를 완전하게 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본질상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불안해 한다. 세상이 우리의 부족함을 알게 될까봐 더욱 우리는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100%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세상 두려울 것이 없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아가페의 사랑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아가페의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다. 자기 중심적이었고, 이기적이었다. 자기가 최고라는 거짓된 자만심으로 가득했다. 아가페의 사랑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린 아이의 수준을 벗어나게 된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는 장성한 인격을 갖게 된다.
이 사랑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습이 필요하다. 시간을 두고 공동체라는 상황에서 쌓여져 가는 것이다. 교회가 내가 사랑할만한 사람들만 모인 곳이라면 우리는 아가페를 연습할 수 없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교회는 내가 사랑하기 힘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래서 교회는 아가페의 사랑과 용서를 실습하기 위한 최선의 학교이다. 이것은 가정과 직장도 마찬가지이다.
사랑하는 가족 역시 사랑하기 힘들 때다 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서 사랑할 이유를 찾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아가페의 사랑을 하라고 부름 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경계를 확장해야 한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 평소 나의 관심과 주목을 끌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서도 아가페의 사랑이 필요하다. 그들이 내 마음에서 멀리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가까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 삶의 모든 관계에서 아가페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중단될 수 없다. 그것은 내 안의 두려움 때문에 포기될 수 없다. 오직 아가페의 사랑만이 서로의 관계를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아가페의 사랑이 있을 때 분열은 치유된다. 아가페의 사랑만이 하룻밤 불타버리는 사랑이 아니라 목마르지 않는 사랑의 관계를 만든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참된 사랑을 낳는 것이다. 이 사랑이 여러분의 가정에서 계속 되길 바란다. 이 사랑이 나와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안에서 계속 연습 되길 바란다. 이 아가페의 사랑이 참된 사랑을 모르고 에로스적인 로망만 키우고 살아가는 세상에 전해질 수 있길 바란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경험한 교회의 사명인 것이다. 바라기는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을 선택하고 연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