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1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고린도전서 11 부활이 있기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전15:31-32)
고린도전서 강해 마지막 시간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을 부활에 대해 설명한다. 고린도교회 성도 중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영혼은 불멸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이 다시 부활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렸다고 증거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을 조롱했다.
아테네의 철학 중 에피쿠르스 학파 역시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을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죽음은 오지 않는다. 우리가 죽었을 때 죽음은 우리에게서 떠나간 것이다.’ 궤변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걱정하지 말고 오늘을 즐기라’는 쾌락주의자가 된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부활에 대한 정확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15장 전체에 걸쳐서 부활에 대한 개념정리를 해준다. 부활은 내세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믿음은 현세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 그 삶의 목적을 결정한다. 그래서 부활에 대한 믿음은 중요한 것이다. 오늘 말씀을 함께 살펴보며 부활에 대해 개념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고전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은 먼저 부활이 ‘성경대로’ 구약의 예언에 따라 실제 일어난 사건임을 설명한다. 시 16: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베드로는 이 시편의 예언을 인용하며 부활을 증거한다. 행 2:31-32,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부활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구약에서 이미 예언된 사건이었다.
바울은 이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러 증인이 있었음을 말한다. 고전 15:5-8,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가장 가까이 있던 제자들이 먼저 목격한다. 그들은 부활 이전에만 해도 두려워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다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부활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은 바뀐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담대히 전하는 증인이 된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미친 놈이 죽기까지 부활을 증거하겠는가? 제자들 대부분은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하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오백여 형제 중에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 때까지 대다수가 살아있었다. 그들은 부활에 대해 살아 있는 증인이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부활의 증인이었다. 그는 평소 예수님에 대해 별 믿음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나서 믿음을 갖게 된다. 그 후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증인 중 가장 드라마틱한 증인이다. 그는 예수 믿는 자를 잡아 가두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부활의 증인이 된다. 이러한 부활의 증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이어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졌을지 설명한다.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된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 죽음이라는 운명을 맞이 한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지 못했다면 예수님 역시 죄인으로 죽은 것이 된다. 그러면 예수님은 죽음에서 우리를 건지실 구원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죽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은 이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한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초실절은 유월절 후 첫번째 안식일 다음 날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초실절인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다. 그리하여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을 위한 첫 열매가 되셨다. 이것은 예수를 믿고 죽은 자들 역시 예수님처럼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이다.
고전 15:21-23,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다음에 이제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부활하게 된다고 말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몸의 부활을 경험한다. 주님과 함께 영원을 누리기 위해서 다시 살리심을 받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께 속하여 영원을 누릴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이어서 바울은 부활 소망 때문에 어떻게 자신의 삶이 바뀌었는지 자기 간증을 한다. 고전 15:30-31,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복음을 위해 헌신했다. 고후 11:23-27,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 왜 이런 위험을 무릅쓸 수 있었을까? 부활에 대한 소망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바울의 삶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는 삶이었다. 날마다 죽은 삶은 어떤 삶일까? 고후 4:10-12,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날마다 죽는 삶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감당하는 삶이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고통과 수고를 감당하는 삶이다.
고전 15: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라고 증거한다. 그리하여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로부터 극심한 반대에 부딪힌다. 그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들에겐 영원에 대한 소망이 없다. 그래서 ‘죽기 전에 오늘 먹고 마시자’라는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된다. 쾌락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오늘을 사는 것이다.
고전 15:33-34,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 이 말은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희곡작가 메난더의 작품에 나오는 말이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 이후의 삶은 없다. 그들은 남을 위해 살지 않는다. 그들은 하루 하루 최대한의 쾌락을 누리는게 목적이 된 삶을 살게 된다. 그런 태도는 결국 선한 행실을 더럽히고 죄를 짓게 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런 세상의 쾌락주의에서 벗어나게 되길 바랬다. 그리고 깨어 부활신앙 위에 서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고전 15:40-42,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땅에서는 세상의 기준에 따라 영광이 주어진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세상의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그 영광이 정해진다.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자신을 다 드린 자가 장차 하늘에서 받을 영광은 세상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말한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부활 소망이 없다면 공동체에 헌신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그래서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공동체에 헌신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위해 수고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활 소망이 있다면 주의 일에 힘쓰는 것보다 더 값진 것이 없음을 안다. 그러서 바울은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한다.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 않은 줄을 그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부활은 이천 년 전에 끝난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모든 사람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내기 위하여 여전히 유효한 사건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지금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내가 다시 부활한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영원을 위해 살게 된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어차피 죽을 인생, 오늘 먹고 마시자’라는 운명론에 따라 살지 않게 된다.
부활과 함께 최후 승리와 영광을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게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된다. 현재의 고난과 십자가를 기쁨으로 감당할 수도 없고, 자신을 헌신하거나 희생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모범적인 삶을 살다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것으로 삶을 마감한 분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탁월한 성인 중에 한 명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기에 죽을 우리도 그 사망에서 건지실 수 있는 분이다.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감당하는 사람이 된다. 바라기는 사도들이 목숨 걸고 전한 부활의 기쁜 소식이 여러분에게도 믿어지기를 바란다. 부활을 믿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의 일에 힘쓰는 성도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