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8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골로새서 3 위의 것을 찾으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골 3:1-3)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사는 사람의 기준은 뭘까? 쉽게 말해서 돈을 잘 버는 사람일 것이다. 돈을 얼마만큼 벌어야 잘 사는 사람 축에 속하게 될까? 그것은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를 것이다. 쉴 새 없이 열심히 일하는데 살기 힘들다고 말하는 가장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돈 쓸 일은 많은데 돈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하는 주부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속성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숭배되는 사회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돈 때문에 불안함을 느끼게 되는 사회다. 자본주의 사회는 승자가 독식하는 사회다. 대기업 자본가라 할지라도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하루 아침에 파산할 수 있다. 그래서 대기업에서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직장인들도 대기업 자본가들의 위기감을 고스란히 나누어가지며 정글과 같은 경쟁의 현장에 쉴 새없이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힘들어도 열심히 일해야만 최소한 내 가족과 자식 새끼들 먹을 것 사 먹이고, 입을 것 사 입힐 수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이 이 땅에 것에 매여 살면서 좀처럼 하늘을 바라보며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고 당부한다.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위의 것은 무엇일까? 한편 현대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들에게 ‘위의 것을 찾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위의 것을 찾으라’는 당부가 땅의 것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결된 자이다. 그래서 이 땅에 살지만 반드시 위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한다. 성도는 위의 것을 찾을 때 이 땅에서 존재하는 목적을 알게 된다. 그것을 알아야 행복하다. 모두가 땅의 것을 추구하느라 정신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는 위의 것을 찾아야만 인생의 답이 나온다.
골 3:2-3,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 말은 우리의 마음을 ‘이 땅에 것’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위의 것’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이유를 우리가 이 땅에서는 죽은 자와 같지만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이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도는 땅에서 떵떵거리고 산다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기준으로는 죽은 것 같지만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능력을 소유할 때 오히려 이 땅에서 생명력 있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골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가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장차 예수님과 함께 누릴 영광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것을 확신했기에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땅의 자녀가 아니라 하늘의 자녀로 살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것을 찾는 하늘의 자녀들이 먼저 해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땅의 것을 버리는 것이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당시 로마시대에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 탐심은 땅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던 가치였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특히 탐심은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공공연하게 추구되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는 소유와 부를 탐하는게 인생의 목적이 되는 시대이다.
심리학자 김태형씨는 <싸우는 심리학>이란 그의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탐욕이 보편화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첫째,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층이 대중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탐욕을 부추기고 강제하기 때문이다. 둘째, 사회적 지위에 대한 갈망이나 사회적 무시에 대한 공포 등이 탐욕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소유나 소비가 사회적 신분의 상승과 직결되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욱더 탐욕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셋째, 돈이나 재산에 대한 탐욕이 자신의 안전을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반드시 다수를 패배하게 만드는 잔인한 사회일 뿐만 아니라, 주기적인 경제공황과 예측하기 힘든 경기변동으로 요동치는 불확실한 사회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불안과 공포에 더해 ‘내가 파산하거나 사고로 삶의 위기에 빠져도 국가나 사회는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믿게 되면, 사람들은 더욱더 탐욕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사회 안전망의 부재와 붕괴된 공동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안위는 자기 혼자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겨줌으로써 물질적인 부에 더욱 집착하도록 만든다.”
좋은 것을 더 갖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위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본능에만 충실했던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금지하신 열매에 손을 댄다. 그것은 탐욕이었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절했던 우상숭배였다. 아담이 탐욕을 따라간 결과 그는 영혼에 깊은 수치를 느낀다.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깨닫고 성급히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린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은 동물의 피를 흘려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혀주신다. 히브리어 키푸르 (כפור)는 ‘덮다’라는 뜻이다. 욤 키푸르는 대속죄일인데,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덮어 가려주신 것이 바로 ‘속죄’다. 죄 없는 짐승이 인간의 죄를 가리고 덮어주기 위해 대신 피흘려 죽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예표하는 것이다.
골 3:9-1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이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다고 표현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모든 죄가 가려진 새사람이 된 것이다.
골 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예수를 통해 새 사람이 된 사람들에게 차별은 없다. 여기서 ‘야만인’은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고 문명화 되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스구디아인’도 야만적이고 미개한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된 말이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이시고 만유 안에 계신다고 선포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가 된 사람에게 차별은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가 가려진 사람들에게는 더이상 수치도 차별도 느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은 여전히 누가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차를 타는가로 사회적 신분을 나눈다. 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은 차별과 무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더 좋은 옷과 스펙으로 자신을 입히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신분을 가려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를 존귀한 자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골 3:12-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은 원래부터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성품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성품을 옷을 입는 것처럼 입으라고 표현한다. 옛사람의 옷을 벗고 예수님의 성품을 입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 옷에 합당한 정체성과 신분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비군복을 입으면 예비군처럼 행동한다. 경찰제복을 입으면 경찰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처럼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을 경험했기에 우리도 그것을 따라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을 때도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주님께 그러한 용납과 용서를 경험했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탐욕과 차별의 고리를 끊어내고, 불안 속에 경쟁으로 치닫는 삶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더 좋은 옷으로 옷 입을 때 오직 만유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여러분의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 자녀들에게 여러분이 줄 수 있는 최대의 신앙 유산이다. 자녀들은 아비 세대의 신앙 유산을 그대로 먹고 자란다. 아비 세대가 아무리 풍족한 것을 입혀 줘도 여러분이 이 땅의 것만 추구하며 불안 속에 산다면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불안을 대물림하는 것이다. 그것을 끊어야 한다. 여러분 스스로 위의 것을 찾으며 만유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 분을 전부로 고백하는 신앙을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줘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골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위의 것을 찾을 때 우리 삶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가득하게 된다. 땅의 것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그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에 있을 때 우리는 땅의 것에 대해서도 염려와 욕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청지기로 그것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골 3:16-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할 때 우리는 위의 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우리는 세상의 가치와 논리를 지워가야 한다. 세상 모두가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땅의 것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살리심을 받아 하늘과 연결된 하늘의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는 위의 것을 추구할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땅의 것에만 매여 정말 행복할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하늘의 축복을 소개할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다. 위의 것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거기에 우리가 받을 영광도 있다. 바라기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위의 것을 구함으로 하늘의 자녀로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