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4 복종과 사랑

2018년 8월 25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골로새서 4 복종과 사랑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 3:18-19)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이 금지하신 열매를 먹고 에덴에서 쫒겨난다. 그것을 우리는 실낙원, ‘낙원을 잃어버렸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낙원을 누려봤던 사람이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그런데 우리는 낙원을 잃어버린 문제를 아담의 이야기로만 여긴다. 그러나 사실 실낙원은 아담 이후 태어난 우리 모두의 실존이다. 우리는 에덴을 잃어 버린 자들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갈망하며 우리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려하는 것은 우리가 에덴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나의 반쪽을 만나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려 한다. “너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런 고백을 하며 결혼에 이른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결혼이 우리가 기대했던 그런 낙원이 아님을 알게 된다.

 

예전에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단어를 설명하고 할머니가 그 단어를 맞추는 스피드 퀴즈가 있었다. 그 때 한 제시어가 ‘천생연분’이란 단어였다. 할아버지는 이 단어를 보고 자신있게 설명한다. “마누라, 당신과 나 사이가 뭐지?” 그랬더니 할머니가 답한다.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가 다급히 말한다. “아니, 옛날 말고 지금… 네 글자로 말해봐” 그랬더니 할머니가 답한다. “평생 웬수!”

 

결혼을 통해 누구보다도 사랑해야 할 사람과 평생 원수로 사는 것은 비극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가정을 이룬 부부들에게 권면의 말을 전한다. 어떻게 가정을 통해 낙원을 회복할 수 있을지 말씀을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8절.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안에서 마땅하니라복종이 주 안에서 마땅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결혼할 때만해도 이 남자,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러나 남편의 헛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남편이 밖에서는 칭찬을 받을지 모르지만, 집에서는 모자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바울은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한다. 얼마나 복종하기 힘들었기에 바울은 명령으로 말하고 있을까?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그것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22-24,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예수님이 머리가 되는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한다. 그러나 사람이 머리가 될 때 교회는 분쟁하고 무너진다. 교회는 똑똑한 사람들의 의견으로 결코 세워지지 않는다. 모두가 겸손히 주님의 원리를 따를 때 온전히 세워지는 것이다. 바울은 마찬가지의 원리가 가정에 적용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이 가정의 머리됨을 인정하고 복종하는 것이 주안에서 마땅하다고 본 것이다.

 

바울은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디모데전서에서도 밝힌다. 딤전 2:13-14,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페미니즘 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아주 싫어하는 말씀이다. 바울이 반여성주의자라서 이런 말을 했을까? 바울이 그렇게 말한 데에는 창세기에 대한 그의 이해를 반영한다.

 

잠시 에덴 동산에서 일어났던 일을 살펴보자.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에덴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동산에 두 나무를 두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와 생명나무였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한자 금지할 금(禁)자는 나무 목자 두 개(林)와 보일 시(示)자로 되어 있다. ‘보일 시’ 자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부수이다. 하늘 위에서는 한 분인 하나님이 하늘 아래에서는 세 분으로 보이신 것을 상징하는 단어다. 그래서 금지할 금(禁)자는 하나님이 두 나무에 대해서 명하신 것을 말한다.

 

왜 두 나무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살고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말해주시기 위함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상징이었다. 생명나무는 아담의 공급자로서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담이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뭘까? 그것은 불순종이자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고, 하나님을 선택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탐할 람(婪)자는 두 나무(林)를 바라보는 여자(女)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보이는 것에 여자가 먼저 흔들린 것이다. 하와는 아담에게 의견을 구하지 않고 자신이 그 열매를 먼저 따먹는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한다. 이것이 온 인류가 타락하게 된 과정이다.

 

하나님은 이후 하와에게 말씀하신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임신에는 해산이라는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임신은 저주가 아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내의 복종에는 고통이 따를 수 있다. 남편보다 센스도 뛰어나고 더 똑똑한 아내가 그렇지 못한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복종하라는 명령은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와 타락 이후 한 가정이 온전히 세워지는 원리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라고 짧고 굵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2장 18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을 만드시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주신 것이 하와였다. 여기서 ‘돕는 배필’은 단순히 조력자를 말하는게 아니다. 히브리어로 ‘에젤 케네그도’인데 ‘그의 짝으로서 돕는 자’라는 뜻이다. 여기서 ‘에젤’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말할 때 쓰이는 말이다. 신 33:29절은 하나님을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라고 묘사한다. 능력 있는 자가 도울 수 있는 것이다. 돕는 배필로 주신 아내들도 능력이 있기에 남편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남자를 살리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는 영향력이 여자들에게 있다. 그런 면에서 남자들은 불쌍한 존재들이다. 아내 되시는 분들은 남편을 불쌍히 여기길 바란다. 그리고 바라기는 여러분의 영향력과 능력을 남편을 구박하고 비판하는데 쓰지 말고, 남편을 세우는데 사용하기 바란다. 남편에게 복종이 안되면 하나님께 복종하라. 남편에게 말로 쏟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로 쏟아 내길 바란다. 남편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계획 안에 살아가도록 기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아내가 되길 부탁드린다.

 

바울은 이어서 남편들에게 명령한다. 19절,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남편들이 얼마나 아내 사랑할 줄 모르고 괴롭게 하기에 이런 명령을 했을까?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도 비슷한 권면을 한다.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상당히 심오한 명령이다. 예수님이 교회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목숨을 주신 것처럼 희생적으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사실 죄로 타락한 인류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들이다.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아무리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해도 내가 손해보고 희생한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랑은 식어질 수 있게 된다. 바울은 남편들에게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하셨던 아가페 사랑을 하라고 명령한다. 여전히 죄인이었고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우리들을 위해 예수님은 기꺼이 피 흘리며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 이 사실이 우리 영혼에 깊은 안전감을 주는 것이다.

 

결혼 관계에 있어서 이 안전감은 중요하다. 내가 정말 사랑받고 있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은 특히 아내들에게 더 중요한 가치인 것 같다. 아내도 남편의 사랑으로 안전감을 누릴 때 사랑과 순종으로 반응하며 자신을 내어주게 된다.

 

결혼은 세상이 만든 제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다. 친밀한 사랑을 나누고 온전한 연합을 통해 하나됨의 기쁨을 누리라고 만드신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엡 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결혼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베푸신 사랑을 알 때 그 비밀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리하여 인간의 영혼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게 되었다.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영혼의 필요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채워졌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가 일어나면서 우리 인간의 영혼 속에는 채워지지 않은 마음의 공간이 남게 되었다. 우리 영혼의 필요는 오직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베푸신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에 우리가 눈뜰 때 채워지게 된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실 만큼 나는 사랑받는 존재이며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은 안전감을 누리는 것이다.

 

이 복음의 비밀을 알 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배우자를 통해 마땅히 기대했던 사랑이 오지 않을 때에도 우리가 복음의 비밀을 알 때 우리는 여전히 낙심하지 않고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상대방의 죄와 결점을 볼 때 돌을 드는 것이 인간이다. 배우자의 죄와 결점을 발견할 때 우리 역시 본능적으로 돌을 들게 된다. 손해보지 않고 싶어서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내가 피를 흘리더라도, 희생하더라도 여전히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선택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하신 사랑을 우리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복음을 이해할 때 가정 안에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애매히 십자가를 질 때 억울할 수 있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십자가를 감당할 때 주님은 내가 죽는 그 자리에서 부활의 능력을 맛보게 하신다. 그 때 부부의 관계는 서로를 정죄하며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더욱 견고히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배우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배우자를 행복하게 해주기 전에 우리는 복음 안에서, 성령 안에서 우리 스스로 행복해야 한다.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사랑 안에서 우리 영혼 깊이 그 사랑 안에 서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상황과 사람의 반응에 상관 없이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나무를 택하느냐, 생명나무를 택하느냐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만의 딜레마가 아니다. 우리 역시 가정 안에서, 모든 관계 속에서 매일 이 두 나무 사이에서의 선택을 한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방을 정죄하고 관계를 파괴하는 지식나무의 열매가 되어선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셨다. 생명나무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은 내가 죽는 길이 아니라 결국 함께 사는 길이다. 바울은 그 원리를 가정 안에서도 적용하길 원했다. 자기 중심적인 우리의 본성을 거슬러 이 십자가의 사랑을 선택할 때 가정 안에서도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정을 통해 그 사랑을 이루라고 부름 받은 자들이다. 수십억의 사람들 중에 서로 돕는 자가 되라고 붙여주신 사람들을 우리는 만났고, 우리 청년들은 앞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평생 원수가 아니라 평생 친구요 동역자로 피차 복종하며 주님의 사랑으로 함께 섬기는 관계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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