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5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상 3 영광의 무게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20] 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삼상 4:19-22)
유대인들은 세계의 중심이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과 성전이라고 생각한다. 성전의 중심은 지성소였고 거기에 놓여있던 언약궤였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온 우주의 중심이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라고 생각한다. 그 언약궤가 지금 어디 있을까? 어떤 사람은 언약궤가 이디오피아에 있다고 한다. 또한 외경 마카비서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BC 586년 바벨론제국에 멸망하기 전 예레미야 선지자가 언약궤를 느보산 근처 어딘가에 숨겨두었다고 기록한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언약궤가 남유다의 멸망 전에 사라졌기에 포로 귀환 이후 세운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에서는 언약궤가 없었다고 한다. 단지 돌 하나가 세워져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언약궤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던 자리였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막과 언약궤를 만들도록 지시하셨다. 출 25:21-22,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장소로 언약궤를 만들라고 하신 것이다. 성막이 완성되자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막에 가득했다. 하나님께서 이 언약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며 그들의 광야생활을 인도하셨다. 광야에서 구름이 성막 위로 떠오르면 그들은 진행했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들은 행진을 멈췄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이르러 요단강을 건널 때도 그들은 언약궤를 앞세우고 건넜다.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너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무너뜨릴 때도 언약궤를 앞세우고 성을 돌았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그들은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되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뒤 그들은 실로에 성막을 세워 언약궤를 그곳에 둔다. 자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사무엘상 4장에는 그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사건이 벌어진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던 장소인 언약궤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언약궤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삼상 4:1-2,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2]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블레셋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당시 정복하지 못한 민족이었다. 여호수아 13장에는 정복하지 못한 지역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수 13:2-3, “이 남은 땅은 이러하니 블레셋 사람의 모든 지역과 그술 족속의 모든 지역 [3] 곧 애굽 앞 시홀 시내에서부터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북쪽 에그론 경계까지와 블레셋 사람의 다섯 통치자들의 땅 곧 가사 족속과 아스돗 족속과 아스글론 족속과 가드 족속과 에그론 족속과 또 남쪽 아위 족속의 땅과” 여기 나오는 다섯 지역은 블레셋의 대표 도시들이다. 정복하지 못한 블레셋은 두고 두고 이스라엘의 골칫거리였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는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치른다. 결과는 패배였다. 이스라엘의 전사자는 사천 명 가량이었다.
삼상 4: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패배에 대한 대책회의가 열렸다. 결론은 언약궤를 앞세워 전쟁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언약궤와 함께 했던 승리의 추억이 있었다. 그래서 언약궤를 앞세우면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착각한 것이 있었다. 요단강을 건널 때나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그 때 언약궤를 앞세웠던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패배했는지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다. 그리고 패배를 자초했던 진짜 이유를 제거해야 했다. 그러한 과정없이 단지 부적처럼 언약궤를 앞세운 결과 그들은 대패하고 만 것이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 사람들은 오히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게 된다. 삼상 4:9-11,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10]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에게 무조건 승리를 보장해주는 신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에게 순종을 원하시는 분이었다. 이스라엘이 전력이 약해서 진 것이 아니었다. 순종이 없었기에 패배가 따른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이 희귀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기 소견이 옳은 대로 살았던 결과였다. 백성들을 영적으로 이끌어야 할 대제사장은 분별력이 없었고, 그 아들들 역시 여호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제사장 직무를 담당했다. 그들은 행실이 나빴고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도 동침했다. 사무엘상 2:25절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미 죽이기로 뜻하셨음을 밝힌다. 따라서 블레셋과의 전쟁은 타락한 제사장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전쟁이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무엘을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이 있었던 것이다.
두 아들과 하나님의 궤가 빼았겼다는 소식을 듣고 대제사장 엘리는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죽게 된다.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도 이 소식을 듣고 갑자기 진통하며 해산한다. 그녀는 죽어가면서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탄식한다. 그리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는다. ‘카보드(כבוד)’가 ‘영광’이란 뜻인데 앞에 ‘이’가 붙어 ‘이-카보드(אי-כבוד)’는 ‘영광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실로에서 언약궤를 취해 가셨고, 그 분의 영광을 거두어 가셨다.
언약궤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 그것을 그들에게 민족혼을 빼앗긴 것과 같은 큰 상실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언약궤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언약궤 안에는 세가지 물건이 담겨 있었다. 만나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이었다. 이것은 각각 하나님의 기적과 은총의 상징이자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해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불평하며 애굽을 그리워했다. 광야 생활이 길어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라를 중심으로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든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론의 죽은 지팡이에서 살구꽃이 피게 하심으로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확증해 주셨다. 두 돌판은 하나님께서 두번째로 주신 것이었다. 첫 번째 돌판은 모세가 던져서 깨뜨렸다. 백성들이 모세가 내려옴이 더디자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그 앞에 예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약궤 안에 들어간 세 물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불평과 원망과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반역했는지 그들의 죄악된 실상을 보여준다.
이제 돌아오는 수요일은 욤키푸르, 대속죄일이다. 해마나 대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양을 잡아 그 피를 언약궤 위에 뿌린다. 이 언약궤의 뚜껑을 시은좌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가 베풀어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되는 곳이 바로 언약궤였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모형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어린 양으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피를 흘리셨다.
블레셋에 이 언약궤를 빼앗기고 약 80년 후 언약궤는 솔로몬이 세운 성전에 안치된다. 왕상 8:6, 11,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자기의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성전의 내소인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11]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하나님의 영광은 이제 실로가 아닌 예루살렘 성전에 가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그러자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셨다. 렘 7:12-14,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 [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하나님께서는 실로에 행한 것처럼 예루살렘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거두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에스겔서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떠나가는 환상이 나온다. 겔 10:18,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이 환상 이후 에스겔서 11장에는 예루살렘이 심판으로 멸망 받을 것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 멸망은 가혹한 것이다. 멸망은 아픈 것이다. 그러나 멸망을 통해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해진다. 죄에서 돌이키며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이스라엘 민족을 흩으신 후에 행하실 새 일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 가운데 우상을 제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영을 주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겔 11:19-20,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에스겔 43장에는 떠나갔던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환상이 나온다. 겔 43:4,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한 가지 전제를 말씀하신다. 겔 43:7-9,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들의 왕들이 음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8] 그들이 … 그 행하는 가증한 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노하여 멸망시켰거니와 [9]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거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에 영원히 살리라”
하나님의 영광은 언약궤가 있는 곳이라고 무조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순종하는 백성가운데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내가 교회를 다닌다고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시지 않는다. 내가 순종하는 삶을 살 때 그분의 임재와 영광을 나타내신다.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가시는 것이다. 언약궤를 앞세웠던 이스라엘을 철저히 망하게 하신 것은 사실 하나님의 심판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고자 그들을 패배가운데서 연단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하길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승리에 관심이 있지 않았다. 그들이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것에 더 관심이 있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한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기 원하신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가운데 펼쳐가길 원하신다.
영광이란 단어 ‘카보드’는 ‘카베드’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다. 카베드는 ‘무겁다’라는 뜻이다. 영광은 무거운 것이다. 고통과 고난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의 무게를 견딘 자에게 영광도 따라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 받은 중세 스콜라신학은 ‘영광의 신학’이라고 한다. 그들은 사람이 세상에서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 축복받은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들이 말하는 영광은 세상이 추구하는 영광과 다름이 없었다. 마틴 루터는 이처럼 힘과 정복을 추구하던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을 반대하며 ‘십자가의 신학’을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 영광이 아닌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말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포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세상은 번영을 추구하고 요즘 교회도 번영신학에 열광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나와 내 가정이 잘되고 성공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순종에 관심이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의 영광도 우리의 삶에서 회복된다. 십자가의 무거움을 견뎌내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맛보게 하신다.
바울은 말한다. 고후 4:17-18,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바울 역시 영광을 무거운 것으로 표현한다. 그에 비해 환난은 가벼운 것이다. 이 땅에서 주님께 순종하며 환난을 견딜 때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진다고 바울은 말한다. 교회와 세상이 번영과 성공을 이야기 할수록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이가봇의 시대’를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가봇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일하신다. 그분은 사무엘과 같이 순종하는 자를 예비하시며 또 다른 부흥을 준비하신다.
언약궤를 앞세웠는데도 패배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기도했는데 원하는 축복을 얻지 못했다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해와 기대 속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해와 기대대로 일하시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실망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화가 난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실망하고 화가 났을 때 정말 겸손히 하나님께 다시 엎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 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영광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이가봇의 시대’에도 겸손히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