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2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상 4 감사의 조건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삼상 7:12-14)
‘에벤에셀’은 히브리어다. 에벤은 ‘돌’이고 하에쩰은 ‘그 도움’이란 뜻이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난 뒤 미스바에 세운 돌의 이름이다. 에벤에셀은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그리고 그 이름에는 앞으로도 우리를 도우실 분이 하나님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담겨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산다. 그 도우심을 경험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기 원한다. 그러나 에벤에셀이라는 돌이 세워지기까지 거기엔 몇가지 조건이 있었다.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감사가 회복되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 조건들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지난 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쟁에 나갔다가 그것을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 언약궤가 오늘 본문 7장에서는 기럇여아림에 머물러 있는 장면이 나온다. 삼상 7:1-2,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오랜 기다림은 사람들을 사무치게 한다. 언약궤가 성막으로 돌아오지 못한지 20년의 세월이 지났다. 사람들은 언약궤에 임하셨던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임재를 사모했다. ‘사모한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나하’는 원래 ‘신음하다, 매우 슬퍼하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슬퍼했다. 그들은 단지 블레셋이 주는 고통때문에 슬퍼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그것이 없는 현실을 슬퍼했던 것이다.
그들은 오랜 기간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았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았었다. 그러다가 블레셋과의 전쟁에 패하였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빼앗겼다. 그들은 하나님 없는 삶이 고통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나님없이 마음대로 살던 사람들에게 언약궤 없는 20년의 세월이 고통이라는 자각은 어떻게 생겼을까?
20년이란 시간에 그 비밀이 있다. 그 20년 동안 소년이었던 사무엘은 이제 어른이 되어 온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20년간 기도와 말씀으로 자신을 준비했다. 그리고 선지자 학교를 세워 하나님 나라를 이어갈 말씀의 종들을 양성했다. 시대는 어두웠지만 그는 꾸준히 하나님께 받은 말씀들을 선포했다. 사무엘의 말씀 선포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왜 고통가운데 있는지 그 원인들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고통가운데서 다시 하나님을 갈망하게 된 것이다. 이에 사무엘은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이렇게 전한다.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3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족속에 의해 고통받았던 이유를 알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이라는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었다. 바알은 당시 가나안에서 비를 주관하여 땅의 풍요를 책임지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아스다롯은 바알의 아내로 전쟁과 사랑, 다산을 책임지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이 성행위를 할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 신들을 자극하기 위해 성전에서 신전 창녀들과 성행위를 했다. 그것이 당시 그 땅의 종교였고 대세 문화였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라는 신앙이 자리잡기도 전에 그들은 가나안에서 너무도 감각적인 신이 숭배되고 있음을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바알과 아스다롯이 더 매력적이고 더 자신들에게 유익을 주는 신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쩌면 당시 농경사회에서 땅의 풍요를 담당하는 신을 섬기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판단을 했는지 모른다. 그들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번째 조항을 삶에서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여호와 한 분만을 섬겨야 하는 신앙을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다른 신에 대한 신앙과 섞어 버린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습관처럼 안식일도 지키고, 제사도 드리고, 절기도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일상에서는 대세를 따랐다. 아마도 여호와만 섬기는 것은 고지식해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 시대 사람들 모두가 섬기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게 합리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행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섞일 수 없는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선택이고 사랑은 선택한 사람에 대한 충성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사랑이 그랬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도움과 보호의 손길을 거두셨다.
선지자 사무엘은 다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몇 가지 회개의 조건을 제시한다. 먼저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전심으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베콜 레바브켐’을 직역하면 ‘너희들의 온 마음으로’이다. 유대인들에게 마음은 감정만이 아니다. 의지와 행동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는 단지 감정적인 후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행위의 변화를 말한다.
다음으로 사무엘은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라고 말한다. 당시 이스라엘은 집집마다 바알과 아스다롯 신상을 두고 섬겼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우상들을 실제 그들의 삶에서 제거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나뉘지 않는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사무엘은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낼 것이라고 말한다.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따랐다. 자기들의 집에서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거했고 여호와만 섬겼다. 그 후 사무엘은 온 백성을 미스바로 소집한다. 거기서 온종일 금식하고 회개했다. 그들은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입으로 그들의 잘못을 고백했다. 미스바는 히브리어 ‘미츠페’로 전망대라는 뜻이다. 동사는 ‘고대하다, 기다리며 바라보다’는 뜻이다. 여전히 시대는 어두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 모여 새로운 시대가 오길 기대하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를 맞기에 합당한 자들로 자신들을 준비하기 위해 철저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회개했다.
이스라엘이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이 움직였다. 고대 사회에서는 보통 전쟁에 나가기 전에 종교의식을 한다. 절기도 아닌데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는게 블레셋의 눈에는 군사행동을 위한 움직임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선제공격하기 위해 올라온다. 이 소식을 듣고 다급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간청한다. 삼상 7:8-9,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전쟁의 위기 속에서 사무엘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당시 블레셋의 수비대는 미스바에서 멀지 않은 게바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집회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사무엘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만이 살 길이었기에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았고 함께 기도에 전력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기도에 응답하셨다. 블레셋이 공격하려 왔지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망하는 그들을 쳐서 승리를 거두었다. 기도가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기도는 바쁜 현대인들이 가장 나중에 하는 행동일 것이다. 기도하는 행위는 바쁜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합리적인 이성을 위반하는 것이다. 기도는 이 세상을 실제로 움직이는 세력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더더욱 전쟁의 위협을 앞둔 상황에서 한 사무엘의 기도는 너무도 무모한 것이었다.
당시 블레셋은 철기문화를 먼저 받아들여서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던 강력한 군대였다. 사무엘은 블레셋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투력을 향상시키거나 철기로 된 무기를 개발하려 하지 않았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문제가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올 때 해결될 것을 알았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길 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임을 알았다. 그래서 회개하며 기도하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의 기도는 블레셋의 위협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 구했던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사무엘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문제를 기도하며 분별했다. 그리하여 그는 시대의 주류 문화와 대세에 물들지 않았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의 시대를 변화시키고 모든 백성이 살 길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열어 나갔다. 그리하여 그는 300년 넘게 진행된 사사기의 혼란을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이스라엘은 혼돈의 역사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된다. 단순히 그들이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다. 기도하며 그들이 우상으로 나뉘어진 마음을 제거하고, 다시 전심으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것이다. 에벤에셀은 이처럼 회개하는 자,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오는 자,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자, 그들에게 허락되는 경험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돈과 부의 신, 맘몬이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재물, 즉 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다. 하나님과 바알을 같이 섬겼던 사사시대처럼 오늘날 우리 시대 역시 교회는 다니지만 물질과 쾌락과 돈을 더 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교회조차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성공과 부를 가져다 주신다고 가르치며 번영과 긍정의 신학을 설교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도했는데 성공과 부가 따라왔는가?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실망을 느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기대와 믿음 때문에 스스로 배신 당한 것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그것을 ‘긍정의 배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그의 책에서 잘못된 긍정적 사고와 신앙이 실제로 우리의 발등을 찍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아무리 긍정적 사고와 태도로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수 밖에 없는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이제 내일이면 한국의 추석이고 이스라엘도 초막절을 맞이한다. 우리는 오늘 추수감사예배로 모였다. 내게 한 해 동안 풍성한 수확을 주셔서 감사하는 것은 1차원적인 감사다. 사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초막 생활하던 광야에서도 그들과 동행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는 절기다. 초막은 무엇을 쌓아 놓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 한 분이 나와 동행하면 내가 무엇을 쌓아 놓지 않고 살아도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초막절의 은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하나님 한 분보다 내게 번영과 성공을 가져다 주는 것에 눈 돌아가는 시대다. 그러나 내가 나의 삶에 도움을 주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경험하며 내 삶에 감사를 회복할 수 있는 조건은 한 가지다. 회개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이 시대 맘몬의 우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여기까지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를 도우실 하나님을 기대하게 된다. 세상의 부와 성공은 우리가 그것을 맛볼수록 감사보다는 결핍을 더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경험하며 우리 인생에 도움의 돌을 세워나갈 때 우리 인생에는 감사와 만족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3:17-18) 라고 고백했던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우리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 한 분만을 따르고 섬김으로 에벤에셀의 역사를 경험하는 우리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