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6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상 6 후회 없는 인생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삼상 15:35)
공자는 나이 마흔을 ‘불혹(不惑) ’이라고 불렀다. 나이 40이 되면 세상 일에 혹하고 마음 빼앗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40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 마음빼앗기지 않고 살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상 정년은 60세다. 그러나 직장인들이 체감하는 은퇴 연령은 그보다 10년 빠른 평균 50.2세라고 한다. 우스개소리로 했던 ‘사오정(45세 정년)’이란 말이 현실이 되고 있다. 40대, 50대의 시기는 자녀들의 대학교육이나 결혼으로 돈이 많이 들어가는 때다. 그럴 때 ‘직장밖으로 내팽겨쳐진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더우기 요즘은 평균 수명이 길어져서 은퇴 후에도 살아야 할 날이 40~50년은 된다. 40~50년 생활할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40대는 불혹이 하나의 이상일 뿐, 실상은 많이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의 40대는 아플 수도 없는 나이, 죽지 못해 사는 나이라고 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 왕은 나이 40에 왕이 되었다. 사사기의 혼돈을 지나며 불안한 시대를 살던 백성들이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이 된다. 왕을 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선택하여 주신 왕이 사울이었다. 그가 왕으로 세워질 당시만해도 그는 무척 겸손한 사람이었다. 사무엘을 통해 왕으로 택함 받았음을 알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삼상 9:21,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사울이 제비뽑기를 통해 왕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짐보따리 사이에 숨어 있었다. 미약한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자마자 암몬과 전쟁을 치르고 승리를 거둔다. 백성들은 흥분했다. 모든 백성들이 길갈에 모여 사울을 왕으로 삼고 성대한 즉위식을 올린다.
길갈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할례 받은 곳이다. 그들은 길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몸과 마음에 새긴다. 수 5: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애굽의 수치를 굴려 보내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새롭게 세워졌던 것이다. 사무엘은 비록 백성들의 요구로 인간 왕을 세웠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다짐했던 과거 언약들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 이 길갈에서 즉위식을 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왕이 세상 왕과 달리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울은 왕이 되고 2년 후 바로 이 길갈에서 왕으로써 실패한다. 세상 왕과는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며 철저히 순종해야한다는 사실을 그가 잊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은 수의 블레셋 군대에 놀란다. 백성들이 두려워 뿔뿔히 흩어지자 그도 다급해지기 시작한다. 사무엘이 7일을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는 더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린다. 이후 도착한 사무엘에게 그가 변명한다. 삼상 13:11-12,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변명하는 사울에게 사무엘이 말한다. 삼상 13:13-14,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사울은 흩어지는 백성들을 바라봤다. 진을 치고 있는 블레셋 군대를 바라봤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놓쳤다. 이스라엘 왕은 세상 왕과 달라야 했다. 자신 위에 하나님이 있음을 명심하고 그분의 지시에 절대 복종해야 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가, 아닌가, 그것이 왕을 평가하는 하나님의 기준이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하실 말씀을 왕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왕은 선지자의 말을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사울은 그 기준에서 비껴가고 있었던 것이다.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이번에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이번에도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삼상 15: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들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쉐마’다. 쉐마는 신명기서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명이었다. 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왕은 정책을 수행하는데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최고 권위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최고권위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은 하나님이 보내는 중개자의 말에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한다. 삼상 15:2-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여기서 ‘진멸’이라는 히브리어 ‘헤렘’은 ‘하나님께 바치다’라는 뜻이 있다. ‘헤렘’은 이방신과 그 우상의 영향 아래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로 치러지는 전쟁이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 땅의 신들에게 행하는 가증한 우상숭배를 본받지 않게 하기 위해 진멸 전쟁을 명하셨었다.
하나님은 이번에는 또 다른 이유로 진멸 전쟁을 명하신다. 신 25:17-19,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끝나지 않은 전쟁을 약 4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완수하라고 명령하신다.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고 나라가 안정되자 사울을 통해 그 일을 이루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사울이 잘 했을까?
그는 보병 21만명을 모아 전쟁에 나선다. 그리고 칼로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한다. 그러나 다는 아니었다. 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 슬퍼하셨다. 삼상 15:10-11,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다’고 성경은 표현한다. 하나님도 후회하신다. 여기서 ‘후회’는 하나님이 왕을 잘못 세워 안타까워하는 감정이 아니다. 후회는 히브리어로 ‘니함’인데, ‘슬퍼하다, 한탄하다, 뜻을 돌이키다’는 뜻도 있다. 하나님이 사울을 기대했었기에 그만큼 그의 불순종이 가슴 아팠던 것이다.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도 불순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상처받으시는 것이다.
사무엘은 밤을 지새고 동이 트자 사울을 만나러 길을 나선다. 어떤 사람이 ‘사울이 갈멜에 자기 기념비를 세우고 길갈로 내려갔다’고 사무엘에게 전해주었다. 사울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기 기념비를 세우며 전쟁의 승리를 자신의 통치를 강화할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자 자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러자 사무엘이 질문한다.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된 것입니까?” 사울이 답한다. 삼상 15:15,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그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책임을 떠넘긴다. 그러자 사무엘은 지난 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전한다. 삼상 15:2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무엘은 사울에게 그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 즉 쉐마에 실패했다고 전한다. 그러자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이렇게 답한다.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은 백성들의 말을 듣느라 하나님의 말을 놓친 것이다. 이것은 인간들이 원해서 세운 왕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인간의 요구와 압력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긴 했지만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이셨다. 이스라엘 나라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것도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 좌우되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작동하는 원리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보이는 현상을 지배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가 끊어진 사울은 이후 내리막길을 걷는다. 악령에 시달리고 시기심으로 인해 인격적으로 허물어진다.
15장 마지막 절인 35절에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다시 한번 기록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후회하셨다고 말하실 때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후회는 과거의 잘못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에 그 초점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사무엘상 16장에는 새로운 미래를 담당할 다윗이 소개되고 있다. 사울의 실패는 하나님이 그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도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 주권자로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신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말씀은 40대에 왕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떠맡았던 사울만이 들어야할 말씀이 아니다. 쉽지 않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하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도 사울처럼 환경이 어려워져서 ‘부득이하게’ 하나님의 뜻을 양보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공한 사람, 능력 있는 아빠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도 사울처럼 예배는 드리지만 진정으로 하나님 뜻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있진 않은가? 우리는 돌아보아야만 한다.
아말렉은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비를 건 족속이다. 그래서 아말렉과의 싸움은 구원받은 이후 우리가 겪게 되는 영적 싸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던 바울의 고백처럼 내 안에 있는 육체의 본성을 진멸하는 싸움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우리를 영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기대하신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의 기대와 목소리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굴복하며 ‘쉐마’에 실패할 때 하나님은 후회하신다. 우리를 불러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후회하시는 인생은 인간적으로 성공했을진 몰라도 소망이 없는 인생이 된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시대를 살고 있다. 특히 가정의 제사장으로, 사회의 제사장으로 역할을 감당해야 할 40대는 더더욱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다. 상황이 어려워지고 위기감이 몰려온다 해도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원칙을 버리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후회하지 않는 인생, 우리도 후회함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