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8 거룩한 분노

2018년 10월 20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상 8 거룩한 분노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알게 하겠고 [47]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7:45-47)

 

 

말콤 글래드웰이 ‘다윗과 골리앗’이란 책을 썼다. ‘강자를 이기는 약자의 기술’이란 부제목이 붙어있는 책이었다. 작가는 이 책에서 “강해보인다고 해서 강한 것은 아니며, 약해보인다고 해서 약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약자도 그가 갖고 있는 강점과 기술을 통해 강자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서 다윗은 일반적으로 약자로 간주된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분명한 강점이 있었다. 그는 민첩했고, 양을 치면서 길렀던 물맷돌질 실력이 있었다. 물맷돌은 상대에게 접근하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는 치명적인 무기였다. 시속 122km로 날아가니까 사실 칼을 가진 상대를 총으로 제압하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비결은 복병전이라는 싸움의 규칙을 바꾸고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싸웠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묘하게 설득된다. 그러나 그가 해석한 이야기에서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빠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믿음’이다. 다윗은 그의 강점때문에 싸움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것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있었기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에 자원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를 위협하고 조롱하는 골리앗 같은 세상 앞에 다윗과 같은 믿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골리앗을 앞세운 블레셋 군대는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을 친다. 이스라엘 군대는 그 맞은편  엘라골짜기 북쪽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골리앗은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로 소개된다. 골리앗의 키는 약 2미터 90이었다. 이 거인이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삼상 17:8-9,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9]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골리앗은 전체 군대를 대표해 싸우는 일대일 싸움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진영에선 아무도 나설 자가 없었다. 사울왕도 조용히 떨고 있을 뿐이었다.

 

골리앗은 40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나와서 이스라엘 젊은 병사들의 기를 죽였다. 이 상황이 너무 무서워서 탈영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왜 그토록 골리앗을 두려워했을까? 큰 키, 육중한 갑옷, 거대한 창자루… 이와 같은 보이는 현상에 지배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위축되어 싸워볼 엄두도 못 내고 압도당했던 것이다.

 

이 때 다윗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간 형들의 안부를 파악하고 먹을 것을 전해주러 온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이 하는 말을 듣고 이렇게 반응한다. 삼상17:26절,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다윗은 골리앗의 크기와 힘에 압도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했던 건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윗은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고, 그는 자신이 싸우겠다고 자원한다.

 

다윗에게는 ‘할례 받은 자’라는 정체성이 있었다.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백성이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이스라엘을 세우신 하나님, 출애굽의 역사를 행하신 하나님, 언약을 주신 하나님… 할례 받은 백성으로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살아 계신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였던 것이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 새로운 변수를 소개한다.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군대는 골리앗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인해 마치 하나님이 그 전투에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기술, 그의 강점 때문에 그는 골리앗을 만만하게 본 것이 아니었다. 골리앗은 여전히 두려워할 만한 상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었다. 한나가 고백했던 것처럼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셨다. 다윗에게 그러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진영의 사람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현실적인 상황을 뛰어 넘어 믿음을 발휘할 때 주변 사람들에게서 오는 반응이 있다. ‘무모하다’는 것이다. 큰 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화를 낸다. 삼상 17:28,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외부의 적과 싸워야 할 때 내부의 적이 등장한다. 그러나 다윗은 형과 싸우는데 감정과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분노에는 싸워야 할 대상에 대한 분명한 방향이 있었다. 또한 그의 분노에는 목적이 있었다. 하나님의 명예를 지켜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 안에 일어난 분노는 상황이 주는 두려움이나 내부의 방해를 뛰어 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기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골리앗과의 일대일 대결에 나서기로 자원한 것이다.

 

자원하여 나선 다윗을 이번엔 사울왕이 말린다. 삼상 17: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이 말에 다윗이 응답한다. 삼상 17: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실 거룩한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다윗의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그의 평상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당시 왕궁과 베들레헴을 오가면서 일했다. 왕궁에서는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탔고 평상시에는 베들레헴에서는 양을 쳤다.

 

그가 지은 시편은 그의 삶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시 23:1-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만이 아니라 때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하신다. 거기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법을 배우게 하신다. 다윗은 자신이 양을 치면서 죽을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이 도우셨던 순간을 경험했다. 그는 푸른 초장에서만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도 물러서지 않고 주님을 위해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윗이 푸른 초장만 경험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가 골리앗에 맞설 수 있었을까?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기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골리앗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사울은 믿음의 고백을 하는 다윗을 전장에 내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에게 자신의 군복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보내길 원했다. 골리앗을 상대하기에 걸맞도록 무장시키기 원했던 것이다. 삼상 17:39,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칼과 창으로 무장하는 것은 세상이 승리하는 방식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사울이 입혀주는 군복과 칼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사울이 들려준 갑옷과 칼을 거절한다.

 

 

삼상 17: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엘라골짜기에 가면 거기에 와디가 있다. 비가 올 때는 물이 흐르지만 보통은 말라 있다. 지금도 그곳에는 매끄러운 돌들이 남아 있다. 다윗은 그곳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싸움 도구인 물맷돌을 고른다. 그는 자신에 익숙한 자신만의 패러다임으로 싸움에 나선 것이다.

 

그는 골리앗에게 선포한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그에게 하나님의 명예는 곧 자신의 명예였다. 그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자신이 늘 해왔던 방식으로 싸움에 나선 것이다. 돌은 날아 갔고, 그것은 골리앗의 이마에 정확히 박힌다. 골리앗은 무너지고 다윗은 승리를 거둔다.

 

믿음은 나는 손 놓고 ‘하나님이 다 해주시겠지’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평상시 목동으로 양을 지키는 자신의 임무에 성실했다. 그는 물맷돌로 짐승의 공격을 제압하는데 전문가가 되었다. 그런 실력이 있었기에 그는 같은 방식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은 우리의 일상에서 주어진 책임에 성실해야 한다. 내가 하는 분야에서 능숙한 전문가가 되야 한다. 학생들도 열심히 공부하며 나에게 익숙한 분야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필요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골리앗을 만날 때가 있다.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두려움의 실체가 내 앞에 버티고 서 있을 때가 있다. 그것이 자녀의 문제, 직장의 문제, 건강의 문제, 결혼생활의 문제, 관계의 문제일 수 있다. 골리앗을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죽고, 두려움에 빠지는 순간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겁에 질려 싸워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럴 때 다윗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변수를 생각하게 되길 바란다.

 

더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위기감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골리앗처럼 더 크고 강한 존재가 되려고 애를 쓴다. 골리앗이 승리하는 세상에서 교회와 성도들도 칼과 창으로 무장하려 했다. 힘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가 세상의 패러다임에 마음을 빼앗기며 힘을 추구할수록 오히려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세상은 지금 골리앗처럼 믿는 자들을 향하여 조롱하고 호통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추락한 명예 때문에 분노할 수 있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힘을 추구하며 안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용기 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지금 내가 있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 한 분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도우시는 작은 승리들을 경험해야 한다. 더 크고 튼튼한 갑옷을 축복으로 알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 익숙한 물맷돌을 찾아 손에 쥐어야 한다. 내가 익숙한 패러다임으로 승부해야 한다. 내가 세상적으로 힘을 갖추었기 때문에 하는 싸움은 이미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없는 싸움이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백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싸워야 한다.

 

사탄은 골리앗과 같은 문제를 통해 계속해서 우리를 조롱하고 두려움에 빠지게 한다. 바라기는 골리앗과 같은 인생의 문제를 마주한 골짜기에서 지금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인가?’ ‘나는 지금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는가? 골리앗인가? 하나님인가?’ 바라기는 살아계신 하나님 때문에 골리앗과 같은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그 힘에 굴복하지 않게 되길 바란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골리앗과 같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 때문에 믿음의 선한 싸움에 용감히 나설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