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7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상 9 다윗의 노래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1-2)
우리는 한 생애를 살면서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나의 존재를 기뻐하게 되길 바란다. 골리앗을 무찌른 다윗은 한순간에 이스라엘의 스타가 되었다. 그는 사울의 신임을 얻어 짧은 시간에 군대장관이 된다. 그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 많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거리에 나와 그를 환호했다. “사울을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는 요즘으로 하면 아이돌급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다윗은 이 날 이후 사울왕의 시기를 받게 된다. 그를 죽이려는 사울로 인해 다윗은 도망자가 되어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다윗은 하루 아침에 “I’m something”에서 “I’m nothing”의 시기를 맞게 된다.
우리 인생에도 잘 나가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찾고, 나의 존재를 기뻐하던 시간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지는 시기를 맞이하기도 한다. 인간적으로 괴롭고 힘든 시간이다. 다윗은 그 힘든 시기를 어떻게 통과했을까? 함께 살펴보며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고 싶었다. 그는 수금을 타는 다윗에게 창을 던진다. 다윗은 더이상 이스라엘 땅에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에게 도망간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그를 경계하자 다윗은 왕 앞에서 미친 척하는 연기까지 한다. 연기는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미쳤다는 이유로 쫓겨난다. 그는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와 아둘람 굴에 숨는다.
아둘람 굴 속에 누워 있는 다윗의 신세를 생각해 보라. ‘내 인생 이대로 끝나는 걸까?’ 그는 슬프고 불안했을 것이다. 자신을 향해 소고치며 환영하던 여인들의 환호 소리가 아직도 다윗의 귓전에 쟁쟁했을 것이다. 그가 거둔 승리로 인해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었다. 그렇게 사람들에 의해 사랑받던 그가 지금은 사울왕에게 쫒기는 신세로 아둘람 굴에 숨어 있는 것이다. 언제 끝날 지 기약도 없이 그의 인생은 아둘람 굴에 갇혀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기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인생수업을 통해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경험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가 굴에 있을 때 지은 시가 있다. 아마도 아둘람 굴이 아닐까 한다. 시 142:1,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아둘람 굴은 그가 원통함을 토해 놓는 곳이 된다. 2-4절,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4]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피난처로 알고 아둘람 굴에 들어왔지만 이 곳이 언제까지 자신의 피난처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기도하면서 진정한 피난처를 발견한다. 5-6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삶의 위협을 피해 도망친 곳에서 다윗은 진정한 피난처 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된다.
인생이 닫힌 곳에서 그는 피난처 되신 주님께 자신의 인생을 열어 보인다. 아둘람은 이처럼 다윗이 인생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더 깊은 의존을 배운 곳이다. 하나님께서 피난처되신 인생을 그 누구도 닫을 수 없다.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철저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갔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것, 그것은 단순히 왕의 직분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탄식과 호소를 마치고 다윗은 7절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7절,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이 예언적인 선포가 이루어진 것일까? 다윗에게 사람들이 몰려 오기 시작한다. 삼상 22:1-2,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그러나 다윗을 찾아 온 자들은 별로 의인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윗의 상황을 역전 시켜줄 만한 위인들이 오지 않았다.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 모두 사울을 피해서 다윗에게로 온 힘없는 약자들이었다. 400명의 사회적 추방자들.. 다윗은 과연 이들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들은 후에 다윗과 함께 다윗 왕국을 세우는 실제 주역들이 된다. 자신을 받아 준 다윗을 위해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용사들이 된 것이다.
다윗이 굴에서 지은 또 한 편의 시가 있다. 시편 57편이다. 1-2절,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2]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7-8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인생이 갇힌 듯한 캄캄한 동굴 속.. 그러나 그곳은 다윗이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확정한 곳이 된다. 다윗은 가장 힘든 시기에 하나님께 간구했고 하나님을 노래했다. 그러면서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선포했다. 새벽은 가장 어두운 밤을 뚫고 빛이 오는 시간이다. 다윗은 피난처되신 하나님을 통해 그의 인생에 여명이 오고 있음을 믿음으로 선포한 것이다. 아둘람은 이처럼 새로운 시대를 여는 비전이 잉태된 곳이다. 그리고 이 비전은 그곳에 함께 있던 400명의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수된다. 그리하여 그들도 후에 다윗과 함께 이스라엘 역사의 여명을 밝히는 사람들이 된다.
하나님은 다윗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가 순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기 원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철저히 자신을 내려 놓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져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권위자를 그 위에 두셨다. 만약 사울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다윗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철저히 고통스럽고, 철저히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시간을 지나면서, 다윗은 사람의 인기에 주목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주목하는 자가 되어 갔다.
다윗은 이후 엔게디 광야로 피한다. 그는 거기서 동굴로 들어온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다. 삼상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의 측근들은 흥분했다. ‘여호와께서도 원수를 당신 손에 넘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라고 그들은 다윗을 재촉했다. 그것은 유혹이었다. 자신의 고난을 당장에 끝낼 수 있는 일생일대의 순간이 다윗에게 찾아 온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그는 사울을 원수로 여기지 않았다. 여전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여겼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에 맡겼다. 사울을 죽이고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도망자로 피해 다니는 시간이 연장될지라도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기로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내 인생이 동굴에 갇혀 버린 것 같을 때 그 원인 제공자들을 헤아린다. 그리고 그 인간들을 향해 원망하며 복수를 꿈꾼다. 그러나 그 동굴이 복수의 칼을 가는 자리가 돼서는 안 된다. 혹 그러한 동굴에 갇혀 있다면 그곳에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향해 노래 부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철저히 주님께 피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사울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처리하신다. 하나님의 사람은 탁월한 능력이 아니라 탁월한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말도 안 되는 권위에도 철저한 순종의 훈련을 묵묵히 감당했던 것이다. 단순히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을 아는 것이 우리 인생의 꽉 막힌 굴에서 나오는 유일한 열쇠인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그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당하는 십 여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것이 허비되고 낭비되는 시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데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우리 인생에도 캄캄한 동굴의 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자녀의 문제로, 나랑 통하지 않는 배우자를 통해서, 직장과 현실에서 부딪히는 여러 관계나 진로의 문제 때문에 우리는 인생의 슬프고 불안한 밤을 맞이하게 된다. 허둥지둥 쫓겨 도망했던 다윗처럼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고 나서야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된다. 그러나 그곳이 하나님을 유일한 나의 피난처로 노래할 수 있는 아둘람이 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시간에 순종하며 철저히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당하는 엔게디의 광야가 된다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까? ‘I’m nothing’처럼 여겨지는 그 시기는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가장 값진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여겨지는 시간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절망스런 아둘람과 엔게디 광야를 허락하실 때, 그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다윗처럼 노래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렇게 선포하면서 나의 피난처되신 주님 때문에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새벽의 여명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