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 11 다윗의 눈물

2018년 11월 17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사무엘서 11 다윗의 눈물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삼하 1:11-12)

 

슬픔은 환영 받는 감정이 아니다. 가뜩이나 우울한 일이 많은 현대인에게 슬픔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내게는 찾아 오지 않았으면 하는 감정이다. 그래서 슬픈 일이 생기면 다른 오락거리나 나를 자극하는 것을 찾아 그 슬픔을 잊어버리거나 그 슬픔에서 빨리 벗어나려 한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잘 슬퍼할 줄 모른다. 그러다 보니 남의 슬픔에 대해서도 냉담하거나 잘 공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슬퍼할 일은 널려있다. 같이 슬퍼해야 할 일도 많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큰 슬픔에 빠진다. 사울왕이 죽었기 때문이다. 자 그런데 좀 이상하다. 자기를 죽이려던 원수 사울이 죽었는데 슬퍼했다는 게 좀 이상하다. 다윗 개인적으로는 춤이라도 춰야 할만큼 기쁜 소식이었다. 사울이 죽음으로 그의 오랜 피난 생활이 끝나고 이제 왕이 되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슬퍼했다. 어떻게 다윗은 원수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삼상 28:4,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사울이 마주한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이었다. 가나안 해변에 머물러 있던 블레셋 족속들이 이스라엘의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공격해 온 것이다. 사울은 다급했던 것 같다. 하나님께도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다.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불러 대화한다. 사무엘은 이렇게 답해주었다. 삼상 28:1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내일 너와 네 아들 요나단이 죽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사울의 죽음은 예고된 죽음이었다.

 

삼상 31:1,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성경은 전투의 과정은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었다는 내용만 기록하고 있다. 어차피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예고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글락에 있었던 다윗은 한 아말렉 청년으로부터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청년은 죽어가는 사울의 요청으로 사울을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던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다윗에게로 가져온 것이다.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빈 왕관이 다윗 앞에 있었다. 아말렉 청년은 아마도 다윗이 좋아하며 자신에게 상이라도 줄 것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옷을 잡아 찢는다. 옷을 찢는 행동은 히브리어로 ‘크리야’다. 유대인들은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이 있을 때 그것을 가장 격렬하게 표현하는 행위로 옷을 찢는다. 다윗만 옷을 찢은 게 아니었다. 다윗과 함께 했던 약 600명의 사람들도 다 옷을 찢었다. 쫓겨 다니느라 옷도 많지 않았을 텐데 온 공동체가 옷을 찢으며 사울을 잃은 슬픔에 동참한 것이다.

 

삼하 1:11-12,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과 그의 공동체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 족속이 블레셋에 패배하며 많은 사람이 죽은 것 때문에도 슬퍼했다. 여기서 다윗의 눈물이 조금은 이해된다. 그는 사울과의 개인적인 애증을 넘어 국가적인 상실을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어서 그 아말렉 청년을 꾸짖는다. 삼하 1:1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다윗에게 사울은 여전히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었다. 사울 때문에 다윗은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자를 죽이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했다. 사울이 자신에게 저질렀던 모든 악행보다 하나님이 그를 기름부어 세웠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는 사울이 죽고 나서 이런 시편을 남긴다.

 

시 18:1-3,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다윗은 절대주권이 하나님게 있음을 노래했다. 그는 원수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원수의 손에서 자신을 건지실 분이 하나님임을 신뢰했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고 완전히 행하고자 결심했다.

 

시 18:23-24,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다윗은 어쩌면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힘들게 지켜왔던 자신의 원칙과 그로 인하여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을 돌아보며 눈물 흘렸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는 사울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께만 피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만 그의 방패와 요새가 되시는 견고한 영혼이 되었다. 그는 아둘람 굴에서 하나님께 억울함을 토하며 숱한 눈물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의 기도를 심었던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도 바울이 이런 권면을 한다. 롬 12:14, 17,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 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윗은 자신의 삶에 원수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박해했던 사울왕을 위해 기도하며 축복했을 것이다. 자신이 오랜 시간 축복했던 사울이 죽었을 때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슬펐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옷을 찢고 눈물 흘리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금식했던 것이다.

 

원수를 위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영혼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사람의 반응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영혼이다. 그의 앞 길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어지는 사무엘하 2장에서 다윗은 드디어 유대의 왕이 된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에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며 자신을 준비시킨 것이다.

 

우리 역시 살면서 나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만난다. 그럴 때 ‘복수는 나의 것’이 나의 삶의 목표가 되어선 안된다. 원수가 망하도록 저주하는 것도 나의 기도가 되어선 안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히려 원수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견고한 영혼으로 빚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 되야 할 것이다.

 

지난 주 텔아비브 아즈리엘 몰에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49층 전망대에 오르자마자 아래로 보이는 텔아비브 전경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다. 웨일즈에서 오신 목사님께 텔아비브의 영적 상황들을 나누고자 동성애 퍼레이드가 20년째 시의 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목사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얘기를 나눴다. 사랑으로 그 여인을 받아주었을 때 결국 그 여인이 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텔아비브를 바라보면서 축복하는 기도를 하셨다. 그 나눔 이후 한가지 생각이 내 머리 속을 지나갔다. 그동안 나는 나의 사역에서 ‘내가 옳다’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주변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슬픔에 귀를 기울이는데 더 마음을 기울이지 못했음을 돌아보게 되었다. 49층 전망대에서 창밖을 다시 내려다 보았다. 더 사랑하고 더 축복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삼하 1:17-18,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다윗은 슬픈 노래를 지어 자신과 함께한 공동체뿐만이 아니라 전체 유다 족속에게 그 노래를 가르치도록 명령한다. 다윗은 이 노래에서 사울과 요나단을 칭송한다. 두 용사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들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였음을 기념한다. 다윗은 그들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 모두의 상실임을 노래했다. 상실을 슬퍼하는 시간을 통해 해결되지 않았던 묵은 상처들이 치유된다. 다윗 개인적으로도 슬픔을 노래함으로 사울을 통해 고통받았던 시간들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왕을 잃은 슬픔을 공유하면서 이스라엘은 이제 서로를 격려하며 새로운 다윗 왕조를 향해 일어설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슬픔은 숨겨야 하는 감정이 아니다. 눈물은 빨리 닦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애통할 때 위로하시기 원하신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함께 애통하며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우리 공동체가 되길 원한다. 우리 사회와 민족과 열방에 벌어지는 분쟁과 상실의 순간을 슬퍼하며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주님이 오시기까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눈물이 있는 곳에서 우리가 함께 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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