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2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성탄 설교_ 탄생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눅 2:34-35)
중국은 ‘크리스마스의 나라’다. 전세계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품의 60%를 생산한다고 한다. ‘산타클로스의 실제 작업장’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지난 해에 이어 올해도 크리스마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랑팡(廊坊)시 도시관리국은 공문을 통해 길거리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거나 장식을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야외에서 크리스마스 공연이나 종교활동을 하는 것도 할 수 없다. 노점상에서 크리스마스 관련 물품을 파는 것도 대대적으로 단속한다는 계획이다. 단속에 걸리면 처벌을 받게 된다고 한다. 작년 12월 중국 공산주의청년단은 후난성 남화대 학생들에게 크리스마스 관련 행사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행동강령에 서명하도록 했다고 한다. “미신과 아편 같은 서방 정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중국 못지않게 성탄절이 환영 받지 못하는 나라가 있다.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에 온 첫 해 크리스마스가 잊혀지지 않는다. 너무 조용해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나라인데 이렇게 성탄절이 조용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래도 올해는 욥바에서도 커다란 성탄 트리를 볼 수 있는 기쁨이 있었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축하하는 날이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기다렸던 사람은 누구일까? 누가복음에 나오는 시므온이란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노년에 그의 유일한 사명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가 태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보게 되었는지 살펴보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눅 2:21,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유대인들은 남자 아기의 이름을 할례식 때 아버지가 지어준다. 예수님도 태어난 지 8일만에 처음으로 그 이름이 불려진다. 히브리어로 ‘예수아’(ישוע)다. 눅 2:22-24,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모세의 법에 의하면 산모는 남자 아이를 나은지 40일이 지나서 정결예식을 드려야 했다. 이를 위한 번제나 속죄제는 성전에서만 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아이를 낳은 부모들이 정결예식을 위해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으로 가야했다.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예루살렘에는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려왔던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된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구원자로 오실 메시아였다. 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이사야서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 사 61:1-2,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1세기 이스라엘 땅에는 메시아가 오셔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것은 정치적 메시아였다. 그들이 열망했던 것은 민족의 회복과 영광이었고, 메시아 역시 그런 그들의 기대를 이루어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따라서 예수님이 초라한 마굿간에서 태어났을 때 아무도 그의 탄생을 주목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메시아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시므온이란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었다. 그는 죽기 전 반드시 메시아를 본다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 예수를 안고 오는 부모를 만나게 된다. 눅 2:28-29,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제 시므온은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그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아를 그의 품에 안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도, 사두개인도, 열심당원들도 주목하지 않았던 메시아를 그는 성령의 인도를 통해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이렇게 찬양한다. 눅 2:30-32,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가 보았던 주의 구원은 이스라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었다. 이 역시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예언한 내용이었다. 사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예수님 또한 그의 공생애를 통해 자신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음을 말씀하셨다.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세상에 생명의 빛을 던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시므온의 말에 예수님의 부모들이 놀랍게 여겼다. 믿겨지지 않아서 놀란 게 아니다. 그것이 천사들이 했던 말, 그리고 목자들이 전해준 말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그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므온도 같은 말을 하니 너무도 놀랐던 것이다. 시므온은 놀란 마리아에게 마지막으로 예언의 말을 전한다.
눅 2:34-35,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막 태어난 아이의 운명을 말해주고 있다. 먼저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너무나 부담스런 예언이었다. 이 말씀 역시 이사야서를 통해 예언되어 있던 말이다. 사 8:14,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 시므온의 예언처럼, 이사야의 예언처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그 돌에 걸려 넘어졌다.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은 결국 자기 백성들의 저주를 받으며 십자가에 달리신다.
십자가 앞에서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드러났다.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은 살기 위해 도망쳤다. 십자가 앞에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위선을 지적한 예수를 신성을 모독한 죄인으로 저주했다. 십자가 앞에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죽임으로 자신들의 권세가 유지되는 것을 기뻐했다. 십자가 앞에서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 이력에 누가 될까봐 자신은 이 일에 아무 상관이 없노라며 손을 씻었다. 이처럼 십자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십자가 앞에 끝까지 남아 아들의 고통 속으로 들어갔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하리라’는 시므온의 예언처럼 깊은 슬픔의 칼이 마리아의 마음을 찔렀을 것이다.
세상이나 교회나 크리스마스를 즐거워하며 예수님의 탄생이 가져온 기쁨과 평화에 주목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서도 그의 십자가와 죽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한 희생제물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화평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대한 충성 때문에 우리는 세상사람들과 갈등이나 불화를 경험하게 된다.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십자가는 삶이 패하거나 흥하게 되는 분명한 표적이 되는 것이다.
메시아를 통한 위로는 결코 달콤하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은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에 비수가 꽂히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주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위로와 희망이었다. 이 메시야적 희망을 본 사람이 바로 시므온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 그래서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다.(고전 1:18)
골 1:19-20,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하늘 아버지는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고, 그를 십자가에서 피흘리게 하셨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오는 것이다.
마리아는 어떻게 아들이 십자가를 지는 고통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낼 수 있었을까? 그녀는 어쩌면 시므온이 했던 예언,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하리라’라는 말을 기억했을지 모른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려할 때, 우리가 정말 그 십자가 앞에 끝까지 남아있다면 우리 역시 칼이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내는 것은 세상과 충돌하고 불화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십자가 앞에서 마음을 지켜낸 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화가 주어지는 것이다.
해마다 맞이하는 크리스마스가 선물을 교환하며 우리만의 흥겨운 잔치로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를 살리려고 죽기 위해 태어나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모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절기가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을 기다렸던 것처럼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