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2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전도서 3 시간의 목적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란 말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했다. 일과 삶이 균형을 이루는 삶, 가족과 함께 저녁을 보낼 수 있는 삶.. 한국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삶의 모습이다. 일과 삶의 균형 점수가 가장 좋은 나라는 어딜까? 네덜란드다. 10점 만점에 9.3점이다. 한국은 4.7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평가한 점수다. 한국 사람처럼 일 많이 하는 나라가 없을 것이다. 한국은 OECD국가중 1인당 평균 근로시간이 가장 많은 나라로 2위를 자치했다. 그런데 작년 7월부터 정부는 주 52시간 근무제를 시행했다. 잘 정착이 되면 좋겠다.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우리는 이 모든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길 원한다. 어떻게 해야 그것이 가능할까? 시간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오늘 전도서 말씀을 통해 시간의 목적을 깨닫는 은혜가 있길 되길 바란다.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다. 창조 첫째 날 하나님은 빛을 만드셨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한 시간에는 목적이 있다. 전도서 3장 1절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לכל זמן ועת לכל חפץ תחת השמים)” 여기서 기한(season)은 히브리어로 ‘즈만(זמן)’이다. ‘자만(זמן)’이란 동사에서 온 것인데, ‘정하다’라는 뜻이 있다. ‘기한’은 목적을 가지고 정해진 시간이란 뜻이다. 때(time)는 히브리어로 ‘에트(עת)’다. ‘아나(ענה)라는 동사에서 온 것인데, 대답하다. 반응하다’라는 뜻이 있다. ‘때’는 인간이 대답하고 반응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시간을 주신 첫번째 목적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을 알고 거기에 반응하기 위해서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두가지 시간 개념이 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다. 크로노스는 하루 24시간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시간을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시간, 그것은 영원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단순히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시간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이 주시고자 하시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크로노스에 묶여 있는 우리의 시간에서 영원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옮겨지는 것, 그것이 구원인 것이다.
전 3:2,4,8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우리는 우리 삶에 어떠한 때가 다가올지 예측할 수 없다. 다만 반응할 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도 그것을 끝까지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나는 옛날에 좋아했던 자매와 헤어질 때 이 전도서 말씀을 사용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고 헤어져야 할 때가 있느니라…”잘 헤어져야 할 때 성경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우리는 우리가 언제 죽을지도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이처럼 시간의 틀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인 것이다. 시간의 틀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도자가 주는 제안은 이렇다.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시간을 주신 두번째의 목적은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형통한 날이 이어질 때 우리는 우리가 마치 시간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우리가 삶을 통제할 수 없음을 절감하며 하나님을 찾게 된다. 우리의 삶에 형통과 고난이 교차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때를 열고 닫으시는 시간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점쟁이를 찾아가 미래를 예측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가 아니다.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에 영원을 심으셨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은 영원한 것과 연결되어야만 존재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자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속에 산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계신다. 하나님은 그 분의 영원 속에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시는 분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시간 안에 갇혀 사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한번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영원한 시간 속으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영생이고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사람들은 미래가 불안하기에 오늘 조금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열심히 산다. 하나님이 주신 오늘이라는 선물을 즐기지 못하고 더 많이 먹고 살 것을 쌓아 놓기 위해 쉴 새 없이 일한다. 그러나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은 크로노스라는 땅의 시간에 묶이는 지름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간을 주신 목적은 우리가 땅의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과 이어지는 하늘의 시간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주신 세번째 목적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땅의 시간이라는 패러다임에 묶이지 않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삶, 그것이 영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자기가 먹고 사는 문제보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자들이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고 오늘이라는 시간을 즐기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과거의 상처가 있다. 죄로 타락한 세상에 태어났기에 받은 상처다. 그 상처가 때론 아프고 돌아볼수록 후회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현재를 살면서도 여전히 과거를 살아간다. ‘내가 옛날에 그런 일만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후회하며 현재를 사는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두려워하며 산다.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을 즐기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속에서 산다. 오늘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6:34,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하나님이 미래를 예측할 수 없게 하신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의 한계 안에 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불안하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질이다. 우리가 우리의 앞날을 다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안심할 수 있다. 내일 이라는 미래의 시간은 불안과 염려 대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채워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말했다. 엡 5:16-17,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redeeming the time,’ ‘카이로스 엑사고라조’다. ‘시간을 구원하라’는 말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댓가를 지불하고서 사라’는 말이다. 시간을 건져내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해해야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만큼 오늘을 즐길 수 있다.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day)’라는 뜻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가능하다. 신뢰만이 크로노스의 시간을 뚫고 하나님의 영원을 나의 삶에 임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하고 정하신 카이로스의 시간이 신뢰를 통해 우리 삶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전 3:12-13,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노동은 더이상 괴로운 일이 아니다. 수고하며 즐길 수 있는 하나님이 선물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영원의 시간을 사는 사람에게 오늘은 괴로운 날이 아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현재(present)인 것이다.
하나님이 시간을 주신 마지막 목적은 우리가 오늘이라는 시간을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청지기로 최선을 다해 살게 하기 위함이다. 전도자는 말한다. 전 3:14-15,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이 말씀을 원어로 보면 ‘하엘로힘 이바케쉬 엣닐다프 (הָאֱלֹהִ֖ים יְבַקֵּ֥שׁ אֶת־נִרְדָּֽף)’이다. 닐다프는 동사 라다프에서 온 것인데, 라다프는 ‘시간이 지나가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추구했던 지나간 시간, 우리의 과거를 다시 찾으실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시간은 그냥 과거로 묻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다시 찾아 보시는 시간이다. 시간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달란트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시간을 결산하실 때를 생각하며 우리는 시간의 청지기로 이 땅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시간의 목적을 알아야 우리는 시간을 누릴 수 있다. 시간의 목적을 알아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 시간의 목적을 알아야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시간은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을 알고 거기에 반응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시간은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시간은 우리가 땅의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과 이어지는 삶을 살라고 주어진 것이다. 시간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오늘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청지기처럼, 좋은 매니저처럼 잘 사용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이 목적을 알아야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개입하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게 된다. 그래서 잘 먹고 사는 것이 우리가 시간을 쓰는 목적이 될 수 없다. 더 많은 휴가와 여가를 얻는 것도 시간의 목적이 아니다. 땅의 시간은 우리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우리는 시간의 주인인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야 만족이 있다. 하루를 살아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를 사셨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며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다. 어떻게 그렇게 짧은 생애를 사시고 다 이루었다고 외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룬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을 마감하는 순간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카이로스의 삶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의 목적을 다 이룰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