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9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전도서 4 우리가 산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전 4:6)
혼자 사는 것이 익숙해진 시대가 되었다. ‘’우리결혼했어요’란 프로그램은 폐지되고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은 인기를 얻고 있다. 사람을 만나 서로 함께 하는 시간보다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하는시간, 넷플릭스로 영화나 TV프로를 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졌다. 혼자 사는 사람들의 외로운 공간을 말 못 하는 반려동물들이 채워주고 있다. 이제 한국은 전체 가구 수의 1/3 이 혼자 사는 1인가구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혼자 사는 것이 익숙해진 시대.. 우리는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전도서 말씀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우리는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종종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내가 어떤 길을 가야 삶이 더 의미있고 행복할지 생각하며 그것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속에는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과 계획으로 가득하다. 지난 주 우리는 시간에 대해 살펴보았다. 전도자의 제안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간을 우리가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오늘을 즐기라는 것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또 다른 제안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그것은 ‘나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하라는 것이다.
전도서 4장에서 전도자가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평온함’이 있는 삶이다. 6절,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평온함은 영어로 Tranquility, Quietness라고 번역되어 있다. 쉼, 영혼의 평정, 평안한 마음이 있는 삶… 이 세상에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의 위치를 때 누릴 수 있는 감정이다. 내 삶에 만족하며 기쁨으로 내게 주어진 일을 하고 그 열매를 먹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러한 평온한 상태를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 그것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우리’를 위해 살 때 가능하다는 것이 오늘 전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평온함’을 방해하는 두가지 극단적인 삶의 모습이 있다. 하나는 게으름이고 하나는 지나치게 분주한 것이다. 5절,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메시지 성경은 어리석은 자의 게으름을 ‘slow suicide’라고 표현한다. 천천히 자기를 죽이는 행위라는 것이다. 게으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 없다. 자기 한 몸 감당하기도 벅차다. 그의 인생에 다른 사람을 위해 하려는 것이 없기에 게으른 것이다. 평온함의 또 다른 극단은 지나치게 바쁜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가 끝나면 다른 것을 성취하기 위해 정신 없이 달린다. 한 손만이 아니라 두 손 가득 성취하기 위해 분주하다. 그런 사람은 결코 오늘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의 목표는 항상 내일의 성취에 있다. 내일 뭔가 더 성취하면 삶이 나아질 거라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밤낮없이 열심히 살아서 남들보다 빠르게 승진하기도 한다. 그런데 승진 이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많은 책임과 일의 압력이다. 그는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누릴 여유도 없이 또 다시 경주마처럼 달려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평온함’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나하트(נחת)’이다. ‘네하트(נחת)’라는 동사에서 온 것인데, ‘내려가다, 그만 두다’라는 뜻이다. 더 높은 것을 얻기 위해 올라가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내려가는 삶,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더 많은 기회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야망을 그만 두는 삶에 ‘평온함’이 찾아오는 것이다. 평온함은 부와 성공을 얻는 것보다 사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한 손만 차고 다른 한 손이 비어있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두 손 가득 차도 어쩌면 만족을 모른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다 소유해야 만족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영국의 작가인 체스터톤(G. K. Chesterton)이이런말을했다. “만족하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계속해서 더 더 쌓아 놓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덜 욕망하는 것이다.” “There are two ways to get enough. One is to continue to accumulate more and more. The other is to desire less.” 더 가지려는 욕망을 그만 둘 때 평온함은 찾아오는 것이다.
그저께 나에게 이와 관련한 갈등이 있었다. 학교 프리젠테이션이 있어서 한 주간 바빴다. 금요일 구약관통도 영어로 준비해야했고, 설교 준비도 해야했다. 다른 때에 비해 절대적으로 시간이 모자랐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 저녁이 유창이가 유도 노란띠를 받는 날이었다. 유창이는 지금은 노란띠를 받는 거고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니 바쁘면 안 와도 된다고 했다. 갈등이 있었다. 작은 거지만 아들의 기쁨의 시간에 함께 하느냐, 설교준비를 더 하느냐… 그런데 설교 주제가 ‘우리가 산다’였다. 나는 결국 두 손에 가득한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한 것을 선택했다. 평온함이 찾아왔다. 아내와 함께 가서 유창이가 그동안 배운 동작을 하는 것을 보고 노란띠 받는 장면 사진을 찍어주었다. 가길 너무 잘 했다.
8절에는 두 손 가득 채우기 위해 살았던 사람의 삶의 모습이 소개된다. 8절,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여기 나오는 사람은 그가 오를 수 있는 인생의 사다리 정상에 오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거기서 홀로 산다. 자식도, 형제도, 가족도 없다. 그 혼자 산다. 그가 같이 사는 것이 있다면 끊임없는 일과 그가 모은 재산이다. 그는 노력하여 많은 것을 가졌다. 그러나 없는게 하나 있다. 행복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없는 불행이다. 영국의 작가 사무엘 존슨은 이런 말을 했다. “집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것은 모든 야망의 궁극적인 결과이며, 모든 기업과 노동이 나아가는 목적이다.” “To be happy at home is the ultimate result of all ambition, the end to which every enterprise and labour tends.” 집에서,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나누는 행복이 결국 일하고 수고하는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일 때문에 가족 관계를 제쳐둔다. 혼인을 포기하며 비혼주의자로 산다. 더 성공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쓰는 시간을 최소화한다. 전도자는 많은 것을 성취해 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가치는 ‘당신이 무엇을 성취했는가’가 아니었다. ‘당신이 누구와 연결되어 당신이 수고한 열매를 함께 나누는가’였다.
그래서 전도자는 이렇게 말한다. 전 4:9-1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나’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사는 삶이 낫다는 것이다. 공동체속에서 관계를 통해 서로 의지하고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땅에 충만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 둘이 함께 사는 삶을 창조 때부터 디자인하셨다. 혼자 사는 것이 아무리 추세라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함께 사는 것을 통해 이 땅에서 충만하고, 이 땅을 정복하기 원하신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돕고, 어떻게 섬길지 생각하는 사람은 외로울 틈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쌓아놓고 살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는 만족이 있고 오늘을 누리는 기쁨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내가 어떻게 해야 더 행복할까?”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더 행복할까”로 바꿔야 하는 것이다. 나 혼자 사는 삶의 방식에 길들여지지 말고 우리가 함께 사는 방식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바쁜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만을 위해 바쁜 것이 되지 않도록, 두 손 가득히 채우기 위해 바쁜 것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가족 내에서, 교회 공동체 내에서 우리는 우리가 함께 더 잘 살 수 있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 세상에서 더 성공하지 못해도, 더 많은 것을 소유하지 못해도, 내가 두 손 가득히 채우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히 채우는 것이 더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면 우리는 용기 있게 그 길을 선택해야만 한다. “Less is more”란 말이 있다. 내가 덜 갖기로 선택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 부분을 더 채워주는 행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