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6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전도서 6 신앙 역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전 7:1-2)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 ‘Haben oder Sein’ 에리히 프롬의 책 제목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이 살아가는데 두 가지 삶의 양식이 있음을 밝힌다. ‘소유를 지향하는 삶(To have)’과 ‘존재를 지향하는 삶(To be)’이다. 소유론적 삶의 양식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성취하고, 무엇을 소유하는가가 중요하다. 존재론적 삶의 양식에서는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가 더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은 자본주의 사회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의 존재 가치는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가로 결정된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진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통해 행복을 추구한다. 더 많은 물질, 더 많은 지식, 더 많은 명예를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우리는 꼭 그렇지 않음을 보게 된다. 진정한 행복은 존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존재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오늘 전도서 본문에서 전도자는 두가지 삶의 양식을 비교한다. 그리고 둘 중에 더 나은 것을 선택하라고 도전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우리 삶의 양식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전 7: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טוב שם משמן)” 히브리 원문은 단순히 ‘이름이 기름보다 낫다’라고 표현한다. 이름은 뭐고 기름은 뭘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름은 재산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솔로몬은 두로의 히람 왕에게 성전에 쓸 나무를 수입했는데, 그 댓가로 지불한 것이 올리브 기름과 밀이었다. 기름이 소유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름은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의 인격과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떠올리게 된다. 전도자는 사람이 살면서 ‘어떠한 존재가 되는가’가 ‘재물을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가’보다 더 중요한 가치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엿새 전 베다니 마리아가 자신의 비싼 향유를 쏟아 예수님의 발을 씻긴 일이 있었다. 그 때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았다고 마리아를 나무랐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하루 품삯이었기에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300일 동안 일해야 모을 수 있는 액수였다. 이 때 예수님은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마리아는 존재 지향의 삶을 살았다. 예수님이 너무도 소중한 존재였기에 마리아는 그분을 위해 자신의 소유도 아끼지 않았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좋은 기름을 아낌없이 내어 드렸고, 예수님은 그런 그녀의 이름이 어디서든 아름답게 기억되도록 그녀를 높여주셨다.
세상의 99%의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라 1%의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를 선택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믿음이 필요하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신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역설이다. 세상의 상식과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뒤집는 것이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라고 말하는 것도 역설이다. 세상은 여전히 재산을 많이 소유해야 행복하다고 믿고 있는데, 그것보다 좋은 이름을 남기는 삶이 더 나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는 환영 받을 수 없는 메시지다. 그러나 신앙은 역설을 선택하고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신앙생활이 재미있지 않은 것은 믿음과 용기를 발휘하여 그러한 역설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도 ‘소유냐, 존재냐’ 이 두 가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존재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했고 자신의 왕국을 소유하기 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더 지혜롭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줄 것 같은 지식나무의 열매를 소유하기로 선택한다. 그는 존재론적인 삶보다는 소유론적 삶을 선택한 것이다. 결과는 더 풍성한 삶이 아니라 파멸이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도 ‘소유냐, 존재냐’ 사이에서 무수한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 한 분의 백성으로 존재하기 보다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우상을 선택한다. 결과는 더 풍성한 삶이 아니라 파멸이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사회속에서 소망을 보지못하고 위기를 느끼게 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기 위해 살기보단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정신없이 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경제적인 번영은 누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와 가정, 공동체는 급속도로 무너져내리고 있는게 지금의 현실이다.
예수님도 소유냐, 존재냐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사탄은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했다. 또한 세상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절하면 그것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유혹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응답하셨다. 사람에게 떡도 필요하다. 소유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존재가 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기를 선택하셨다. 그것은 나무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가 되는 것이었다.
빌 2:6-10,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하나님은 소유보다 존재를 선택한 예수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한 사람에게 가장 뛰어난 권세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설이다. 이 역설은 예수님 뿐만이 아니라 주의 길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존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였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변방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그에게는 믿음이 필요했고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순종한 그에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는 복을 주셨다.
모세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애굽의 보화를 소유한 삶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한 삶 중 어느 것이 모세에게 더 행복했을까? 히브리서 본문의 표현처럼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주를 위해 수모를 받는 존재가 되기로 선택한 삶에서 더 큰 행복을 누렸다.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지식과 명예를 소유하기 원했던 엘리트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 그는 변한다. 빌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존재가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신앙의 세계에는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많은 역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역설을 나의 삶의 양식으로 선택하는 데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다. 소유를 통해 오는 안전을 포기하는 용기, 남들과 다른 길을 묵묵히 가야 하는 용기, 고독과 조롱도 견뎌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진리 외에는 그 무엇도 추구하지 않겠다는 이런 용기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여러분에게 그러한 믿음이 있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을 통해 믿음의 선진들은 좋은 이름(good reputation)을 얻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나타난 것을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요즘 학교 교육도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현상 너머로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사람이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은 이런 시를 썼다.
이 땅에는 천국이 가득하고
모든떨기나무는 하나님으로 불붙어 있다
그러나 보는 자만이 신을 벗는다
다른 이들은 둘러앉아 야생 열매만 딴다
“Earth’s crammed with heaven, And every common bush afire with God,
But only he who sees takes off his shoes; The rest sit round and pluck blackberries.”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 믿음의 사람은 오늘 이 땅의 역사도 그분의 계시의 말씀대로 운행되고 있는 것을 보는 자이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님을 아는 자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로 하나님의 영원한 질서를 보는 사람이다.
오늘날 교회는 소유를 숭배하는 문화에 둘러싸여 있다. 세속적인 가치가 하나님의 나라 가치보다 앞서고 있다. 돈과 집과 명예… 그 소유에 대한 갈망이 하나님에 대한 갈망보다 더 크다. 이제 오늘날 기독교의 적은 핍박이나 박해가 아니다. 세속주의다. 아름다운 이름보다 성공과 번영이라는 기름이 더 낫다고 말하는 바벨의 문화가 바로 교회의 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교회의 세속주의를 개탄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실패한 교회를 위해 모세처럼 목숨 걸고 중보할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 헌신하는 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은 현상에 의해 지배 받는다. 보이는 것을 전부로 알고, 보이는 현상에 좌우되는 삶을 산다. 그러나 역사와 세상을 주관하는 건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의 말씀과 그 분이 보여주시는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따라가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인다. 현상 너머에 계시지만 너무도 선명히 역사를 운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영원한 질서를 보며 사는 사람에 의해 세상은 움직인다.
전도자는 2절에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왜 잔치집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나을까? 잔치집에서 우리의 관심은 현재의 즐거움을 소유하는 것에 있게 된다. 그런데 초상집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 사람처럼 나도 언젠가 끝이 있는 존재구나’를 절감하게 된다. 죽음 앞에서 세상의 모든 소유는 덧없는 것이 된다. 죽음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다. 존재 대 존재로 그분 앞에 서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을 때 나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속으로 이어진다. 전도자는 또한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고 말한다. 우리의 가장 마지막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은 것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본 사람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그러나 소유가 많았던 한 부자 청년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믿음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근심하며 세상으로 갔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은 신앙인의 도전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로 빚어지고 있는가, 내가 어떻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만들어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바라기는 믿음으로 주를 따르는 존재가 되어 이 땅에서와 또한 천국에서도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