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9 죽기까지의 삶

2019년 3월 9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전도서 9 죽기까지의 삶 

일의 결국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 12:13-14)

로마의 휴일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은 63세에 대장암으로 죽는다. 그녀는 암 투병 중이던 1992년에도 소말리아를 방문하여 봉사 활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자신의죽음을 예감한 오드리 햅번은 숨을 거두기 전 아들의 손을 잡고 “Time Tested Beauty Tips”란 Sam Levenson의 시를 읊어주었다고 한다. 그것이그녀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For attractive lips, speak words of kindness.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For lovely eyes, seek out the good in people.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For a slim figure, share your food with the hungry.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라
For beautiful hair, let a child run his fingers through it once a day.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 한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As you grow older, you will discover that you have two hands.
당신이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One for helping yourself, the other for helping others.
한 손은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돋는 손이다

오드리 헵번은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늙고,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한 삶을 살았다. 자신이 늙어가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생의 순간이다. 그런데 오늘 전도서 기자는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늙음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순간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가 그 순간을 상상속에서 미리 가보면서 전도자가 주고자 하는 인생 교훈을 듣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오늘 본문은 전도서 11장 9절부터 12장 마지막까지다. 전도자는 여기서 결론전으로 세가지 제언을 한다. 그가 던지는 삶에 대한 첫번째 제언은 Rejoice, 삶을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전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Rejoice, O young man, in your youth, and let your heart cheer you in the days of your youth. Walk in the ways of your heart and the sight of your eyes. But know that for all these things God will bring you into judgment.”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동안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 원하신다. 그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가 삶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기억하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최고의 영광을 받으시는 순간은 당신이 하나님으로 인해 최고의 만족을 누릴 때다.”

에덴동산은 인간이 행복하고 즐거움을 누리며 살기에 가장 완벽한 곳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는 그곳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지 않았고, 삶을 즐거워 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이 아니라 뱀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뱀은 그들이 갖지 못한 한가지를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었다.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그들을 더 지혜롭게 해줄 것 같은 선악과 열매에 손을 댄다.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한 것, 그것은 죄였다. 그들의 죄는 그들 자신들에게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끼친 원죄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살지 않는다. 결핍과 부족과 불만을 안고 우리는 태어난다. 그 공허함을 우리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끊임없이 채워보려고 애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똑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그들이 들어간 가나안 땅은 모든 것이 풍족한 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도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즐거워하는데 실패한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를 통해 이러한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신28:47-48,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지 않는 것,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인 것이다. 내 자아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다른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에 감사하며 그분만을 경외하는 것, 그것이 삶을 즐길 수 있는 비결인 것이다.

전도자의 두번째 제언은 Remove, 근심을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라는 것이다. 전 11:10,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Remove vexation from your heart, and put away pain from your body, for youth and the dawn of life are vanity.”우리는 근심하기 때문에 삶을 즐기지 못한다.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근심한다. 흔히 근심은 우리가 미래를 생각할 때 찾아온다. ‘내가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까? 내가 결혼할 수 있을까? 내가 성공할 수 있을까? 내 자녀들이 제대로 자라날 수 있을까? 내가 정년까지 안 짤리고 일할 수 있을까? 나와 내 가족이 미래에도 안전하게 살 수 있을까?…’ 세상이 불확실하기에 우리는 많은 근심과 염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근심과 염려를 다른 관점에서 보셨다. 마 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우리는 사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걱정한다. 그런데 이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러한 문제로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근심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방인들과 별 다를 바없이 산다는 반증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실레아 슐링크는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추구하지 않는 것은 그 나라에 매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분의 나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안정된 수입, 건강, 사회적인 인정, 자신과 가족의 심신의 건강 같은 것이 우리 생각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근심의 문제 역시 누구를 경외하는가에 달려있다. 내일 일을 두려워할 것인가, 내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인가? 두려움은 오직 두려움으로 정복되는 것이다. 하나님 한 분을 경외하는 마음만이 나를 근심케 하는 미래의 상황이나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오늘 우리가 광야에 가서 들풀을 볼텐데, 광야에 핀 꽃을 보며 근심 대신 믿음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전도자의 세번째 제언은 Remember,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전 12:1-2,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Remember also your Creator in the days of your youth, before the evil days come and the years draw near of which you will say, “I have no pleasure in them”; before the sun and the light and the moon and the stars are darkened and the clouds return after the rain”왜 전도자는 우리가 더 늙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명령할까? 그것은 우리가 피조물임을 알고 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주를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피조물들을 경배하며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을 오히려 즐길 수 없게 된다. 롬 1:21, 25,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경외하며 그것으로 만족하기를 구한다. 죄로 인해 이 세상에 거짓이 들어왔고, 많은 사람들이 그 거짓에 속아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인생을 살아간다.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고, 여전히 이 창조세계의 주인임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전 12:3-5,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이것은 사람의 몸을 집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떤다’는 것은 늙어서 손발이 떨리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진다는 것은 허리가 구부러지는 것을 말한다. 맷돌질하는 자가 적다는 것은 이가 빠져 밥 먹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은 나이 들면 새소리에도 잠을 깬다는 말이다. 살구나무가 꽃이 핀다는 것은 하연 살구나무 꽃처럼 백발이 된다는 말이다. 결국 늙어서 정욕이 그치는 그 순간 장례를 치를 때가 온다는 것이다.

전 12:6-7,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은 줄이 풀리고 금그릇이 깨진다는 것은 생명을 육체 안에 더이상 담을 수 없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전도자는 우리가 그렇게 죽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명령한다. 전도자가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시키는 이유는 우리를 협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 인간 모두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현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삶을 더 진실하게 바라보며 내게 주신 하루하루를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만든 ‘이키루’라는 영화가 있다. 시청의 시민과 과장인 와타나베란 사람이 주인공이다. 그는 소화가 안돼서 어느 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는다. 그는 자신이 위암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낙심한 그는 술과 도박에 빠진다. 그래도 공허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그는 같은직장의 여직원이 활력 있게 사는 모습을 보며 부러워한다. 그리고 자신도 하루라도 활력 있게 살고 싶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죽기 전에라도 마무리 할 한가지 일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기 책상 위에 쌓여있던 미결서류 중에서 마을 주민들의 숙원사업이 담긴 민원 서류 하나를 찾아낸다. 비만 오면 물웅덩이로 변하고 모기가 들끓는 마을 공터를 어린이 공원으로 만들어 달라는 진정서였다. 이 일은 시청 내 여러 부서가 관여된 일이어서 그 누구도 추진하려 들지 않았던 일이었다. 주인공은 이 일을 직접 나서서 추진해 간다. 그 과정에서 여러 부서의사람들로 냉대를 받는다. 그러자 동료 직원이 그에게 묻는다. “그런푸대접을 받는데 당신은 화도 안 납니까?” 그러자 그는 대답한다. “난아무도 증오하지 않네. 난 그럴 시간이 없어.” 하루는 주인공이 퇴근길에 하늘을 바라보며 동료 직원에게 말한다. “저녁노을이 이렇게 아름다운 걸 모르고 30년을 살았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없어.” 주인공은 그 일에 끝까지 매달린 결과 마침내 어린이 공원이 완공된다. 그러나주인공은 눈 내리는 밤 공원 그네에 앉아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며 숨을 거둔다. 영화 ‘이키루’의 주인공은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한채 살아왔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죽은 미라처럼 살아왔다고 깨닫게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죽음이 없다면 그것은 축복일까? 때로 우리는 ‘죽음이 왜 필요한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면 슬프지 않을텐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있기에, 지금 내가 살아 있는 하루 하루가 소중한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죽음은 소멸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차원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래서 죽기 전에, 하루라도 더 젊었을 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전도서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12:13-14, “일의 결국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결론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다. 하나님만을 경외할 때 우리는 그분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창조세계를 즐길 수 있다. 하나님만을 경외할 때 우리는 내일 일을 근심하지 않고 우리의 오늘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만을 경외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죽음의 순간이 다가온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후안 라라의 장례식 전야’, 1951, 유진 스미스

미국의 사진작가 유진 스미스가 찍은 ‘후안 라라의 장례식 전야’란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에 둘러싸인 채 조용히 임종을 맞이하는 노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도 언젠가 이러한 순간이 올 것이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 죽는 순간이 두렵거나 아쉽지 않은 삶이 되길 바란다. 바라기는 죽기까지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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