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서 2 너만 알았다

2019년 3월 23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아모스서 2 너만 알았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암 3:1-2)

결혼 전 우리는 누군가 좋아지는 사람이 생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그가 어디 사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궁금해진다. 그걸 알기 위해 그 사람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 사람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 사람에 대해 물어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기회가 되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러다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그 사람이 좋아진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확신이 들게 되면 드디어 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 중에 결혼 한 분들은 어떤 사랑의 고백을 했는가?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에서 잭 니콜슨이 헬렌 헌트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남자 주인공은 강박증이 있어서 평소 무척 냉소적이고 까칠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단골 식당의 웨이트리스를 만나면서 마음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끔 합니다.” 여자주인공은 이 말을 듣고 자신이 평생에 들어본 최고의 찬사라고 말하며 기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바람이 생긴다. 그 마음을 잘 표현한 멋진 대사라 생각한다. 오늘 아모스서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던 하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사가 나온다. 그것은  “나는 너만 알았다”라는 하나님의 고백이다. 이 표현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암 3:1-2,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다”고 고백하신다. “너희만 알았다”라는 것은 너희하고만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알았다’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다(ידע)’이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다’란 표현으로 사용된 말이다. 하나님은 세상 많은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서 그들과만 결혼관계를 맺으신 것이었다.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 말씀처럼이스라엘 백성은 세상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했다. 마치 결혼한 여인이 한 남편에게 정절을 지키는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 한 분만 아는 백성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관계를 성경은 ‘언약’이라고 표현한다. 고대 근동에서 언약을 맺을 때 언약의 두 당사자들은 짐승을 반으로 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간다. 언약을 어기면 쪼개진 짐승과 같이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는 맹세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언약은 생명을 걸고 하는 맹세였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언약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출 34: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된다.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셨는가? 그것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시기 위해서였다. 출 34:10, “…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세상의 모든 족속들은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며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신다. 출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여기서 하나님이 질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언약의 성격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보통 질투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다. 질투는 히브리어로 ‘칸나(קַנָּא)’다. ‘열심을 내어 보호하다’라는 동사 ‘카나’(קנא)에서 온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택한 백성을 지키기 위해 열심을 내시는 분인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계시하셨을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질투하셨다. 하나님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의 마음을 되돌려 놓겠다는 맹렬한 열심을 갖고 계셨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결혼은 둘이 상대방 한 사람만 바라보겠다는 언약이다. 그것은 배타적인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정이다. 따라서 배우자가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질투가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 질투는 서로의 관계를 지키기 위한 불타는 의지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와 결혼한 바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다. 출 34:12,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부인 이스라엘이 하나님 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길 원하셨던 것이다.

자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땠는가? 암 3:14-4:1,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그들은 언약을 잊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고 자유롭게 살기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영과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풍요를 약속하는 다른 우상들에게 굴복했다. 신부의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학대하며 언약백성다운 삶을 살지 못했다. 이들의 삶을 통해 열방에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명예가 추락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한 삶을 보며 “나는 너희만 알았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고백이 너무도 슬프게 들린다. 그들을 부르셔서 자신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의 선택은 그들에게 특권만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열방을 위한 제사장 나라라는 막중한 책임도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특권만 즐기려 했지 그들의 책임은 잊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먼 길을 간 것이다. 그런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하신다. 암 3:2-3,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과 더 이상 같이 갈 수 없음을 선언하신다. 뜻이 같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다. 암 3:7-8,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오죽 답답하셨으면 남유다 사람인 아모스를 북이스라엘에 보내어 심판의 말을 외치게 하셨을까?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렇게 선포한다. 암 3:9-11, “아스돗의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에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의 힘을 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영향력을 끊어 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선택받은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원하셨다.

구약에 나오는 무수한 심판의 메세지로 인해 우리는 자칫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는 너만 알았다”라고 고백하시는 로맨티스트시다. 하나님의 심판은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것이다. 다시 그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깨뜨린 언약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직접 대가를 치르신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신 것이다.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이어가기 위해 죽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신 것이다. 롬 8:32, 38-39,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했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아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이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새 언약의 중보자로 보내신 것이다.

그 사실을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벧전 2:9-10,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열방에 선포하는 왕같은 제사장, 즉 교회가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나는 너만 알았다”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특권만 누리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과연 그분의 부름 받은 백성인 교회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아모스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세상에 마음을 뺏기며 살아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절규다. 지난 주에도 살펴보았지만 북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아모스의 고발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심각하게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독점하기 원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더 깊은 사랑의 관계로 이끄시기 위해 하나님은 열심을 내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신부의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신랑되신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보는, 나누어지지 않은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그 사랑을 위해 창조되었고, 부름 받았고, 구원받은 것이다. 이 사랑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주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소유하기 원하신다. 우리 역시 주님을 사랑하며 그 분을 첫 자리에 두는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세상이 주는 약속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은가? 돈과 성공과 나를 더 기쁘게 해줄 것 같은 것들에 더 마음을 쏟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마음이 나누인다면 주님은 우리와 사랑의 언약을 이어 가실 수 없다. 뜻이 같지 않은데 함께 갈 수 없는 것이다.언약은 배타적인 것이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의 우상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만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다른 대상들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이 선택한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도 내 앞에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정혼한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것같이 다시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신부로 살아갈 때 우리는 장차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신부로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주님, 주님은 나를 이 세상에서 더 좋은 사람으로, 더 좋은 교회로 살아가고 싶게 만듭니다” “Lord,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person, better church in this world.” 이러한 고백이 주님께 드리는 최고의 찬사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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