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6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아모스서 3 안식이 있는 사회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 (암 4:12-13)
몇 주전 한국에서 카톡을 받았다. 이전 교회 청년부 때 리더로 섬겼던 친구였다. 18년 다닌 직장을 퇴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친구는 지난 해 야근을 700시간 넘게 했다고 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으로 알고 일했던 그곳을 나와야 했을까… 안타까웠다. 안식없이 달리기만 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이 그려져 씁쓸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서로 함께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라기보단 경쟁을 통해 생존해야 하는 정글로 변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사나와지고 있다. 거기엔 사랑과 존중과 섬김 대신에 멸시와 학대와 압제가 있을 뿐이다. 오늘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을 함께 살펴보며 우리 사회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암 4:1,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바산은 요단 동쪽 골란 고원의 비옥한 초장지대이다. 이곳에서 방목하는 소들은 잘 먹고 자라서 상태가 좋다. 그래서 고대 가나안에서는 바산의 암소가 최상의 품종으로 여겨졌다. 아모스는 당시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있던 지배계층을 바산의 살진 소들에 비유했다.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여 자기들의 배만 불리며 쾌락을 일삼고 있는 그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아모스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한다. 암 4:2-3,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너희가 성 무너진 데를 통하여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져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은 BC 722년 북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이루어진다. 왕하 17:6, “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실제로 앗수르 당시의 부조를 보면 전쟁 포로들을 밧줄을 묶어 끌고 갔음을 볼 수 있다.
이어지는 4-5절에서 아모스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죄악을 지적한다. 암 4:4-5,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던 금송아지 제단과 바알의 제단이 있던 곳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예배했다. 사실 그들은 그들을 풍요롭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우상을 숭배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기뻐하는 종교행위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과 더욱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모스는 이어서 회개를 거부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열거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몇가지 재앙을 허락하셨다. 첫번째로 먹을 양식이 떨어지게 하셨다. 그러나 그래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두번째로 가뭄을 허락하셨다. 추수하기 석 달 전 가장 비가 필요한 시점에서 늦은 비를 내리시지 않은 것이다. 세번째로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을 허락하셨다. 네번째로 전염병과 칼의 전쟁이 일어나게 하셨다. 다섯번째로 성읍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타서 무너지게 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재앙을 통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돌아오다’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슈브(שוב)’다. 구약에는 회개라는 단어가 없는데 ‘슈브’가 회개의 개념을 대신 하는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 단어 쉰(ש)은 하나님을, 베트(ב)는 집, 즉 ‘나의 왕국’을 상징한다.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면 나의 왕국이 하나님께로 연결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소멸하는 불인 하나님은 나의 옛집을 불로 태우신다. 다시 이전 행위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옛 집을 무너뜨리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있다. 나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정복자들이 포로들의 집을 불태우는 것도 아예 돌아갈 생각을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회개는 나의 옛집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새로운 집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이다.
안식을 뜻하는 샤밧(שבת)이라는 단어도 회개와 관련이 있다. 샤밧은 ‘슈브(돌아가다)’라는 동사에 언약(בְּרִית, 브릿트)을 뜻하는 ‘타브(ת)’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이다. 따라서 안식이란 언약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타브는 원래 십자가를 형상화하여 만들어진 단어다. 우리 인간은 언약, 즉 십자가로 돌아갈 때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된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때 비로소 우리 인간은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안식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사람들이 십자가 언약과 상관없이 살기 때문이다.
십자가 언약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나의 왕국에서 내 자신이 왕이 되어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담 이후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존재양식이다. 선악과는 하나님보다 내가 내 인생의 왕이 되어 살겠다는 선언이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나를 지혜롭게 해줄 것 같은 것들을 내가 자유롭게 추구하며 살겠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반드시 탐욕에 이끌리는 삶이다. 탐욕에 이끌릴 때 하나님도, 이웃도, 이 땅의 자원들도 모두 나의 행복과 쾌락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남을 압제하고 착취해서라도 내 행복과 쾌락을 확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은 우리 옛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내가 살던 옛집을 불태우는 일이다. 내가 내 인생의 왕이 되어 나를 만족시키는 삶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 내 옛 자아가 죽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십자가다. 그래서 안식은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정욕과 탐심의 죽음을 철저히 경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진정한 안식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여행이나 쉼을 통해 힐링을 추구한다. 그러나 진정한 안식이 없는 것은 거기에 언약의 핵심인 십자가가 빠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당시 북이스라엘 사회는 학대와 착취와 압제로 가득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탄식과 절망으로 가득했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는 어떤가? 국민의 행복지수는 그리 높지 않다. 반면 세대와 계층간의 갈등지수는 치솟고 있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꿈을 펼쳐야 할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고 있다. 인터넷 댓글을 보면 인격 살인 수준의 글과 책임 전가로 가득하다. 민족 분열도 70년째 지속되고 있다. 사회와 가정 구석구석 안식이 없어 관계는 메마르고 갈라져 있다. 사회가 분열되고 서로의 관계 안에 사랑이 메마르는 건 죄 때문이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 왕국을 불태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언약으로, 십자가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풍요와 힘을 추구하는 것은 우상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그런 나라에서 힘없고 나약한 자들은 더욱 짓밟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는 이런 한국사회에 책임이 있다. 교회는 그동안 교회내의 종교적인 활동에 바빴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너무 쉬운 구원만 가르쳤다. 세상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소멸시키는 삶을 강조하지 못했다. 세상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보다, 세상 속에서 내가 원하는 축복을 얻고 형통하고 성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리더인데 사회에서는 불신자와 다름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회공동체와 삶의 주변으로 물러난 기독교는 세상의 눈에 지극히 이기적이고 편협한 ‘개독’이 된 것이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사회 공동체 속에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지 못하고 신앙을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축소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며 사는 것 대신에 자신들의 행복과 쾌락을 위해 우상을 섬기며 형식적인 종교행위를 반복한 결과이다. 이스라엘의 위기는 국력이나 경제력의 약화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에서 멀리 떠난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아모스도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다섯번이나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의 위기도 다른 것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 언약에서 멀리 떠나 자기 만족적인 종교행위에 머물러 있는 교회가 바로 위기인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던 구약 선지자들의 외침은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는 외침으로 이어진다. 그들이 외친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지켜질 때 이루어지는 나라였다.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을 돌볼 때, 그것은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뛰어 노는 나라가 된다고 그들은 예언했던 것이다.
북이스라엘에게 몇 차례 경고의 싸인을 보냈던 하나님은 이제 마지막으로 아모스를 통해 말씀하신다. 암 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지금까지는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에 이제 심판하시는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고 경고한다. 우리 삶에 문제와 고난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경고적 재앙이다. 그래서 경고적인 재앙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변장된 축복이다. 경고적인 재앙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손길임을 감지해야 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 때는 돌이킬 기회가 없다. 그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과 멀어진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암 4:13,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 결론적으로 아모스는 앞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소개하고 있다. 그 하나님은 산들을 지으시고 바람을 창조하신 창조주다. 자신의 뜻을 사람에게 보이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는 시간의 주인이시다.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심판주인 것이다. 아모스는 하나님이 우리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종교적인 착각에 빠진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최후 심판자로 오신다고 그는 말했다. 심판의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 분의 언약,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자아를 못 박아야 한다. 내가 주인이 되었던 나의 왕국을 불태워야 한다. 다른 관계가 파괴되더라도 내 욕심을 먼저 채우려 했던 지난 날들의 모든 선택들을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흐르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것은 제도의 개혁만으로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못박는 내면의 작업이 따라야 한다. 이 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스스로 자신들의 왕국을 불태우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각자가 십자가로 돌아와서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못 박을 때 비로서 우리 삶에는 샤밧, 안식이 찾아온다. 이 진정한 안식이 우리 사회 공동체에 가득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